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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10화 (110/158)

제110화

녹스는 마차를 타고 라이네리오 저택으로 향했다. 라이네리오 가문의 저택은 황제의 명령으로 깨끗하게 보수된 상태라고 들었다. 그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날붙이 표면에 비친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던 녹스는 피를 닦은 천을 내버리고 날 부분에 손가락 끝을 가져다 댔다.

검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손끝이 조금 베였다. 애써 닦은 피가 방울져 날 끝을 타고 흘렀다. 녹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손가락을 날에 더 꾹 누르다가 상처가 벌어지자 이내 손을 거뒀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침묵으로 가득한 마차 안에서 장식품이 된 양,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차가 멈추고 마부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그는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오로지 눈만 깜빡였다.

숨을 내뱉는 것이 의식된다. 살아있다는 것을 견디기가 힘들다.

하지만 녹스는 살아가기를 택했다. 그렇다면 버틸 수밖에 없었다. 부질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저택에 도착한 듯 마부가 문을 열었다. 마차에서 내린 녹스는 곧 헛웃음을 쳤다. 눈앞에 보이는 저택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저택은 너무나 완벽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녹스는 이것이 마치 질 나쁜 장난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풍경이라니.

녹스는 비딱하게 입술을 올리고선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정문에 좌우, 일렬로 선 사용인들이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본래 저택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은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였다. 그럼 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답은 뻔했다. 저택을 황제, 펠티온이 손 봤다면 사용인은 할리드, 그의 손길이 닿아 있을 게 분명했다. 그가 손수 골라 채워 놓은 사람들. 녹스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바닥을 향해 있는 사용인들의 시선을 보며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단 한 명도, 자신의 편이 아니다.

그는 중앙을 걸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하루라도 빨리 보좌관을 뽑는 게 좋을 듯했다. 여기 있는 모든 자가 황제와 할리드의 손이며 발이자 눈이었다. 녹스에게도 똑같이 제 손발이 되어 줄 자가 필요했다.

다만, 보좌관을 구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공작 위를 되찾았다 하더라도 황제와 공작의 성노예였던 자의 보좌관이 되고 싶어 하는 귀족은 없을 테니까.

‘있다면 내 몸뿐인 연줄이라도 타고 황제나 공작에게 접근해 보려는 놈들이 대부분일 테고.’

녹스는 냉정하게 평가했다. 지금 자신에게 들러붙어 얻어 낼 수 있는 것은 그런 것이 다였다. 몰수당했던 사업체들의 일부를 돌려받기는 했으나 전부 찾은 것은 아니었다. 황제의 측근들 입에 들어간 것은 도로 뱉어 내 줄 수가 없을 테니까.

녹스는 죽은 아비가 사용하던 집무실로 향했다. 아버지의 천박한 취향이 닿아 있던 집무실은 마치 금방이라도 아비가 어디선가 나타날 것처럼 그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녹스는 거기서 약간의…. 그래, 구역감을 느꼈다. 어찌나 신경을 써 주셨는지.

녹스는 자신을 따라온 남자에게 명령했다.

“전부 바꿔.”

“알겠습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이 남자는 이 저택의 집사란다. 자신이 고른 적도 없는 이가 집사라니… 좀 웃기기는 했다.

“이름이 뭐지?”

이제 서른 남짓 되었을까. 꽤 젊어 보이는 얼굴의 집사에게 녹스가 물었다.

“앤디 아드리안이라고 합니다.”

“몰락 귀족 출신인가?”

“그렇습니다.”

공작가의 집사는 무조건 귀족의 혈통을 타고나야 한다. 하지만 적임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겠지.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결국엔 데려온 것이 저 몰락 귀족이다. 녹스는 확신했다. 내 모든 행동이 저 눈을 통해 그들에게 보고되겠구나.

몰락 귀족은 무엇이든 하니까.

녹스는 설핏 웃었다. 누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한다던 남자의 얼굴은 꽤 진지했었지. 녹스는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이 저택은 지금 온전히 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할리드와 펠티온이 만들어 놓은 가짜 둥지일 뿐이지.

그렇다고 이 가짜 둥지에 몸을 욱여넣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결정하고 받아들인 일이다. 이제 와 괜히 받아들였다고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는 이야기다.

녹스는 천천히 집무실을 훑어보다 곧 커다란 집무 책상을 바라보았다. 바꾸라고 명령은 했지만 지금 당장 바꿀 수는 없는 노릇. 고급 나무를 썼지만, 쓸데없이 화려하게 조각된 책상에 앉은 녹스는 뻑적지근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언젠가 제가 받아야 했을 자리였지만 지금은 남의 자리에 앉은 것만 같다. 녹스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집사에게 명령했다.

“보좌관을 뽑겠다.”

“원하시는 조건이 있으십니까.”

“몰락 귀족이라도 상관없다. 서류 업무에 능한 자, 영지 관할 업무에 해박한 자.”

“예.”

녹스가 턱을 살짝 들었다.

“그리고 죽으라는 말에 진짜 죽을 수 있는 자.”

녹스의 눈빛은 스산했고 집사는 짧은 침묵을 지키다 겨우 답했다.

“……예.”

“거르는 것 없이 올라왔으면 좋겠군.”

“예.”

“아, 참.”

녹스는 마침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집사는 돌아 나가려다 다시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책상에 팔꿈치를 얹고 겹친 두 손에 턱을 괴고 웃었다.

“그대는 할리드나 펠티온이 죽으라 하면 죽을 수 있나?”

