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황제는 녹스의 입장 자체를 식의 순서로 넣어 버렸다. 그를 귀족 한가운데 홀로 덩그러니 세워 두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입장과 퇴장을 식순으로 넣어 버리고 그를 귀족들에게서 보호하려 했다.
할리드 또한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벌컥, 문지기의 손에 문이 열리고 녹스 라이네리오가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그가 노예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입장하는 모습에 잠시 숨을 참았다. 날카로운 눈매, 본래보다 더욱 벼려진 턱선, 몸에 정확히 들어맞는 검푸른 색 연회복,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그 어떤 것보다 반짝이는 어깨의 술까지 무엇 하나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들은 그가 노예였던 것도 잠시 잊고 그의 입장을 바라보았다. 걸음걸이부터 턱을 든 각도 그리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 모습까지 올곧음이 묻어나는 그는 그 누구보다도 귀족적이었다.
누군가는 그 사실에 자존심 상해했다. 노예로 전락했던 자가 그 누구보다도 귀족 같다니.
녹스는 길고 긴 카펫 위를 걸어 상석 앞에 닿았다. 황제와 녹스의 시선이 얽혔다. 황제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시종장이 벨벳으로 감싼 긴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녹스 라이네리오.”
“부름을 받듭니다.”
“그대는 나를 지켰다.”
“과찬이십니다.”
“하나 어리석은 내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바. 회수했던 공작위로 복권시키고 그에 맞는 보상을 내리겠다.”
녹스가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벌렸다. 예를 다하는 자세였다. 황제는 상석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보상이라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아마 황실 소유의 땅 같은 게 아닐까요?”
“어쩌면, 그 다이아몬드 광산일 수도 있습니다.”
“광산은 너무 간 것 아닌가요?”
귀족들이 너도나도 지저귀고 있을 적에 황제의 입술이 열렸다.
“그대에게 검을 하나 하사하고.”
곧이어 모두의 입에서 경악이 나올 말이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삼 회의 면제권을 내리겠다.”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면제권. 그것이 무엇이던가. 무슨 죄라도 사해 주는, 오로지 황실 직계만이 가지고 있는 단 한 번의 권한!
그런데 무려 세 번의 면제라니!
귀족들은 다시 바쁘게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녹스 라이네리오는 아주 차분하게 황제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감읍할 뿐입니다.”
황제는 녹스 라이네리오가 무릎 꿇은 자리 바로 앞에 서서 벨벳으로 감싼 검을 내렸다.
녹스가 두 손으로 그 검을 귀하게 받아 들었다. 감싼 벨벳이 바닥에 떨구어지자 검은 몸체에 금장으로 장식된 검이 보였다. 그 검은 검집의 끝과 끝에 황금색의 곡선이 새겨져 있었고 손잡이에는 간단한 장식 외엔 달린 것이 없었다.
허례허식으로 내리는 것이 아닌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검이라는 뜻이었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선포하듯 말했다.
“그대는 이제부터 제국의 라이네리오 공작이다.”
녹스는 침묵했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장내가 잠시 가라앉았다. 감히 황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누군가 작게 씨근덕거렸다.
“노예 주제에….”
만약 소란 속의 말이었다면 그 누구도 듣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의 말은 침묵 속에서 새어 나온 것이었고 모두가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소리를 낸 자가 다급히 헙, 입을 다물었다.
말 한 자는 제가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 초, 이 초, 삼 초. 시간이 지나도 무어라 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도 심지어 황제 폐하마저 말이 없었다. 서로 눈치를 보던 자들이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녹스 라이네리오가 여기서 기를 펴지 못하는 건은 당연한 일이나, 당사자를 복권시킨 황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상황을 허락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그러게요. 폐하께서 내린 말에 답이 없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일은 상상도 못 했을 텐데요.”
“…그 사이에 귀족의 소양을 잃어버렸나 봅니다.”
조금씩 번져 나가는 산불처럼 몇몇 사람들의 입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말은 입으로 옮겨지고 가당찮은 용기는 크기를 부풀렸다. 이제 막 공작위를 되찾은, 노예였던 남자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앞을 바라본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거봐, 아무런 말도 못 하지. 공작위를 되찾으면 뭐하나. 고귀했던 몸은 이미 진창에 박혔고 가진 힘도 지위도 없는데. 이름뿐인 공작. 아무런 힘도 없는 노예가 감히 그 이름을 달았네. 그런 말이 시시각각 퍼져 나갔다.
황제와 할리드의 눈썹이 일그러져 갔다. 만약 무슨 일이 있어도 끼어들지 말라는 녹스의 말이 없었다면 진즉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반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놓인 녹스는 차분해 보였다. 그리고 하사받은 검의 검집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검집은 흠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폐하.”
