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화려한 샹들리에가 어느 날의 나무토막처럼 보였다. 한 알 한 알 달린 크리스털은 유리 조각 같았고 번쩍이는 황금은 오늘따라 보잘것없어 보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저들끼리 떠들기 바빴다.
황제 폐하께서 그 노예를 복권시킨다는 소문이 귀족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졌다. 황제 폐하께서 드디어 미쳤다는 말부터 그 노예가 황제를 드디어 구워삶았다는 말까지.
하지만 황제가 내놓은 답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발티아스 데론 후작이 녹스 라이네리오의 공을 빼돌렸다!
그 충격적인 소식에 사교계가 술렁였다.
“발티아스 데론의 저택이 불탔다던데 정말인가요?”
“황제 폐하의 손에 죽었다는 말이….”
“그래요? 저는 들키자마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들었는데요.”
아무도 정확한 사정을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녹스 라이네리오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게 의미가 있나?
귀족들은 한 번 더럽혀진 것은 다시 쓰지 않았다. 한 번 바닥까지 떨어진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같았다.
시간은 빠르게 지났고 연회 홀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게 치장한 귀족들이 턱을 치켜든 채 자리를 채워 나갔다.
오늘의 연회는 초대장을 받은 모든 귀족이 참석하는 바람에 연회 홀이 꽉 찼다. 이런 구경거리는 놓칠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녹스 라이네리오가 복권하는 자리이자 황제와 공작의 성노예가 지위를 되찾는다는 그 서커스 쇼 같은 일. 떠들기를 좋아하는 귀족부터 평소 파티에 잘 참여하지 않는 굵직한 인사들까지 모두가 자리를 잡았다.
소문만 돌던 중에 드디어 얼굴을 맞댈 일이 생긴 귀족들은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녹스 라이네리오가 원래는 어떤 사람이었죠?”
누군가 물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녹스 라이네리오의 노예 생활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단연 화제였기 때문에 그 전의 녹스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다.
라이네리오 공작가의 장남. 공식 자리가 아니면 잘 나타나지 않는 신비주의의 공자. 나타나기만 하면 차분히 가라앉는 주변의 분위기, 서늘한 듯한 마스크. 그를 우러러보던 자들도 제법 있었을 테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떠했나.
그저 황제와 공작의 성노예. 막상 까놓고 보니 결국 별다를 거 없었던 인간. 그것을 구경하러 오는 귀족들의 입매에는 전부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몸을 그렇게 굴려 가지고…. 예쁨받아 이렇게 되나 보죠?”
“공작은 그렇다 치고 황제 폐하께도 총애를 샀다더니, 반역죄를 저지르고도 공작위를 되찾을 수 있군요.”
“공표된 것으론 과거 황제 폐하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던데. 그런 거였다면 왜 오해를 사 노예가 되었던 걸까요?”
“전부 다 핑계인 거죠. 부인, 너무 순진하신 것 아닌가요?”
황제는 녹스의 복권을 축하하는 연회를 발표할 때 이미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널리 알렸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많이 없었다.
후작 하나가 그의 손에 죽고도 벌 받지 않음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그 후작은 연회에도, 공식 자리에도 잘 나타나지 않아 황제의 측근임에도 주목받지 못하던 자였으니. 황제, 펠티온이 일부러 그의 죽음을 언급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발티아스 데론, 그는 후작이 되기 이전에도 귀족이었다. 그렇기에 노예 신분일 적에 귀족을 죽였다는 사실은 녹스에게 득이 될 것이 없었다. 황제는 최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연회로 돌렸다. 발티아스는 그렇게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죽음을 맞이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런 초라한 죽음.
귀족들은 연회장 한 편에 모여 저들끼리 시시덕거렸다.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부채로 입을 막기 바빴다. 비뚤게 오르는 입술을 막을 도리가 없으니, 부채로라도 가리는 게 최선이었다.
공작이라니! 아무리 본디 공작가 사람이었다지만 노예로 한 번 전락했던 자에게 다시 공작위를 준다니!
일부 귀족들은 그 처사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만약 공이 있다면 그 공에 맞춰서 새로이 작위를 내리면 될 텐데. 모든 귀족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공작위를 돌려주겠다니. 가문의 반란과는 다르게 귀족들은 녹스 라이네리오 개인이 세운 공에는 관심이 없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시기와 질투에 미쳐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다시 라이네리오의 성을 되찾은 녹스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는 시작되었다. 이는 황제의 측근들이 모두 인정한 자리였다. 현 황제가 즉위할 때 한 번 피바람이 불었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자들은 입을 다물고 상황을 살피기에 바빴고,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함부로 입을 놀렸다.
