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13화 (113/158)

제113화

“예?”

이제 우리 사이엔 차릴 체면도 없다는 건지. 편지엔 너무나 간략한 문장이 한 줄로 쓰여 있었다.

[그대의 피붙이를 데리러 와.]

그러니까 얼굴 한 번 비추라 이 말이었다. 그것도 녹스가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달고서. 그는 편지를 곧장 찢어발겼다. 찌익, 찍. 황제가 손수 골랐을 편지지가 그의 손안에서 가차 없이 찢겼다. 집사는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고 녹스는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다 찢은 종이를 바닥에 내버렸다.

“곧장 황제 폐하를 뵈러 간다.”

“곧장….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이 편지도 곧바로 오라고 부친 것일 게 뻔했다. 피붙이가 황제의 손에 있다는데 녹스가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목욕물을 준비해라.”

“아, 예.”

녹스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옷을 벗고 목욕 가운을 입은 후 욕실로 들어갔다. 녹스는 아직 물이 채워지지 않은 욕조를 멀거니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사용인들이 허둥지둥 물을 채워 넣는 것을 본 후에야 욕조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시중은….”

“필요 없어.”

녹스는 자신의 삶이 온전히 바뀐 이후, 타인이 제 몸에 손을 대는 걸 꺼리게 되었다. 그게 어떤 의도든 간에. 녹스는 천천히 목욕을 마쳤다. 황궁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거기엔 제 피붙이가 있었다. 자신이 수도 바깥으로 내보낸 아이. 제메일. 그 아이가 지금 황제의 손에 있다는 뜻이다. 녹스는 한 번 더 홀로 비아냥댔다.

“성격도 급해.”

자신도 어느 정도 일이 정리가 된 후, 제메일을 찾을 생각이었는데 황제가 한 발자국 더 빨랐다. 이것은 자신의 실수이기도 하다. 하,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그들에게 줄 ‘여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는 홀로 몸을 씻은 후, 욕실 바깥으로 나와 하인들의 시중을 받았다. 하인들이 물기를 닦는 손길에 움찔거린 그는 곧 마른 천을 빼앗아 스스로 몸을 닦았다.

“열다섯쯤 되는 남자아이가 입을 만한 옷을 구해 와.”

“예. 알겠습니다.”

“후계자의 방도 미리 봐 놓고.”

“예? 후계자의 방 말씀이십니까?”

“그래.”

녹스는 어차피 제메일을 찾아 자신의 후계로 삼을 작정이었다. 그 아이가 원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아마 제대로 된 결혼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사교계 평판이 그랬고 실질적인 자신의 미래가 그러했다.

물기를 다 닦은 후 하인들이 가지고 온 옷을 다 챙겨 입은 녹스가 커프스를 제대로 차며 걸음을 옮겼다.

“마차는?”

“준비되었습니다.”

“아, 그리고.”

녹스가 자신의 곁에 있는 하인에게 명령했다.

“에스테리온 론더를 데리고 와.”

“보좌관님을 말입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녹스는 1층으로 내려가 론더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꽤 급하게 나온 듯한 론더가 보였다. 그는 머리를 한 번 정리하고 녹스 앞으로 다가갔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황궁에 들어가는데 공작씩이나 되는 자가 홀로 들어갈 순 없지. 자네가 날 보좌해야겠어.”

“아, 알겠습니다.”

녹스가 마차 앞에 서자 하인들이 마차 문을 열었다. 녹스는 마차에 올라탄 뒤 론더에게 눈짓했다. 론더는 그를 보고 마차 안으로 훌쩍 올랐다. 론더는 조심스럽게 녹스의 맞은편에 앉은 채 말했다.

“…무얼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지?”

“다른 분들이 예법이나 황궁에 대해 더 잘 알 텐데 저를 데리고 가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녹스가 웃었다.

“그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지?”

“예.”

“그래서 그런 거야.”

“그래서 그런 거라면….”

제게 특별히 시키실 일이 있으시다는 겁니까? 그렇게 묻는 눈빛이 녹스에게 전해졌다. 녹스는 웃는 낯 그대로 그를 느른히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는….”

그의 말에 론더의 눈이 크게 떠졌다.

* * *

황궁은 다시 와도 사치스럽기만 했다. 이는 녹스의 눈에 그래 보인다는 말이었다. 하긴 이제 와서 뭔들 예뻐 보이겠냐마는. 녹스와 에스테리온은 황제의 시종장을 따라 복도를 걷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장은 길을 안내하기 전 그렇게 말했다. 그래, 펠티온은 내가 곧장 올 걸 알고 있었다는 거지. 녹스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에스테리온을 의식하며 시종장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거대한 문을 보았다. 황제의 알현실이었다. 녹스가 문 앞에 다다르자 시종장이 그의 도착을 알렸다.

“폐하,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이 도착했습니다.”

“들라 하게.”

녹스는 등허리를 타고 온몸에 가벼운 소름이 일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는 자신의 팔을 문지르는 대신 허리를 더 펴고 어깨를 단단히 굳혔다. 그리고 시종장이 여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왔군.”