올라온 입꼬리엔 묘한 독기가 스며 있었다.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공격할 수 있는 자의 눈.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에 망설임이 없는 눈. 집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런 걸로 하지.”

녹스는 나가 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집사는 뻣뻣하게 굳은 어깨로 집무실을 나갔다. 집무실엔 녹스 홀로 남았다. 담당 하인들을 부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자리에 앉은 그대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위해 잠시 침묵 속에 빠졌다.

“한동안은 조용히 있는 게 좋겠군.”

극적인 복권, 복권이 이루어지자마자 황궁에 피를 흩뿌린 자. 그것이 바로 녹스 라이네리오였다. 녹스가 그런 짓을 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조롱받고 무시 받는 것보단 두려움의 대상인 것이 낫다. 존중받지 못하는 권력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그렇기에 녹스는 스스럼 없이 검을 들었다. 황제와 공작에게 다리나 벌리던 창부라 손가락질받는 것보단 차라리 면제권을 앞세워 언제 검을 휘두를지 모르는 미치광이 이미지가 낫다는 말이다.

그래서 녹스는 한동안 저택의 문을 닫고 아무도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바깥에 얼굴을 비출 생각도 없다. 녹스는 책상 위를 툭툭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얼마나 버틸까.”

손끝은 곧 책상 위를 긁었다. 자신의 부재를 그 둘이 얼마나 견딜지, 녹스는 누군가와 내기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성노와 검을 든 미치광이 사이에 서 있는 그와 어울려 줄 만한 자가 이 사교계에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재미없기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어느새 집사에게 호출되어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담당 하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자신의 목을 조를 것들이 제 뒤를 따르는 감각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녹스는 온종일 날을 세우고 있던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망설임 없이 가주가 사용하는 침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어 침실 문에 다다르자 하인들이 자연스럽게 양옆에서 문을 열었다.

끼익-.

열린 문 안으로 보이는 광경은 다시 한번 녹스를 기가 차게 만들었다. 침실은 아버지가 사용하던 침실이 아니라 자신이 소공작 시절에 쓰던 방과 똑같이 꾸며져 있었다.

‘저택을 복원하는 데 할리드의 조언을 받았나 보군.’

녹스는 잠시 숨을 참았다. 지금 겪는 모든 것이 버거웠다. 잠시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전부 나가.”

“예.”

“부르기 전까진 아무도 들어오지 말고.”

“예.”

하인들은 그의 말에 토를 다는 일 없이 충실히 맡은 역할을 해냈다.

하인들이 나가고 홀로 남은 녹스는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잠시 쉬어 가기 위해서. 갑갑한 겉옷을 대충 벗어 던지고 파고든 침대의 감촉은 부드러웠지만 동시에 차가웠다. 녹스는 침대에 웅크린 채 잠시 자신의 체온으로 그것이 따뜻해지길 기다렸다. 눈을 감으면 그냥, 어둠이다.

* * *

녹스는 저택에 처박혀 한동안 영지 일만 보았다. 뿔뿔이 흩어져 있던 영지는 그동안 수많은 체계가 바뀌어 있었다. 녹스는 제각기 다른 양식으로 올라온 영지 서류를 바라보다 이내 새로운 양식을 작성했다. 그리고 집사를 불러 그 양식을 하달하라 명했다.

쓸모없는 내용이 너무 많이 기록된 서류, 반대로 상황을 파악하기에 턱없이 부실하게 작성된 서류들은 영지 일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질 않았다. 특히 오랫동안 영지를 돌보지 못한 녹스에겐 더욱 많은 양의 유의미한 정보가 필요했다.

‘어차피 다시 라이네리오 가문 아래로 모였으니 체계를 한 번 바꿔 주는 게 나아.’

그래야 자신들의 주인이 바뀐 줄 알 테니까. 각각 양식이 다른 보고서를 검토하는 것은 시간을 잡아먹는다. 즉, 비효율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일단 이번 달에 올라온 것은 어쩔 수 없었기에 그는 차근차근 서류를 읽어 나갔다.

똑똑-.

녹스가 이제 막 서른 번째 보고서를 보고 있을 때. 누군가 집무실 문에 노크했다. 녹스가 서류를 내려다보며 건성으로 손짓하자 하인이 문을 열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집사였다.

“공작 각하. 지원서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

“총 서른두 명의 지원자가 있었습니다.”

“서른두 명이라.”

본디 공작가의 보좌관 자리라고 하면 평균적으로 백 명 이상의 지원자가 있었다. 지금 녹스 라이네리오의 평판은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상황.

‘서른 명을 넘긴 게 용하다고 해야 하나.’

녹스는 집사가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놓은 지원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 이건 못 쓰는 놈이군. 이건 능력이 없고. 하아, 이건 무슨 생각으로 지원한 건지. 녹스는 할리드와 펠티온이 심어 놓은 자들을 고르기 이전에, 능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놈팡이들을 솎아 내야 했다.

그렇게 한 차례 걸러진 것을 다시 한번 살폈다.

집안이 너무 좋은 인물은 필요 없다. 툭하면 제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르려 할 게 뻔하니까. 황제나 할리드와 연결된 가문의 사람 또한 필요 없다. 첩자로 넣기 가장 좋은 인물들일 테니까. 황제파 가문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게 남은 지원서는 고작 네 장.

“필요한 보좌관은 셋.”

공작가의 영지는 많고 사람 손은 항상 모자랄 것이다. 녹스는 마지막까지 남은 네 명의 지원서를 내려다보다 개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에스테리온 론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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