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대대로 이 제국은 황권이 강해 귀족파가 큰 힘을 쓰지는 못했어. 지금은 죽고 없는 전 황태자가 제 수족들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고 황권을 깎아 먹어서 그나마 머리를 들고 다닌 거지.”
녹스는 긴 이야기를 마치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하녀가 내어 온 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 역시 취향이 아니다.
“아직도 모르겠어. 후작?”
녹스가 싸늘한 눈으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늙은 후작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내가 자네에게 협력해 주겠다고 말하고 있잖아.”
그 단호한 말에 후작이 잠시 주먹을 꽉 쥐었다. 황제와 비아 공작의 노리개로 추락해 이제 이름뿐이라는 공작가의 녹스 라이네리오. 하지만 그의 앞에 앉은 자의 기세는 결코 허울뿐인 자의 것이 아니었다.
“날 꼭두각시로 쓰겠다라….”
“그것이 아니오라….”
“아니야. 그런 헛꿈을 꿀 만해. 하지만 후작, 생각해 봐. 그대가 귀족파의 수장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건 막대한 부 때문이었지. 그래, 그 금광. 안델라스 가문은 꽤 긴 부를 누려 왔잖나.”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뭐. 똑같이 금광의 부를 가지고 수장 노릇을 하겠다? 내 뭐 하나 묻지.”
녹스의 눈이 노인의 눈을 서늘하게 바라보았다.
“그 금광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지? 10년? 아니 5년? 1년은 남았나?”
소파 팔걸이를 잡은 노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찰나의 권력을 원하나, 후작?”
그런 작은 그릇을 가진 사내였나 보군. 그래,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어. 녹스가 헛웃음을 켰다. 녹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후작은 반발심이 생겼다. 제 가문의 금광이 몇 년 남지 않았다 한들 지금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겨 빈털터리인 공작이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 무려 노예였던, 바닥에 떨어졌던 인간 따위가.
“…라이네리오 가문의 재정도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 그래, 영지의 세금은 내년에나 들어올 거고 돌아온 사업체들도 제 기능을 하려면 꽤 걸리겠지. 그런데 말이야.”
녹스가 허리를 앞으로 조금 숙이고 속삭였다.
“내가 가질 게 좀 있거든.”
“무슨…?”
“다이아몬드 광산.”
후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면 설마.
“그래.”
녹스가 싱긋 웃었다.
“황실에서 가지고 있는 그것.”
* * *
황실의 땅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된 것은 10년도 더 된 일이다. 전대 황제가 죽기 전에 발견되었다는 뜻이다. 제국의 모든 귀족이 그 사실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하늘을 찌르듯 올라가 있는 황가의 권위에 부까지 더해지다니. 그들의 속이 쓰려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 황제는 현명하게도 그 어떤 가문의 손도 빌리지 않고 천천히 다이아몬드 채굴을 시작했다. 느리지만 인내한다면 영원히 황실에 부를 가져다줄 보물. 그것이 바로 황궁이 가진 다이아몬드 광산의 이름이었다.
“…그 광산을 어찌 가져온단 말씀이십니까. 현 황제 폐하께서 궁핍하신 것도 아닌데 그걸 팔아넘길 리가….”
“광산 전부를 가지고 오겠다는 말은 아니야.”
녹스는 쓴 차를 더 마시지 못하겠는지 컵을 멀찍이 밀어 두었다.
“다이아몬드 채굴에 투자하고 어느 정도의 지분을 가지고 올 생각이지.”
“그러니까 그걸 수락할 리가 없….”
“있어.”
“예?”
“있다고.”
녹스가 조금 불쾌하게 웃었다.
“원하는 건 다 들어준다는 인간이 있거든.”
녹스는 무엇이든 다 들어준다던 황제의 말을 떠올렸다. 물론, 자신 역시 그것을 전부 다 믿고 있는 건 아니다. 분명 어느 정도 상응하는 대가를 건네긴 해야겠지. 그리고 그건, 아마 제겐 꽤 불쾌한 일이 되리라. 녹스는 발끝을 까딱이며 데미트리 안델라스 후작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원했던 것처럼 귀족파를 다시 모을 거야.”
다만, 나는 꼭두각시가 아니고 그대는 귀족파의 수장이 아니겠지. 그 속살거림에 후작이 꼬투리를 잡았다.
“당신이 황제의 끄나풀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찌 믿습니까.”
“황제의 끄나풀이라….”
녹스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후작, 난 여기서 면제권을 하나 더 쓸 생각이 있어.”
그 말에 후작의 얼굴이 굳었다. 그에게 남은 두 번의 면제권. 그것이 있는 이상 그 누구도 녹스 라이네리오 앞에서 목을 뺄 수 없으리라.
“…사과, 드리겠습니다.”
“꽤 불쾌했어.”
