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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14화 (114/158)

제114화

론더는 자신의 입술에 부딪힌 그의 입술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그의 체온이 높은가. 아니, 그저 자신이 그렇게 느낀 것뿐이다. 론더는 화끈거리는 입술을 물리고 서둘러 제메일과 함께 황제의 응접실을 벗어났다. 그는 입을 막으며 서둘러 걸었다. 제메일이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그의 뒤를 쫓아갔다. 론더는 한참을 걷고 나서야 자신의 걸음이 아직 작은 열여섯 살에겐 빠르다는 걸 느끼고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아, 죄송합니다.”

“아, 아니야. 그보다 빨리 가자. 여길 벗어나고 싶어.”

제메일은 겁에 질려 보였다. 아무래도 황제가 자신의 가족을 모두 죽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론더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를 마차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각, 황제의 응접실은 침묵으로 휩싸여 있었다. 거기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있는 것은 녹스밖에 없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황제의 놀란 얼굴이 그의 손끝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아, 고작 이거 하나 보여 줬다고.

“잠시 실례했습니다.”

“…방금.”

그와 입을 맞춘 것이 맞나? 펠티온이 제가 본 게 맞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차마 묻지 못하고 말끝을 삼켰다. 녹스는 태연히 대꾸했다.

“예.”

“…라이네리오 공작.”

“예, 폐하.”

“…그대가.”

“왜 그러십니까.”

녹스가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손등 위에 턱을 괴었다.

“저라고 정부 하나 두지 못하겠습니까.”

녹스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사교계의 말처럼 세 명까지는 무리라도 한 명 정도면 저도 어렵지 않답니다.”

내 소문이 돌 동안 넌 뭘 했냐는 질책이었다. 황제의 입이 딱 다물렸다. 펠티온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키스하는 것을 본 것이 꽤 충격적이었는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녹스는 그동안 적당히 식은 차를 입에 가져갔다. 쓸데없이 달콤하기만 한 차를 맛보며 녹스는 생각했다.

‘쓸모없긴.’

차도, 그도.

녹스는 찻잔을 내려 두었다. 펠티온의 눈꼬리가 가볍게 떨렸다. 녹스로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자신을 더럽힌 건 그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을 그리 대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그것도 남자와 입을 맞출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녹스는 알고 있었다. 그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와 입을 맞추는 게 그에겐 가장 큰 자극이 될 거라는 사실을.

‘더러운 뜻을 담고 날 보는 것보단 훨씬 낫군.’

대체 내게 무엇을 기대했길래 그런 눈으로 보나. 복권시켜 주면 감사하다며 그대의 충실한 종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감격에 겨워 눈물이라도 흘릴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녹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만히 침묵했다. 얼굴을 보여 주는 거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무어 닳는다고. 다만 서로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이 대화를 나누어 줄 거라는 뜻은 되지 못한다.

“…그대가.”

그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던 녹스의 시선이 그에게 가 붙었다. 펠티온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어렵게 말을 뱉어 냈다.

“나를 원망하고 있다는 걸 알아.”

녹스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알면, 알아서, 뭘 어떻게 할 건데. 그는 자신에게 원하는 걸 내어 줄 수 없었다. 이미 망쳐 버린 사교계의 평판도 자신의 명예도 아무것도 나아지게 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녹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의 칼날 같은 말씨에 펠티온은 미간을 좁혔다. 그의 얼굴에 후회의 기색이 비쳤다. 녹스는 그것이 가증스러워 가볍게 손을 떨었다.

“…앞으로,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거야.”

“무엇이든?”

“무엇이든.”

그 말에 녹스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엇이든 한다라. 녹스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제가 무얼 원할 줄 알고?”

녹스의 말에 황제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녹스가 무엇을 바라는지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녹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정도면 충분히 얼굴도 보여 줬다고 생각했다.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제가 무슨 말을 꺼낼 수 있겠나. 사실 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대화 역시 자연스레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제는 벌써, 라는 말을 하고 싶은 얼굴이었지만 녹스는 그 면을 무시하고 뒤돌아섰다.

“다음번엔 여유를 두고 부르셨으면 좋겠군요.”

오늘도 제메일의 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바로 그를 보러 올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말에도 황제는 대답이 없었다. 녹스는 그대로 알현실을 빠져나갔고, 이내 탁,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펠티온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얼굴의 녹스가 눈앞에 있을 때는 어쩐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침묵만 가득했다.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란 말이다. 그런데….

“시종장.”

“예.”

조용히 황제의 자리 뒤에서 기립해 있던 시종장이 대답했다.

