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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07화 (107/158)

제107화

남자는 조금도 농담 같지 않은 투로 농담했다. 녹스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덤덤하고 무심해 보이는데 하는 말은 영 귀족 같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그가 말한 것을 생각해 보자면 그는 귀족이다. 그것도 흔하디흔한 몰락 귀족.

“대화가 끝나면 하나 챙겨 드리죠.”

“그것참 반가운 말입니다.”

남자는 자존심 같은 게 없어 보였다. 그런 걸 챙길 환경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자존심을 굽히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 아마 이렇게 살아온 지 꽤 되었다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일한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얼마 안 됐습니다. 3개월쯤? 가문 사정이 더 안 좋아져서 말입니다.”

“타인에게 꽤 쉽게 말을 하시는군요.”

“그야, 어차피 다신 볼 일 없는 사람 아닙니까.”

에스테리온은 그렇게 말하며 맥주의 나머지를 한꺼번에 비웠다. 어차피 맥주를 마실 생각이 없던 녹스가 자신의 것을 그의 앞으로 슥 밀어 주었다. 에스테리온은 사양하지 않았다.

녹스는 에스테리온 론더, 론더라는 성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면 한미한 가문이긴 한 모양이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나마, 남작 가문이었다는 사실 정도.

“사정이 더 나빠질 일이 있습니까.”

“많습니다. 특히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더 그렇지요.”

“저런.”

녹스는 심심한 위로를 보냈고 남자는 녹스 몫의 맥주를 들이켜는 것으로 답했다. 남자는 묻지 않는 것을 말해 주진 않았지만 묻는 것엔 꼬박꼬박 답을 해 주었다.

그때쯤 펍 주인이 요리를 하나 들고 나왔다. 닭을 오븐에 찐 것 같은 요리였는데 겉면에 기름기가 줄줄 흘렀다. 색은 짙었고 누린내가 났다. 녹스는 딱히 입맛이 돌지 않았지만 눈앞의 에스테리온 론더는 아무렇지 않게 다리를 하나 뜯었다.

“이런 일보다 더 좋은 일자리가 있을 텐데요.”

“하도 돈을 빌리고 다녔더니 이제 귀족들 사이에선 절 써 주지도 않습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니 몸 쓰는 일보다야 그쪽이 나을 텐데.”

“그렇기야 하지만, 필사할 때 쓰는 종잇값, 잉크 값은 거저 나오는 게 아닙니다.”

“환자에게 돈이 꽤 들어가나 봅니다.”

“…뭐, 그렇죠.”

에스테리온은 질긴 고기를 씹어 삼키며 말했다.

“약값만 해결된다면 무슨 짓이든 할 텐데.”

그 말은 꽤 신빙성이 있었다. 귀족이라는 직함을 달고 지금 여기서 평민처럼 일하는 모습만 봐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녹스는 허리를 펴고 바르게 앉아선 질긴 고기를 대충 씹어 대는 상대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배웠습니까.”

“어디까지 배웠냐라….”

남자는 닭고기를 씹다 말고 시선을 굴렸다.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가문 사정이 괜찮았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자살하기 전까진 말이죠.”

“그럼 기본은 다 배웠다는 소리겠군요.”

“예. 혹시 일자리라도 주선해 주려고 하시는 모양인데 그만두십시오. 비아 가문에서도 절 쓰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그때 그 파티장에도 돈 빌리러 간 거였거든요. 남자는 덤덤하게 말했다.

“소식이 늦나 봅니다.”

“아무래도 평민들과 섞여 살다 보면 귀족들 사이에서의 일은 못 듣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녹스가 설핏 웃었다.

“약값만 해결된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말 진짭니까?”

에스테리온 론더가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녹스는 그 꼴이 제법 웃겼다. 아주 오래간만에.

“라이네리오 가문을 찾아오십시오.”

“라이네리오 가문이라면….”

이미 망한 가문이잖습니까.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 같은 얼굴이었다. 녹스가 당황한 듯한 그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낡은 의자가 끼익 소리를 냈다.

“조금만 귀 기울여 보면 알게 될 겁니다.”

툭.

녹스는 자신의 반대편 소매에 붙어 있던 금 단추를 뜯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에스테리온의 시선이 도르륵, 단추에 가 붙었다.

“기억하고 있으면 좋고, 흘려들어도 괜찮고.”

녹스는 그 말을 남기고 펍을 나섰다. 대충 아무거나 시켜 먹던 기사가 맥주를 급하게 들이켜곤 녹스의 뒤를 후다닥 따라 나왔다. 그사이 눈은 그쳐 있었다. 녹스는 마차가 섰던 곳까지 천천히 걸었다. 눈은 그쳤지만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

“돌아가지.”

마차에 올라타 말하자 기사가 마부에게 출발하라는 말을 전했다. 채찍 소리가 들리자 녹스가 움찔거리며 어깨를 굳혔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입 안의 살을 씹었다.

마차는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저택 앞에 다다랐다. 마차에서 내리니 누군가 저택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할리드였다.