“할리드 비아 공작님 드십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할리드 비아, 지금 실컷 떠드는 녹스 라이네리오와 깊은 연관이 있는 자. 할리드 비아는 여전히 파티에 파트너 없이 참석했다. 그 자신이 두지 않는 탓도 있었고 그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탓도 있었다.
귀족들에게 할리드란 말 그대로 계륵이었다.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지도 못하고 연을 이어 친해지기도 어려운 존재. 하지만 또 다른 사람의 손을 잡는다면 위협이 될 만한 그런 존재.
“어머, 오늘도 혼자 오셨군요.”
“하긴, 그 노예가 있는데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어요?”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 아닌가요?”
“그것도 그렇겠죠?”
그러자 누군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소문에 의하면 아직도 그가 그 노예를 잊지 못했답니다.”
“신사분, 노예라뇨. 오늘 복권되실 분께….”
“정식으로 복권되지 않았으니 아직은 노예인 것이 아닙니까.”
콧수염을 얄팍하게 기른 신사는 천박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누군가 물었다.
“그런데 잊지 못한다뇨? 어차피 손쉽게 가지고 놀 수 있어 손을 댄 게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마치 마음이라도 줬다는 것 같잖아요. 가소롭다는 듯한 말투였다. 노예를 사랑하는 귀족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던가. 신사가 말했다.
“얼마나 홀렸으면 사내 몸을 못 잊게 만들었을까요. 전 그 비법이 너무나 궁금하군요.”
누군가 그 천박함에 전염되어 답했다.
“신사분. 궁금하시면 본인이 왔을 때 직접 묻는 건 어떨까요.”
“아하하, 그러기라도 해야겠네요. 저 또한 궁금하거든요.”
그들은 마음껏 녹스를 조롱했다. 적당히 자리 잡은 할리드의 귀에 그 소리가 들어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할리드는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천박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자들에게 향했다. 저들끼리의 대화에 빠진 사람들은 그가 다가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주위 귀족들만이 고개를 돌리고 슬쩍 주변에서 물러났을 뿐이었다.
“내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군.”
“…아.”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아주 즐거운 듯 이야기하고 있어 내 귀에까지 들어오더군.”
“아, 아닙니다. 별것 아닌 대화였습니다.”
“아, 나를 가지고 별것 아닌 대화를 했다?”
“그, 그것이….”
마음껏 떠들어 대던 콧수염의 신사가 말을 더듬었다. 그는 소동물처럼 시선을 피하며 몸을 떨었다. 고작 이런 놈들의 입에 녹스가 오르내린다는 게 짜증이 났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도, 절망스러웠다.
“책임지지 못 할 말은 하는 것이 아니지.”
“…….”
“불만이 있어 보이는 눈초리군.”
“아, 아닙니다.”
할리드는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을 한 번씩 훑어보았다. 면면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할리드의 시선이 스칠 때마다 그들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할리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들의 앞에서 불편한 침묵을 지키다 말없이 그들을 지나쳤다. 나중에 한꺼번에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싸늘한 눈초리가 자신들을 지나치자 그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졌다. 개중에는 불만을 마음에 품은 자도 있었다. 공작이라 해 봤자 어차피 남자 노예에게 빠진 공작일 뿐이고 이번에 복권하는 자는 노예 출신일 뿐이다. 그가 본래 공작가의 외동아들이었다는 것은 분노로 머릿속에서 지워진 후였다.
“지엄하신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그리고 문지기의 외침으로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가운데 깔린 붉은 카펫을 밟는 황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위엄 있어 보였다. 이런 연회에 이렇게 빨리 나타난 것은 아마 오늘 복권하는 녹스 라이네리오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녹스 라이네리오는 연회에 입장조차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것이 두려워서라고 쑥덕거렸고 누군가는 공작과 황제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 그렇다고 입을 놀렸다.
황제는 쑥덕이는 소리에 대놓고 미간을 찡그렸다. 황제의 기분이 상한 것 같자 모두가 입을 합 다물었다. 어쨌든 그는 자기 형제를 죽이고 피의 즉위식을 펼친 자였다. 심기를 거슬려 좋을 것이 없었다.
황제가 가운데 길을 걸어 가장 상석에 앉았다. 연회의 음악은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고 귀족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할리드는 황제의 상석과 가까운 곳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펠티온은 할리드를 확인한 후 자신의 시종장을 불러 귓속말했다. 황제의 시종장은 고개를 끄덕이곤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황제의 부름을 받들어 녹스 라이네리오는 입장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