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할리드는 가라앉은 기색을 숨기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숨긴다고 눈치채지 못할 녹스가 아니었지만. 그는 이 상황을 삐딱하게 생각했다. 자신의 노예였던 자가 이제 동등한 위치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을 거야.
할리드가 묵묵히 식기를 들었다. 녹스도 그 뒤를 따르듯 식기를 들면서 자연스레 식사가 이어졌다. 정확히는 식사하는 척에 가까웠지만. 두 사람 누구도 음식을 입에 가져다 대지 않았다. 접시를 긁는 무의미한 나이프질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러다 먼저 입을 연 건 할리드였다.
“…초대에 응하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보내지 말았어야지.”
녹스가 차갑게 말을 자르며 식기를 놀렸다. 할리드는 가라앉은 얼굴로 칼질을 멈추었다.
“…보좌관들을 새로 뽑았다던데.”
그 말은 정말 녹스의 보좌관들이 궁금해서 꺼낸 말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녹스의 침실에 들었다는 남자. 에스테리온 론더. 그가 궁금했고 거슬렸다. 할리드는 그 기색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애썼지만 글쎄, 그다지 효과가 있진 않았다. 녹스가 약간의 비아냥을 섞어 말했다.
“그는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
“꽤 아끼는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식기를 든 할리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힘줄이 서고 피부가 희게 변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 저러다 접시 하나 깨 먹겠군. 녹스는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식기를 아주 놓아 버렸다. 설마 질투라도 하는 건가. 웃음이 나올 거 같았다. 감히, 내 앞에서 질투를 하겠다고? 서늘함이 가슴에 가득 찬다. 아직까지도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려는 듯한 저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와 있으면 편안합니다.”
“…그렇습니까.”
“아시다시피, 제가 노예였지 않았습니까.”
녹스의 말이 할리드를 쿡 찔렀다. 할리드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녹스는 그의 얼굴을 살피며 혀를 굴렸다.
“모두가 더러운 흥미를 보일 때 유일하게 곧은 시선으로 절 쳐다보더군요.”
“…그래서, 마음에 들었습니까?”
“예.”
“침실에 들일 만큼?”
하, 녹스가 헛웃음을 쳤다. 이런 것도 숨기지 못하다니 정말 귀족으로서는 자격 박탈이로군. 이런 노골적인 언사는 줘서도 받아서도 안 된다. 우리가 긴밀한 사이라면 모를까. 우리 사이에 남은 건 폐허밖에 없잖아, 할리드.
“무례하게도 물으시는군.”
녹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리드가 실수했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따라 일어섰다.
“얼마 머무르지 않았지만 더 이상 식사를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벌써?”
“뭐, 내킨다면 더 머무를 생각도 있었는데 그 질문을 들으니 그럴 마음이 싹 사라지는군요.”
할리드는 잠시 할 말이 없다는 듯 자신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녹스는 할 말이 더 없다면 가 보겠다는 듯 식탁을 벗어났다. 할리드가 황급히 몸을 틀었다.
녹스는 성큼성큼 걸어 식당 문으로 향했다. 할리드가 다급히 녹스에게 다가왔다. 그는 손을 뻗으려다 움찔 멈추고선 녹스를 한 번 더 불렀다.
“공작.”
그 목소리에 녹스가 할리드 쪽으로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아, 내 몸에 손을 못 대는구나. 녹스는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달라진 게 없는데 고작 내 자리 하나로 이렇게. 내 위치에 따라 네가 날 취급하는 방식이 달라지는구나. 아주 오래전에 넌 날 사랑했고 나도 널 사랑했는데 그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였어.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어차피 받으나 마나 한 사과니까요.”
할리드가 내민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녹스는 그 손을 흘깃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친다는 듯이. 할리드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가 보겠습니다.”
그 말에 할리드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차마 제 손목 하나 잡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문 자국을 단 채로.
“내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가지 말아….”
그 말에 녹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할리드의 얼굴에 떠 있는 것은 애탐, 절박함, 뭐. 자신이 알 필요 없는 그런 것들. 녹스는 그에게로 반 발자국 다가갔다. 할리드의 어깨가 굳는 게 보였다. 녹스는 그의 몸에 제 몸을 가볍게 대었다. 넌 내게 닿아선 안 되지만 난 네게 닿을 수 있다. 역겹다 해도. 난 되고 넌 안 돼. 그리 생각하며 녹스가 속삭였다.
“일주일 뒤, 이 시간에 황궁으로 오십시오.”
“…황궁으로?”
“예. 제게 정녕 사과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그러면 언젠간….”