오래간만에 보는 황제의 얼굴에 녹스가 미간을 와락, 찌푸릴 뻔했다. 상석에 앉아 있는 황제를 가만히 바라보던 녹스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지고하신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잘, 지냈나?”

황제가 사적인 감정이 듬뿍 섞인 목소리로 제 안부를 묻자 녹스는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말씨는 평이했으나 내용은 비아냥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황제는 제게 작위만 던져 준 후 자신에게 신경을 쓴 바가 없으니. 물론 신경을 썼대도 녹스 본인이 거절했겠지만.

황제는 녹스의 비아냥을 알아들었으나 그저 앉으라 손짓만 했다. 녹스는 그 손짓을 거절했다.

“저는 제 피붙이를 돌려받으러 왔을 뿐입니다.”

“일단 앉아.”

“명령이십니까?”

녹스의 싸늘한 말에 황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명령이야.”

“그러시다면.”

녹스는 황제의 왼쪽에 놓인 소파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앉았다. 에스테리온 론더는 그 소파의 뒤편에 뒷짐을 지고 섰다. 황제의 시선이 이젠 론더에게 가 붙었다.

“…그자는, 이번에 새로 뽑았다는 보좌관인가?”

“예, 그렇습니다. 크게 신경 쓰지 마시지요.”

녹스가 싸늘하게 말을 자르는 사이, 시종장이 차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녹스는 하나씩 놓이는 찻잔을 쳐다본 후 차가 다 따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차가 다 채워지자 물었다.

“그래서, 제 사촌은 어디 있습니까.”

“…천천히 이야기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천천히 이야기해 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사촌 아이는 곧장 봐야겠습니다. 조급한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시종장.”

“알겠습니다.”

녹스의 고저 없는 말투에 황제는 결국 시종장을 시켜 아이를 데리고 오게 했다. 황제와 녹스는 그동안 한 마디의 대화도 없었다. 애초에 녹스가 입을 열길 원치 않은 데다가 펠티온은 그런 녹스의 눈치를 계속해서 살피기 바빴으니. 녹스는 그저 이 상황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저를 그렇게 막 대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눈치를 본다니. 그것도 황제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말씀하십시오.”

그 말에 황제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제 사촌을 찾아 주셨으니 황제께서 원하시는 게 있으실 것 아닙니까.”

“…그런 걸 바라고 한 게.”

“아니라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무엇이든 좋으니 원하는 것을 말씀하시면 됩니다.”

네게는 무엇 하나 허투루 받지 않겠다는 투. 황제는 녹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염치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종종, 얼굴을 보여 줬으면 좋겠는데.”

“…….”

그 말에 녹스가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검고 싸늘한 눈이 펠티온을 직시했다.

“그것이 무어 어렵다고. 알겠습니다.”

녹스가 웃었다. 그의 눈매가 휘자 황제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의 눈가에 가 붙었다. 그의 앞에선 한 번도 지은 적 없던 표정이라 그런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미소는 어차피 타인에게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는 표정이다. 그들이 억지로 긁어 내 본 얼굴과는 다르게 이 정도는 어렵지 않다는 말이었다.

“형!”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녹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제메일, 그 아이가 있었다. 황제가 씻기고 입혔는지 깨끗하긴 했지만 아이는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녹스는 그 아이를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말했다.

“제메일, 제메일.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녹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이제 열여섯인 자신의 사촌을 바라보았다. 제메일은 그의 팔을 꽉 잡으며 참았던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형…. 어떠, 어떻게 된 거야?”

“가문이 복권됐어.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복권이 됐다고? 어떻게?”

“…그건 가면서 설명할게.”

제메일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는 아이의 앞에서 조용히 쓰게 미소 지었다. 그나마 이 아이라도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억울하게 죽은 핏줄들이 많았다. 아버지 때문에 그리고 자신을 속이고 기만한 사람들 때문에. 녹스는 손에 힘이 들어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제메일 앞에서 이성을 잃고 싶진 않았기에 론더를 불렀다.

“론더.”

“예.”

“아이를 마차로 데려가.”

“알겠습니다.”

론더가 가까이 다가와 제메일을 챙기기 위해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도련님. 이쪽으로.”

“아, 응….”

론더가 허리를 펴고 시선을 들었을 때, 녹스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녹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가볍게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론더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지?’

그 말 뒤로 자신이 마차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론더는 잠시 제메일의 등을 밀어 등 돌리게 만들고 녹스에게 말했다.

“빨리…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글쎄, 그리 빨리 가진 못할 것 같은데.”

“…예.”

론더는 천천히 녹스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녹스는 그와 반대로 고개를 가볍게 들었다. 황제의 눈이 커다랗게 떠진다. 녹스와 론더의 입술이 천천히 부딪혔다가 가볍게 비벼졌고 녹스는 그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가늘게 눈매가 휘었다. 악동처럼, 악당처럼.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