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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11화 (111/158)

제111화

왔군. 녹스가 지원서를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원래대로라면 기준에 턱없이 모자라 결코 공작가의 보좌관이 될 수 없었을 사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었지.”

몰락한 론더 가문의 장자. 영지, 저택, 재산 뭐 하나 남기지 않고 몰락해 버린 그에겐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

지킬 것이 있는 자들은 강하다. 다만 그만큼 큰 약점이 된다. 과연 그가 자신의 손발이 되어 줄지. 아니면 두 남자의 또 다른 눈이 되어 버릴지. 만약 후자라면 자신의 실책이 될 것이고 전자가 된다면 제법 손에 잘 맞는 연장이 될지도 모른다.

“집사.”

“예.”

“이 네 명, 저택으로 불러.”

“알겠습니다.”

녹스는 오랜 시간 서류들을 본 탓에 피곤해진 듯 잠시 눈가를 문질렀다. 저택에 자기 사람은 없고, 사람 하나 뽑으려면 펠티온이나 할리드가 집어넣은 사람이 없는지 하나하나 살펴야 하는 삶이란… 귀찮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것은 제가 고른 삶이었고 앞으로 감당해야 할 것들이었다. 어른거리는 햇빛이 그의 눈을 비추자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찡그려진 눈매 안의 눈동자는 여전히 검고 어두웠다.

그리하여 다음 날.

녹스는 차례대로 네 남자의 면담을 진행했다. 바닥에 처박혔다 해도 공작은 공작. 제가 골치 아플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뒤에서 욕하더라도 앞에선 고개를 숙여야 하니까.

녹스는 면담을 시작하기 전, 지원서를 다시 한번 살폈다. 가문도 그럭저럭 능력도 그럭저럭, 원래대로라면 공작가의 문턱도 밟아 보지 못했을 자들. 녹스는 딱히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건 오래전에 뭉그러진 지 오래였다.

지원자는 넷. 필요한 것은 셋.

고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한 명이 아주 대단히 멍청하게 굴어 주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알랑거려 보겠다는 의도가 투명하게 보이는 그는 형편없는 말솜씨를 자랑했다.

“황제 폐하께서 공작님을 총애하시니 제가 공작님의 뒤를 받쳐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자신의 앞에서 황제의 총애를 논하다니. 그 누구나 입에 올리는 말이기는 하나 제정신이라면 본인 앞에선 하지 못할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저는, 히익…!”

콱!

녹스의 허리춤에 있던 검이 곧장 그의 귀를 스쳐 벽에 가 꽂혔다. 날카로운 검이 벽에 박힌 채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녹스는 머저리에게 단호히 말했다.

“나가.”

그는 얼굴이 새파래져선 허둥지둥 방을 나갔다. 녹스는 잠시 머리를 짚은 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앞의 둘이 무난했던 게 다행인 건가. 최소한 자신의 앞에서 이상한 야망을 드러내진 않았으니까.

“다음.”

잠깐의 휴식을 취한 녹스는 마지막 지원자를 들이라 명령했다. 그리고 곧 그 남자가 들어왔다. 집안은 폭삭 망했고 가진 것도 변변찮은 남자. 그리고 아픈 동생의 약값을 벌어야 하는 남자.

제게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한 에스테리온 론더. 그가 왔다.

그는 그때와 달리 멀끔한 옷을 입고 있었다. 맞춤은 아닌지 소매가 살짝 짧아 손목이 드러나긴 했지만 그때 보았던 낡은 셔츠 차림보다는 나았다. 그는 녹스와 눈을 맞추더니 제법 배우처럼 대사를 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 각하.”

“그래.”

인사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예법을 제법 잘 배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지만 몸의 태가 좋아 인사는 아주 말끔했다. 녹스는 그의 지원서를 바라보며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손에 턱을 괴었다.

“간단한 것부터 가지. 지원한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죠.”

녹스가 지원서에 시선을 둔 채 그대로 물었다.

“그리고 아픈 여동생의 약값을 구하기 위해서?”

“예.”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 아주 간단하군.”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그대를 나쁘게 볼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나?”

“거짓말하는 것보단 솔직한 쪽이 낫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귀족 사회에서 솔직함은 독이야.”

그가 솔직함을 논했으니 녹스 또한 솔직하게 말했다. 잠시 에스테리온의 입이 다물렸다.

“뭐, 그래도 좋아. 신선했어.”

녹스는 그의 지원서가 놓인 집무 책상 위를 툭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잠시 침묵. 집무실 안은 녹스가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소리가 뚝 멈추었다.

“자네는 절박하지 않은가?”

“절박합니다.”

“절박한 자가 솔직함을 내세운다고?”

녹스는 조언하듯 말했다.

“자네가 정말로 절박했다면 내게 어떤 감언이설을 해서라도 이곳에 붙겠다 각오했어야지. 거짓말, 아부, 입에 발린 칭찬. 그 모든 것을 동원했어야 한다는 말이야.”

“……그건.”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예?”