이제 소란스럽기까지 한 홀 내를 가르는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하나.”
그가 말했다. 펠티온은 잠시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녹스가 검집에서 검을 빼내고 그 검집을 바닥에 내버렸을 때, 어느 방향을 향해 성큼성큼 발을 내디딜 때.
그제야 그 의미를 알았다. 누군가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고 누군가는 얼굴이 새파래져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시시각각 떠들던 자들은 녹스의 싸늘한 눈빛에 얼어 버린 듯 그 자리에 못 박혀 서 있었다.
그들은 도망가야 한다고 느꼈다. 무언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가장 먼저 ‘노예 주제에’라는 말을 꺼냈던 남자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감히 화, 황제 폐하 앞에서 검을…!”
어차피 전부 연극일 거다. 본디 황궁에는 허가받은 기사들 외엔 검을 들고 들어올 수 없다.
귀족이 귀족을 죽이는 것은 큰 죄다. 아무리 공작이라고 한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 면제권만 없다면.
잠깐, 면제권?
잠시 남자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순간 생각이 끊기고 눈앞으로 촤악! 칼날이 번뜩였다. 순식간에 어깨부터 아랫배 옆까지 불같은 통증이 화악 번졌다.
“끄아아악!”
비명이 홀 안을 시끄럽게 울렸다. 녹스는 고요한 얼굴로 뺨에 튄 피를 닦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미안하군, 한동안 누워 있느라 힘이 많이 약해져서.”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쓰러진 그에게 다가갔다.
“사, 살려….”
“그래서 단번에 죽이질 못했어.”
푹.
녹스는 검을 역으로 쥐어 바닥을 기는 그의 머리를 꿰뚫었다. 툭. 살려 달라 내밀었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모두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한 귀족의 죽음을 보았다.
보는 자들의 손이 벌벌 떨렸다. 그리고 녹스의 시선은 곧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여기 있는 자들을 다 죽여도.”
녹스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욕보이던 자들을 향했다.
“하나.”
녹스의 검이 또 다른 누군가를 향해 겨누어졌다. 으아아악!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녹스는 그의 뒤축을 밟아 넘어뜨리고 그대로 검으로 내리찍었다.
푸확! 다시금 피가 분수처럼 튀고 새빨갛게 물든 녹스는 당장에 저를 피해 도망가는 자들을 향해 뛰었다.
폐하, 살려 주십시오. 폐하! 누군가 애절하게 말했으나 펠티온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굳어 있었다.
폐하, 꺼억. 끅. 검에 목이 꿰뚫린 자가 카펫 위로 쓰러졌다. 귀족들은 녹스의 검이 자신을 향할까, 벽과 테라스 쪽으로 도망갔다. 그 토끼 떼를 모는 것은 오로지 녹스라는 짐승 하나였다.
녹스는 고개를 느리게 돌리며 자신의 먹잇감을 확인했다.
그의 검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배가 갈리고 그 안에 있던 내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울컥거리며 피를 내뱉은 자들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녹스는 쓰러진 자의 등을 붙잡고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목을 베었다. 우득, 끄득. 끅. 뚝.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떨어진 목을 녹스가 옆으로 내버렸다.
지옥이다. 지옥이 펼쳐졌다. 황제는 문득 어디서 이런 장면을 한 번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자신이 형님의 머리를 들고 이 홀을 방문했을 때. 그때가 생각났다. 자신이 황제가 되던 그때가.
“하아….”
그렇게 녹스는 그 자리에서 열 명 하고도 두 명을 더 죽였다. 귀족들은 모두 벽에 붙은 채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녹스를 바라보았다.
면제권이 있는 미치광이. 지옥에, 아니 진창에 처박혔다 올라온 악마 같은 모습의 녹스는 그들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이제, 두 개가 남았군요.”
열둘을 죽이고도.
그 말은 경고였다. 자신에 대해 함부로 떠들지 말라는 경고. 모두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목소리를 내는 자가 있다면 당장 그의 손에 죽을 테니까.
귀족들이 긴장으로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녹스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귀족들을 가르고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검을 한 번 털고 손을 내밀었다.
잠시 뜻을 모르던 연회 홀의 하인들이 얼마 뒤 그 의미를 알아들었다. 하인 하나가 단번에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진 검집을 쥐어 녹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귀족은 황제 앞이 아니면 허리를 숙이지 않는다. 공작이라면 더더욱.
녹스는 피가 묻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한 손에 든 채 황제에게 두 팔을 가볍게 벌려 인사했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고 아무도 그를 잡지 못했다.
그는 자그마한 변명도 없이 귀족들을 살해하고 그대로 카펫을 걸어 들어왔던 입구로 사라졌다.
연회는, 그걸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