녹스는 그를 한 번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할리드의 푸른 시선이 녹스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입술 즈음을 맴돌고 있었다. 녹스는 그런 그를 모르는 척 지나쳤다. 녹스가 그를 지나쳐 다섯 걸음쯤 걸었을 때, 할리드가 입을 열었다.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녹스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럴까도 한번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할리드가 뒤돌아보았다.

“도망갈까. 어차피 이젠 넌 날 다시 잡아다 네 곁에 놓을 권한 따윈 없을 텐데.”

녹스의 말엔 가시가 있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를 못 느끼겠더군요.”

녹스의 말에 할리드의 걸음이 한 발짝 가까워졌다.

녹스는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겨우 한 발짝 가까워진 그와는 다르게, 아주 쉽게 할리드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차가워진 손이 할리드의 뺨에 닿았다. 녹스는 손끝으로, 간지럽도록 그 뺨을 쓸어내리다 속삭였다.

“이젠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니까.”

“…….”

“앞으론 내게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대지 못할 테니까.”

녹스는 잔인하게 속삭였다.

“이런 말 듣기 싫었으면 그냥 날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

할리드의 표정에 금이 갔다. 그게 통쾌할 법도 한데 녹스는 그런 기분도 들지 않아 곧 다시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홀 가운데, 녹스에게 버려진 것처럼 서 있는 할리드만이 남았다. 할리드의 숨도, 열린 문에서 들어오는 공기를 따라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3개월, 녹스가 몸을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황제는 매번 녹스의 컨디션을 확인했고, 그의 복권 일을 정한 게 바로 일주일 전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복권이 당장 오늘이라는 소리였다.

최대한 빨리 일정을 잡아 달라는 녹스의 말에 황제가 일을 당기고 당긴 결과였다.

그가 회복하는 동안 옷의 치수가 빠르게 바뀌는 탓에, 매번 새로 재야 했다. 녹스는 어차피 동의한 복권이니 순순히 할리드의 요청에 따라 치수를 재고 새 옷을 맞추었다. 몇 번이나 옷의 치수가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녹스는 이제 겨우 예전과 엇비슷한 기량을 낼 수 있었다. 아마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3개월 만에 이만큼 회복한 것도 어디냐 싶었다.

“치수가 많이 늘었군.”

재단사가 새로 만든 옷을 걸치는 녹스의 모습을 보며 할리드가 말했다. 녹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와 자신의 건강을 걱정한다는 것이 마냥 웃기다 싶었다. 염려할 거였다면 그 전부터였어야지.

하지만 겉으로 그 생각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녹스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감정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감정이란 것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대에게 전해 주는 것이니까.

녹스는 그에게 아무것도 전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잠시 거울 안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환복하기 위해 잠시 드러낸 상체는 예전과 비교하자면 볼품이 없을 정도로 말라 있었다. 다행히 기본 체격이 있어 깡말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녹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손목을 몇 번 돌려보다 이내 손을 내렸다.

“이걸로 끝이라면 연회 전까지 방으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그의 말에 할리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존대할 필요 없어. 어차피 곧 복권될 테니.”

“아뇨. 규칙은 규칙이죠. 복권 전까진 이 상태를 유지하겠습니다.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너무 불편해 마시죠.”

할리드는 자신의 말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거부하고 나서는 녹스의 행동에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그가 깨어나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 무엇도 제게서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억지로 안겨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할리드는 계속 속이 탔다. 그리고 그 속을 모를 녹스가 아니었다.

녹스는 옷을 이루고 있는 천과 자수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매끄러운 것들이었다. 마치 과거의 자신이 입었던 옷처럼. 그는 그럼에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원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황제와 공작의 성노예. 그 말을 듣지 못한 귀족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녹스는 복권을 받아들였다. 그 누구도 녹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알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옷을 갈아입고 어떻게든 컨디션을 끌어올린 녹스의 턱은 유난히 날카로워 보였다. 할리드는 그 턱 끝을 바라보다 말했다.

“연회가 갑작스럽진 않았나.”

“지금 묻는 게 의미가 있습니까.”

“…황제 폐하께선 네가 복권한 걸 모두가 알길 바라시는 것 같더군.”

녹스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할리드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모두의 앞에서 저를 가지고 놀았던 황제에게 다시금 작위를 받는 일이라니. 광대놀음이나 다름없겠군.

하지만 자신이 생각한 것을 이루고자 한다면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다고 여겼다.

“…상태는 괜찮고?”

“제 상태와 상관없이 치러야 할 일이잖습니까.”

할리드와 녹스 사이는 정말 최소한의, 나눠야 할 대화만이 흘러갔다. 할리드는 그에게 어떤 말이라도 말하려 애썼으나 녹스는 그걸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감흥이 들지 않는 화려한 옷을 맞추고, 감흥 없는 인간과의 대화는 피곤하기만 했다. 차라리 빨리 연회 시간이 되었으면 했다.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

할리드의 계속되는 말에 녹스는 그냥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제가 입을 다물어 버리자 할리드는 대꾸할 말이 없어 자연히 조용해졌다. 아, 차라리 이게 낫다. 녹스는 가볍게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눈을 뜨니 슬슬 황궁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녹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 전하십시오. 공작께서도 새겨듣고.”

“…뭐지?”

“식이 시작된 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끼어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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