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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15화 (115/158)

제115화

“예……?”

에스테리온은 잘못 들었다는 얼굴로 집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집사는 네가 들은 게 맞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집사 또한 공작, 녹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 한밤중에, 남자를 침실로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들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의 상황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알겠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뇨,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에스테리온은 결국 입을 다물고 집사의 뒤를 조용히 따르기 시작했다. 녹스의 침실은 저택 내 가장 위층에 있는 큰 방이었다. 한 층이 모두 그의 침실과 드레스 룸으로 꽉 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 가문이 휘청거리기 전에도 이만한 규모의 방을 본 적 없는 에스테리온이 그 사실에 놀라는 사이, 집사가 녹스의 방문에 가볍게 노크했다.

똑똑-.

“공작님.”

“론더만 들여보내.”

“…예, 알겠습니다.”

녹스의 목소리에 집사는 더더욱 기묘한 표정이 되어 에스테리온을 돌아보았다. 에스테리온은 순간 자신이 공작을 꼬신 세기의 미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가문을 말아먹을 그런 미인 말이다. 에스테리온은 찝찝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집사의 시선이 끈질기게 붙어 왔다. 에스테리온은 본능적으로 문을 닫았다. 그의 시선이 녹스에게 닿게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후,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자 어두컴컴한 방이 보였다. 희끄무레하게 켜진 촛불만이 방 안을 밝히는 전부였다. 묘한 분위기에 괜히 에스테리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씻고 나왔는지 젖은 머리를 넘긴 녹스는 가운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다리를 꼰 채로 그를 불렀다.

“론더.”

에스테리온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향해 녹스가 말했다.

“뭐 해.”

“예?”

“이리 와.”

“…네.”

녹스는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론더를 보고 설핏 미소 지었다.

“싫다는 소리 한 번 안 하는군.”

“무엇이든 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아, 그래.”

그러고 보니 너도 있었지. 무엇이든 하겠다는 사람. 녹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내 주변에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사람들만 가득하군. 내가 무얼 원하는지 따위는 조금도 모르면서. 그리고 그건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에스테리온 론더라는 남자 또한 같았다.

“내가 뭘 할 줄 알고?”

“…뭐든, 괜찮습니다.”

“네 뭐든에는 상사와 침대에서 뒹구는 것도 포함되어 있나 보지?”

“…원하신다면.”

“그렇다면 말이 쉽겠군.”

녹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몸을 침대 쪽으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부드럽지만 약간은 강압적인 손짓으로 그의 어깨를 눌러 침대 위에 앉혔다.

“누워.”

에스테리온은 제 쪽으로 허리를 숙여 휑하니 드러나는 녹스의 가슴팍에 시선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며 자리에 누웠다. 설핏 웃는 녹스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에스테리온은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 * *

“그러니까….”

에스테리온이 침대에 누운 채로 말했다.

“뭐, 하십니까?”

“뭘.”

에스테리온은 침대 옆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촛불 빛에 서류를 보는 녹스를 바라보았다. 겨우 가운 하나를 걸치고 있는 탓에 쇄골께가 엿보였다. 에스테리온은 내려가려는 시선을 겨우 위로 올리며 말했다.

“…하실 거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뭘.”

녹스가 서류를 내려다보며 또 한 번 설핏 웃었다. 에스테리온이 상상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녹스도 잘 알았다. 다만 저런 반응을 보이니 똑바로 대답해 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 놀려먹는 거다.

“거기서 자든가 해. 새벽쯤 돌려보내 줄 테니까.”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속에 불 좀 지르려고.”

“불, 말입니까?”

“그래.”

에스테리온은 오늘 낮에 보고 온 황제 폐하를 떠올렸다. 녹스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욕망인지 죄책감인지 애정인지 모를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에스테리온은 침대에 누운 채 황제에게 녹스가 대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사교계에 퍼진 이야기라면 조금 알고 있었다. 황제와 공작의 성적 노리개. 몸으로 둘을 홀린 몰락 귀족. 가장 고귀한 자리에 있던 노예. 하지만 그 무엇도 지금 제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와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저는 여기서 공작님과 하룻밤을 보낸 척하면 되는 겁니까?”

“눈치가 빨라서 좋네.”

“속을까요?”

“속든, 속지 않든 불은 질러질 거야.”

둘 다 내가 제 것인 줄 알거든. 녹스가 건조하지만 분명한 투로 비아냥거렸다. 녹스는 빛이 충분치 않은지 서류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에스테리온은 그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결국 자신이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얌전히 잠드는 것밖에 없다는 판단을 하고선 눈을 감았다. 이러나저러나 새벽까지 여기 있어야 한다면 잠시라도 잠을 청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곧 조용히 눈을 감은 에스테리온을 발견한 녹스가 생각했다. 적응은 참 빠르단 말이야.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녹스는 내일 필요한 서류를 다 보곤 기지개를 한 번 켰다. 그리고 침대를 돌아보았다. 얕은 잠이 든 에스테리온이 보였다.

