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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12화 (112/158)

제112화

새는 발목에 종이가 걸리자마자 어두운 밤하늘을 훨훨 날아 저 멀리로 사라졌다.

앤디는 창문을 닫았고 이내 자신의 방을 밝히는 촛불을 껐다. 저 편지를 받을 자는 아마 눈이 빠지도록 자신의 답변을 기다리느라 잠도 자지 못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 시각, 녹스는 자신의 방에서 하늘을 가로지르며 사라지는 새의 모습을 확인했다. 촛불도 끈 채 어두운 방 안에서 그 새를 시선으로 좇던 그는 곧 비웃음을 머금고 창문 앞의 커튼을 휙 쳤다. 거친 소리와 함께 커튼이 흔들리다 멈췄다. 혹시나, 그들이 제게 사람을 심지 않았을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 따위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기분이 더러웠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으면 뭐 하나.”

녹스가 중얼거렸다.

“결국 날 통제하려 들면서.”

그렇게 검은 새는 하늘을 날아 어디론가 향했다. 그 새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높이 날다 이내 천천히 하강했고 곧 어느 저택에 닿았다.

비아 공작저였다.

* * *

해가 밝고 아침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저택을 찾아온 사람은 당연하게도 아픈 여동생을 업은 에스테리온 론더였다. 집사는 그를 잠시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한 뒤 녹스에게 보고하러 그의 방으로 올라갔다. 아직 이른 아침인지라 녹스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똑똑.

“들어와.”

하지만 방문을 노크했을 때, 또렷한 녹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아직 수면 가운을 입은 채로 창가에 서 있었다. 앤디는 그런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말을 전했다.

“에스테리온 론더 경께서 여동생을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별관의 방을 내어 줄까요?”

“아.”

녹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본관으로.”

“예? 본관 말입니까?”

“제대로 된 방으로 내줘. 그리고 에스테리온 론더는 내게 올려 보내.”

“…알겠습니다.”

“20분 있다 보지.”

“예.”

그 말과 함께 녹스는 탁상 위의 종을 흔들었다. 종소리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집사는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방 밖으로 나섰다. 하인들은 창문의 커튼을 치고 녹스의 옷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녹스는 약간의 졸음이 남은 얼굴로 하인들의 옷시중을 받으며 생각했다.

‘얼마나 아껴 줘야 남들 눈이 돌아갈까….’

녹스가 무언가를 가늠하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하인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옷시중을 들고 있었지만 녹스는 알고 있었다. 이놈들 하나하나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집사에게 보고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녹스는 옷시중이 끝나자 커프스를 매만지며 방 밖으로 향했다. 하인이 우아하게 방문을 열었다. 녹스는 방을 빠져나와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녹스가 집무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 곧장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20분이 지난 때였다.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테리온 론더 경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와.”

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집무실 안으로 집사와 에스테리온이 들어섰다. 에스테리온은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지나치게 솔직한 얼굴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제 말을 믿고 여동생을 데리고 왔지만 약간의 불안이 서려 있는 얼굴은 녹스가 보기엔 너무나 솔직했다. 앞으로 저러면 안 될 텐데.

‘아니, 뭐 상관없나?’

녹스는 집사를 향해 말했다.

“넌 나가 봐.”

“알겠습니다.”

집사가 에스테리온을 놓고 나간 뒤, 녹스는 어제 보던 서류를 마저 보며 그에게 물었다.

“방은 마음에 들던가.”

“…지나치게 큽니다.”

“아이들은 금방금방 커. 그다지 큰 방은 아닐 거야.”

녹스는 본관의 괜찮은 방. 즉, 공작가의 직계나 쓸 법한 방을 내어 주고도 고요한 투로 말했다. 에스테리온도 자신의 여동생이 머무르게 된 방이 어떤 방인지 아는 모양이었다. 약간의 부담스러움이 얼굴에 비쳤다. 아, 그러니까 너무 생각이 얼굴에 드러난대도. 녹스는 잠시 서류를 옆으로 치우고 말했다.

“난 그대에게, 아니. 그대의 여동생에게 무엇이든 더 해 줄 수 있어.”

“무엇이든, 이라면.”

“어쩌면 내 딸처럼 키울 수도 있다는 말이지.”

“…제가 충성만 한다면 말입니까?”

“그래.”

녹스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사람이 된다면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게 해 줄 거야.”

“…….”

“몸이 다 나으면 최대한 큰 데뷔탕트 파티를 열어 주지. 그대의 동생은 제국이 부러워하는 레이디가 될 수도 있어.”

에스테리온은 입을 다물고 고요히 녹스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다 이내 아무렇지 않게 서류로 다시금 시선을 내렸다. 에스테리온은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결국 보잘것없는 답변만을 내놓았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녹스가 입꼬리를 당겼다.

“당연히 그래야지.”

녹스는 다시금 집사를 호출해 론더를 보좌관들이 일할 곳으로 안내하게 했다. 집사는 에스테리온을 같은 층에 있는 보좌관들이 사용할 집무실로 안내하는 동안, 슬며시 입을 열었다.

“안에서 무슨 대화를 했습니까?”

음, 이렇게 득달같이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그도 눈치라는 게 있었다. 이제 막 복권된 녹스가 어느 방면으로 곤란해하고 있는지 대강이나마 감을 잡고 있다는 소리였다.