녹스는 책상을 두드리던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만약 할리드나 펠티온이 심은 자였다면 철저히 교육시켜 보냈겠지. 하지만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에스테리온 론더는 귀족 사회에서는 결코 갖춰서는 안 될 소양인 솔직함을 가지고 면담을 진행하려 했다. 조금도 귀족답지 못한 사내, 에스테리온 론더.

“다시 한번 묻지. 지원한 동기가 어떻게 되지?”

“…….”

에스테리온은 잠시 침묵했다. 녹스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에스테리온은 녹스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에스테리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자신의 무엇을 시험하려 하나. 그는 곧 자신이 내세운 것을 떠올렸다. 솔직함. 귀족이 갖춰서는 안 될 소양. 하지만 녹스 라이네리오가 지금은 괜찮다고 했던 그것.

“…돈이 필요합니다. 동생을 치료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녹스가 설핏 웃었다.

“그래.”

녹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뒷짐을 지고 서 있는 에스테리온의 옆을 스쳐 걷다가 곧 두 발자국 정도를 남기고 멈추어 섰다.

“솔직함을 무기로 내세운 자네가 만약 내게 거짓을 고하게 된다면?”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그러자 녹스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아니, 고작 그런 것 받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녹스의 목소리엔 고저가 없었다.

“네가 내게 거짓을 고하면 네 동생까지 죽는 거야.”

순간 론더의 얼굴이 굳어졌다. 녹스는 그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다 알고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천천히 그를 달래듯. 그 목소리는 아주 낮아서 누군가 귀를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에스테리온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하지만 자네가 내게 진실만을 고한다면 네 동생이 완치될 때까지 모든 것을 지원하지.”

“…정말입니까?”

“그래, 진실만을 말한다면.”

녹스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했다. 그러고는 어느 순간 에스테리온 론더의 등 뒤에 붙어 그의 귀에 속삭였다. 론더는 저도 모르게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마치 뱀의 것 같았다.

“그거면 돼.”

론더는 그에 응하듯 답했다.

“공작님께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공작님께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맹세하겠습니다.”

“무엇을 걸고.”

“…제 모든 것을 걸고.”

에스테리온은 자신이 말한 ‘모든’ 것에 제 목숨만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

그렇기에 녹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의 등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집무 책상으로 가 앉았다. 에스테리온은 녹스가 떨어진 다음에야 자신의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음을 눈치챘다. 쿵, 쿵, 쿵.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잔뜩 긴장을 해 그런 것 같았다.

‘이상하다.’

에스테리온은 이전에 만났던 녹스를 떠올려 보았다. 테라스에서의 녹스는 그 누구보다도 가련해 보였다. 펍에서의 녹스는 무심해 보였고. 이 집무실에서의 녹스는 사람을 압박하는데 능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쥐고 있는 것처럼 사람을 긴장시켰다.

녹스는 에스테리온의 지원서를 책상 안쪽 서랍에 넣었다.

“내일부터 일하도록 하지.”

에스테리온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녹스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얼굴로 나가라 손짓했을 뿐이다. 론더가 자리를 비우자 녹스는 그냥저냥 장점도 단점도 없었던 앞의 두 명을 떠올렸다.

“이걸로 형식은 갖췄나.”

아까 그 얼간이를 빼면 딱 세 명이 남는다. 녹스는 지원자들의 지원서를 모두 서랍에 넣고 나서 집사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내일부터 셋 다 쓴다. 보좌관 집무실을 정돈해 놔.”

“알겠습니다.”

그는 녹스의 결론에 조금의 첨언도 하지 않았다. 공작인 녹스가 직접 그들을 확인했다지만 고작 이런 절차로 보좌관을 뽑은 것에 대해 그 어떤 걱정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녹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사람이 아니니까.

녹스는 영지에서 올라온 서류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오늘 무리해 놓으면 내일부터는 새로 뽑힌 보좌관들이 업무를 파악해 가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것이다.

“차를 올릴까요?”

“마음대로 해.”

녹스가 무심히 말했고 집사는 손수 차를 우려 올렸다. 녹스는 그 차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서류를 보았다. 집사는 자신이 올린 차를 입에도 대지 않는 녹스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녹스는 그가 무엇을 하든 그저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펠티온과 할리드의 사람이다. 마음껏 설치게 놔둘 수는 없지만 아마 제가 전부 통제할 수도 없을 것이다.

녹스는 묘하게 자신을 관찰하는 태도의 집사를 모르는 척하며 서류를 보았고 집사는 녹스를 보좌하는 척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움직인 것은 차가 완전히 식었을 때쯤. 그리고 해가 져 서류를 보던 녹스가 침실에 들어야 할 때쯤이었다.

녹스는 다 본 서류들을 책상 한쪽에 쌓아 놓고 침실로 향했다. 집사의 눈짓 한 번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집사는 다 식어 버린 찻잔을 치우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성격도 급하시군.”

집사, 앤디 아드리안은 곧 책상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펜으로 무언가를 휘갈겨 적은 후 새의 발목에 걸어 주었다.

[심어 둔 자들은 전부 떨어졌고 녹스 님의 경계가 심해 당분간 자세한 보고는 힘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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