녹스는 망설임 없이 침대 위로 올랐다. 짧은 잠을 청하고 있는 론더를 가볍게 흔들자 그가 부스스 눈을 떴다.

에스테리온은 잠기운이 가득한 눈으로 녹스를 올려다보았다. 촛불 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턱선이 가장 먼저 보였다.

“…몇 시입니까.”

“세 시. 이제 돌아가 봐도 좋아.”

에스테리온은 마른세수를 하며 몸을 일으켰다. 녹스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아,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곧 아직 잠에서 덜 깬 에스테리온의 셔츠에 손을 댔다. 론더가 잠시 굳은 채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녹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셔츠를 두 손으로 확 뜯어냈다.

뚜둑, 툭.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고급 셔츠의 단추가 허망하게 뜯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가 잠시 당황해 있는 사이 녹스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론더는 멍청하게 눈만 껌뻑였다. 곧 손을 거둔 녹스가 말했다.

“이제 됐어.”

“…아하.”

그가 뒤늦게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는 문을 손짓했고 에스테리온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등 뒤로 녹스의 말이 툭 던져졌다.

“그래서, 앞으로 내 정부가 될 각오는 됐나?”

“…방에 들어올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준비성이 좋다고 해야 할지. 설레발을 잘 친다고 해야 할지.”

녹스의 말에 에스테리온은 목 뒤를 긁적였다.

“내일 아침에 봐. 침대는 내가 적당히 꾸며 놓을 테니.”

“예, 안녕히 주무십시오.”

끼익. 달칵.

그렇게 문이 닫혔고 방 안엔 녹스 홀로 남았다. 녹스는 에스테리온이 누웠던 자리에 몸을 뉘며 생각했다. 그래서 집사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가볍게 발끝을 까딱였다.

한편, 에스테리온 론더가 새벽 늦게 엉망이 된 차림으로 방에서 나오는 걸 본 집사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돌아온 집사는 작은 종이를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새장 문을 열었고 곧장 그 종이를 묶어 새를 날려 보냈다. 창문 밖으로 날아가던 새를 지켜보던 집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전해도 될는지….”

이미 새를 날려 보내놓고도 답답한 마음에 그런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게 자신의 일이기는 하지만…. 푸드득, 새벽이라 날아가는 새의 날갯짓 소리가 참으로 요란했다.

그 새는 새벽이 다 지나가기 전에 할리드 비아의 손에 들어갔다.

그날 새벽, 할리드 비아 공작의 침실이 뒤집힌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고, 이는 녹스가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지겹지, 그놈의 집착.

결국 제가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놓지 못하는 그 미련한 집착. 녹스는 불을 질러 놓은 채 아주 오래간만에 편안히 잠들었고 제법 마음에 드는 꿈도 꿨다.

불이 타올라, 재로 온통 잿빛인 하늘 아래에 서 있는 그런 꿈.

* * *

녹스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인들을 호출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젖어 있는 침구를 치우라 명령하곤 욕실로 들어섰다. 이제 하인들은 녹스가 제 몸에 손을 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목욕 수발을 들겠다 나서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잘 됐다. 사내와 하룻밤을 보낸 자의 몸에 아무런 자국도 없으면 의심스러워 할 테니까. 녹스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손가락으로 표면을 튕겼다.

“불은 질렀고….”

이제 내가 뭘 해야 할까. 녹스는 잠시 물에 잠겨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가 모든 생각을 끝냈을 때는 욕조의 따뜻했던 물이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녹스는 가운을 걸친 채 집사를 호출했다. 집사는 단정한 모습으로 들어와 허리부터 숙였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내게 온 초대장들이 있겠지?”

“예, 있기는 합니다만….”

천박한 자들의 천박한 관심을 담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녹스도 그걸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하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얼굴로 답했다.

“전부 가지고 와.”

“…예, 알겠습니다.”

집사는 곧장 치워 두었던 초대장을 모조리 정리해 가지고 왔다. 집사에게서 초대장을 받아 든 녹스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필요 없는 것들은 성의 없는 손짓으로 바닥에 툭툭 던져 놓았다. 집사가 나중에 알아서 치우리라.

초대장은 저열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초대장에 그리 쓰여 있진 않았지만 그 속은 빤했다. 하지만 녹스가 찾는 것은 그런 천박한 파티의 초대장이 아니었다.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있군. 짙은 남색의 편지지에 찍힌 인장은 그가 찾았던 가문의 것이 맞았다. 데미트리 안델라스.

제국의 후작이자 과거 귀족파의 수장이었던 자의 이름이 종이에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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