“아, 그게….”

에스테리온은 가볍게 말을 꺼냈다.

“별다른 대화는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집사는 이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를 추궁하긴 어려웠다. 포섭하기는 더더욱 애매했고. 공작님께서 대놓고 특별 대우를 하겠다고 나선 남자다. 어설프게 포섭하려 했다간 모든 이야기가 라이네리오 공작님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곳입니다.”

짧은 안내가 끝나고 집사는 집무실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오전 9시 오셔서 오후 6시에 돌아가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특별한 질문이 있다면 저를 불러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에스테리온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안쪽을 살폈다. 보좌관 집무실 안에는 총 세 개의 책상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었으며 정리할 서류가 이미 책상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그렇게 에스테리온 론더의 보좌관 생활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이른 아침이 지났다. 집사에게 안내받아 집무실로 들어온 두 명의 보좌관과 인사를 나눈 게 그가 한 첫 번째 일이었다. 그 뒤론 죽 대화 없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녹스는 그들이 다 도착했다는 보고를 들은 후, 그들에게 올라올 서류를 기다리며 집사에게 말했다.

“한동안 바깥 일정은 잡지 마.”

“알겠습니다.”

“보좌관들이 제 역할을 하는지 좀 봐야겠으니까.”

“네.”

“아, 그리고.”

“예.”

“바깥으로 무슨 소문이 나도는지 좀 알아봐.”

“…소문이라뇨?”

“내가 보좌관을 고용했으니 아마 어떤 식으로든 말이 돌 거야. 귀족들 사이에서의 여론을 좀 들어봐야겠어.”

“알겠습니다.”

녹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시기가 되었다. 사교계의 인간들이 따뜻한 봄기운에 고개를 내밀고 저들끼리 지지배배 떠들기 시작할 때라는 소리다.

“예상 범위 안이려나.”

녹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집사가 떠도는 소문을 잡아 왔다. 그는 보고하기 어렵다는 얼굴로 녹스의 앞에 섰다.

“보좌관 관련으로 말이 나돌기는 했습니다만….”

“응, 그래서.”

“그것이….”

“왜, 라이네리오 공작이 보좌관들과 놀아나기라도 한다든?”

집사는 덜컥 말을 멈췄고 녹스는 그게 진짜라는 게 웃기지 않았다.

“정확히는, 젊은 남자 세 명을 뽑아 곁에 두는 이유가….”

“침실에 들이기 위해서라고?”

“…그렇습니다.”

“하여튼 사교계는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 천박하기 짝이 없어.”

“어떻게 할까요?”

“일단.”

“예.”

“난 세 명씩이랑 놀아날 생각이 없어.”

그 말은 의외라서 집사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한 명이면 충분해.”

“……그 말씀은.”

녹스는 집사의 얼굴을 살피다 이내 웃으며 고개를 슬 기울이고 말했다.

“농담이야.”

녹스는 찻잔을 내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집사를 지나치며 말했다.

“적극적으로 퍼트리는 놈이 누군지 알아 와.”

“알겠습니다.”

“아, 아니군. 나한테 보고할 필요 없이 바로 결투장을 처넣어.”

“예?”

“이건 농담 아니야.”

“…예에.”

“그럼 난 잠시 몸을 풀러 다녀오지.”

“알겠습니다.”

녹스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 훈련장으로 걸었다. 라이네리오 가문의 훈련장은 본디 훈련 중인 기사로 넘쳐야 하지만 가문이 한 번 무너진 후, 모든 기사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아마, 다시 돌아올 생각도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걸 자신이 감당하고 복구해 놓아야 한다. 녹스는 겉옷을 벗고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황제가 하사한 그 검. 이제 사람을 벨 일밖에 남지 않은 그 검을.

녹스가 훈련장 가운데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날의 궤도와 그 궤도를 좇아 움직이는 발은 느렸지만 아주 정확한 동작을 짚고 있었다. 마치 검술서의 표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녹스는 예전의 체력을 되찾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황제와 할리드에게 시달리며 깎아 먹힌 체력이 생각보다 꽤 되었다.

“후우….”

정확한 동작을 하는 것은 생각 외로 체력을 많이 잡아먹는다. 지금도 그랬다. 예전 같았으면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했을 동작들 하나하나가 근육을 찔러 대는 것 같았다. 녹스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자신의 몸을 단련하기로 했다. 녹스는 그렇게 세 시간이 넘도록 검을 휘둘렀다.

온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고 근육들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녹스는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턱 아래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그가 운동을 마치고 저택 안으로 들어갈 무렵, 집사는 편지를 한 장 받았다. 그것도 황가에서 온 편지. 그 편지는 그 어떤 종이보다 고급스러웠고 황가의 인장이 찍혀 있어 집사인 그가 맘대로 뜯어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곧장 그 편지를 들고 녹스를 찾아갔다. 마침 훈련장에서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녹스를 발견한 집사는 그의 앞으로 뛰어가 편지를 내밀었다.

“공작님.”

“…허어.”

황궁에서 벌써 편지가 왔다고? 성격이 급하기도 하지. 녹스는 편지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곧장 편지 봉투를 뜯어 내용을 읽기 시작했고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갔다.

“…같잖은 협박질을 하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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