당신과 좀 더 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 일이지. 탁, 녹스는 그 말만을 남긴 채 식당을 벗어났다. 그 말을 듣고 멀거니 선 할리드만이 그 안에 남았다.
할리드는 녹스의 속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원한다면. 명령한다면 자신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관계를 망친 건 전부 자신이다. 내 손으로 망친 관계다. 자신은 어떤 식으로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망친 관계라 해도 놓고 싶지 않았다. 할리드는 잠시 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꾹 문 입술에선 피 맛이 났다.
“이렇게 가도 되는 겁니까?”
마차에 올라탄 녹스에게 보좌관이 물었다. 녹스는 제 보좌관을 싸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입 열라고 한 적 없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아, 그리고 일주일 뒤, 황궁에 방문하겠다는 서신을 보내 놓으렴.”
“알겠습니다.”
한쪽엔 먹이를 주고 한쪽엔 불을 지르고. 녹스는 꽤 불쾌한 표정으로 마차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생각한 방법이 너무나 원초적이고 단순한 방법이라. 하지만 그만큼 넘어오리라 자신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하기 싫은 일만 늘어가는군.”
“예?”
“아무것도.”
마차는 고요히 라이네리오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녹스의 보좌관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명령한 대로 황궁에 방문 요청서를 보냈고 그 소식은 곧바로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황제는 녹스의 요청서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 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를 보러 오겠다 할 리가 없었다. 저번, 사촌을 그의 편으로 돌려보낼 때 얼굴을 비쳐 달라 부탁하긴 했지만, 결코 그 이유는 아니리라.
일주일, 황제에겐 빠듯한 시간이나 그는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녹스의 필체도 아닌 요청서를 바라보다 그것을 품 안에 넣었다. 그가 직접 쓴 것도 아닌데. 그 이후 처음으로 제 손에 들어온 그의 흔적이었기 때문이다.
* * *
녹스가 황궁에 방문한 것은 정확히 일주일 뒤, 할리드의 저택을 방문했던 그 시간이었다. 녹스는 방문을 허하는 답장을 바닥에 내버렸다. 집사가 할 일은 녹스가 바닥에 버린 초대장 따위를 부지런히 줍는 것이었다. 하지만 허가서를 내팽개친 것과는 별개로 그는 약속대로 황궁을 방문했다.
그는 마차에서 내리며 황제의 궁전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어서 오십시오. 라이네리오 공작 각하.”
황제의 시종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녹스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안내를 따라 황제의 응접실로 가는 길은 녹스로서 썩 탐탁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러 간다. 녹스는 미간을 찡그리는 대신 짧게 심호흡을 했다.
시종이 응접실 문을 열자 상석이 아닌 그 아래 소파에 앉아 있는 황제가 보였다. 대단한 대접이었지만 녹스는 무감각한 얼굴로 문 앞에 섰다. 명령받은 것이 있는지 황제의 응접실엔 늘 황제의 곁에서 대기하고 있는 하인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까지 안내한 시종도 곧 문을 닫고 나갔다. 녹스는 고요한 방 안에서 잠시 침묵하다 느릿하게 인사를 올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잘 지냈나?”
“거기까지 신경 써 주실 줄 몰랐습니다. 답하자면 그다지 별로 잘 지내진 못 했습니다.”
녹스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황제도 할리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일단 앉아.”
“그러지요.”
녹스는 황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가볍게 다리를 꼬고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눈이 곧장 마주쳐 왔다.
그는 녹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몸에 잘 맞는 정장. 바르게 펴진 허리와 어깨. 녹스는 그가 잠시 노예였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완벽한 귀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황제는 짧게 침음을 흘렸다. 그런 그에게서 잠시나마 모든 것을 앗아 간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아니, 지금도 그가 누려야 했던 것들을 갉아 먹고 있었다. 황제와 비아 공작의 노리개로 있었다는 소문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폐하를 뵙고자 한 이유는….”
“곧장 본론인가?”
“저희 사이에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눌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도 그렇지.”
황제는 순순히 인정했다. 녹스는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고선 말했다.
“다이아몬드 광산의 지분 일부를 받고 싶습니다.”
“뭐라고?”
황제의 당황한 음성에도 녹스는 스스럼 없이 다시 한번 그 말을 입에 올렸다.
“다이아몬드 광산의 지분 일부를 받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는가?”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녹스가 설핏 웃었다. 비웃음과 비슷한 모양새였다.
“가능하지요.”
녹스가 자조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황제가 총애하는 정부인데 그 정도도 못 받아서야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