녹스는 느긋한 어조로 답했다.
“내가 이 꼴이 된 게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지? 내 탓? 아니면 멍청하게 당해 버린 전 황태자의 탓?”
“…….”
“아니. 아니야.”
녹스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고귀하신 현 황제 폐하와 비아 공작의 짓이지. 내가 얼마나 비참한 시간을 보냈는지 그대는 모를 거야.”
데미트리 안델라스는 도저히 알고 있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고귀한 노예. 공작가의 단 하나뿐인 외동아들에서 노예로 전락해 버린 저 남자는 귀족들의 흥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렇기에 얼마 나오지도 않는 소식들을 알음알음 귀동냥하며 지내는 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현실은 그보다도 끔찍했었지.
“지금 결정하라는 게 아니야. 잘 생각해 봐. 나도 슬슬 대외 활동을 시작할 거니까.”
“제가 당신과 손을 잡는다면 어떤 이득이 있습니까.”
“글쎄.”
녹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걸 왜 자신에게 묻느냐는 투로.
“지금처럼 저택에 처박혀 죽을 날만 바라보며 살진 않아도 되겠지?”
“…….”
녹스는 아무런 답도 없는 후작을 앞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 결정해도 좋아. 살아남은 자들을 결집시키는 건 그대가 해야 할 일이니. 아직 연락하는 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봐도 좋고.”
“그것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 그래도 그렇게 날아다니던 자들인데 한순간에 사라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걸 알고 절 찾아오신 거군요.”
“맞아.”
녹스가 비웃음인지 무엇인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내가 바보 천치인 줄 알았나?”
녹스는 그대로 응접실을 벗어났다. 지금까지 기척을 죽이고 있던 에스테리온이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데미트리 안델라스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짧게 침음을 삼켰다.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은 놈이었다.
그렇게 그날 이후로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이 대외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그에게 초대장을 넣었다.
다만 공식적인 약혼식이나 결혼식 혹은 탄생일처럼 중요한 자리가 아닌 가볍게 즐길 수 있는 파티 자리에만.
녹스는 그들이 자신을 취급하는 방식에 헛웃음이 났다.
“이렇게까지 얕보였나.”
녹스는 테이블에 앉아 초대장들을 하나하나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러다 초대장 하나를 보고 픽 웃고 말았다.
“할리드 비아 공작저라…. 이건 언제 도착한 거지?”
그러자 집사가 대답했다.
“오늘 아침 막 도착했습니다.”
“급했다 이거지.”
녹스는 초대장을 보고 웃었다.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는 초대장에 적힌 시간은 바로 오늘 저녁이었다.
녹스는 집사를 남모르게 쳐다봤다. 빠르긴 참 빨라. 그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집사에게 그 초대장을 내밀면서 말했다.
“준비해.”
“예.”
녹스는 할리드의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 어차피 전할 말도 있었으니 한 번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녹스는 그대로 집무실로 올라가 일을 보기 시작했고 약속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쯤에서야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은 오후 5시, 그리고 그가 준비를 시작한 시간도 오후 5시. 녹스는 의도적으로 늦을 생각이었다.
그가 자신을 기다리며 무슨 생각을 하고 또 어떻게 초조해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 지금 할리드 비아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그 더러운 기분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때는 시간이 가지 않는다고들 하던데 마차에 올라탄 뒤 비아 공작저까지는 너무나 금방이었다.
녹스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마차에서 내렸다. 이번에 데리고 온 보좌관은 론더가 아니었다.
에스테리온 론더는 비아 공작저엔 데리고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치 아까워 숨긴다는 듯이.
녹스는 스스로 그렇게 정해 놓았다. 자신이 그를 아끼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할리드는 견디지 못할 테니까. 그가 마차에서 내리자.
“라이네리오 공작.”
“너무 스스럼없이 부르십니다. 비아 공작.”
“…….”
할리드 비아, 그가 나와 있었다. 그는 마치 한참 전부터 나와 있던 사람처럼 바람에 머리가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녹스는 그것을 못 본 척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다가갈 때마다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녹스는 무표정으로 그를 지나치며 말했다.
“객이 먼저 들어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앞장서 주시겠습니까.”
“같이 들어가는 게….”
“그런 못 배워 먹은 행동은 하지 말고.”
“…….”
할리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녹스도 큰 기대는 없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응접실이 아닌 식당으로 향했다. 할리드가 초대한 자리가 저녁 식사 자리였기 때문이다.
체하겠군, 녹스는 담담하게 생각하며 할리드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섰다.
호화로운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음식의 가짓수는 셀 수도 없었다. 녹스는 그것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인들이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 주자 그는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신경을 많이 쓰셨군요.”
“…라이네리오 공작께서 오시는데 신경을 쓰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쓸데없이.”
녹스의 음성은 차디찼다. 그에 할리드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