“녹스 라이네리오의 보좌관에 대해 더 알아 와.”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 전하께서 눈치채지 못할 리 없을 텐데요.”

“…알아.”

그러면, 더 미움받게 되실 거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어차피 황제 자신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 * *

마차 안, 녹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론더는 똑같이 입을 꾹 다문 채 녹스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입 맞췄던, 물어 놓은 아랫입술이 아직도 화끈거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제메일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기, 형.”

“아, 그래. 제메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말하자면 긴데. 짧게 설명하자면 누명이 벗겨진 거야.”

“누명?”

“그래, 누명.”

그 말에 제메일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금방 울 것 같은 얼굴이기도 했고, 금방이라도 분노할 것 같은 얼굴이기도 했다.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유가 전부 누명이라고?”

“그래.”

“어, 어떻게. 어떻게….”

제메일은 목이 막히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무릎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녹스는 상체를 제메일 쪽으로 기울여 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울지 마, 제메일.”

녹스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복수해 줄 테니까.”

“…복수?”

“그래, 복수.”

“…어떻게?”

제메일의 물음에 녹스는 그를 바라보았다.

“넌 앞으로 내 후계자가 될 거야.”

“하, 하지만 나중에 생길 형의 자식은 어쩌고?”

“내 입으로 설명하고 싶진 않지만, 어차피 너도 알아야겠지.”

녹스는 허리를 바르게 폈다. 그리고 자신의 사촌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난 그날 이후 노예로 살았어.”

“그건 나도 알….”

“황제와 공작의 노리개였지.”

제메일의 입이 다물렸다. 노리개가 어떤 노리개를 뜻하는 건지, 저 아이도 모를 나이는 아니었으니. 그나마 노골적인 말은 피하고 싶었는데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녹스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동안은 집에서 정양하도록 해. 지금 내 사교계 평판이 말이 아닌 만큼, 너도 사교계나 정계에 발을 들일 수는 없을 테니까.”

“알았어….”

녹스는 어둡게 가라앉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내 자리에 앉을 때까지, 모든 걸 되돌려 놓을 거야.”

“…형.”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알았어.”

덜컹.

그리고 곧 마차가 라이네리오 저택 앞에 섰다. 론더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 조용히 마차에서 먼저 내렸다. 녹스가 그다음 이어 내렸고, 제메일도 곧 녹스의 손을 잡고 내렸다.

“네 방은 이미 준비되어 있어.”

“…고마워.”

“한동안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몸을 회복하는 데만 전념해.”

제메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론더.”

“예.”

“제메일을 방으로 안내해 줘.”

“알겠습니다.”

녹스는 그렇게 혼자 집무실로 돌아갔고 론더는 제메일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제메일이 조용히 론더의 뒤를 따르자, 그는 제메일을 후계자의 방으로 안내했다. 이 방은 오래전에 녹스가 직접 쓰던 방이었다. 그 방 또한 예전과 징그러울 정도로 똑같이 재현되어 있었지만 두 사람으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론더는 방문을 열어 주며 제메일에게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종을 울리십시오. 그럼 하인들이 올 겁니다.”

“저기.”

“예.”

“…지금 형의 사교계 평판은 어느 정도로 떨어져 있는 거야?”

“…그것이.”

론더가 잠시 망설였다. 그는 몰락 귀족이라 사교계에 제대로 편승하지도 못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그에게조차 녹스의 평판은 귀에 들어올 정도였다. 그것도 매우 안 좋은 쪽으로.

“…좋다고는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무엇이 걱정되십니까.”

그 말에 제메일이 머뭇거렸다.

“형이 너무 힘들지는 않을까?”

“……아마도.”

론더는 이야기하는 걸 망설였다. 자신은 그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모르고, 얼마만큼 단단한지도 몰랐다. 다만 참 공교롭게도 입술이 어떤 온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이번에 알게 되어 버렸지만.

“괜찮으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아주 단단해 보였다. 그래서 그는 조금이라도 이 작은 도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고마워.”

“아닙니다. 그럼 푹 쉬시길.”

론더는 그 길로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두 명의 보좌관이 그가 무엇을 하다 왔나 궁금해했지만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해 나갔다. 그리고 업무 시간이 끝난 후 자신의 동생을 한 번 보고 배정된 제 방으로 돌아왔을 때, 집사가 그를 호출했다.

“주인님께서 부르십니다.”

“절 말입니까?”

“예.”

“아직 집무실에 계십니까?”

그러자 집사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아뇨.”

“그럼….”

“공작님의 침실로 가십시오. 공작님께서 부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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