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그 말에 집사가 잠시 멍청하게 안젤라를 바라보았다. 안젤라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얼굴이다. 집사는 어쩐지 지끈거리는 듯한 머리를 짚으며 다른 식으로 물었다.
“무슨 대화를 했지?”
“음, 저 말고 두 명이 더 왔는데 둘 다 나가고 저만 남으라고 하셨어요.”
“그래? 이유가 뭐지?”
“모르겠는데요?”
안젤라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을 뿐이다. 다만 이번엔 아까와 반대쪽이다. 집사는 이 하녀가 멍청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다른 두 명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
“…앞으로 대화 내용은 다 보고하도록 해.”
“왜요?”
안젤라가 되묻자 집사는 미간을 크게 찡그렸다. 이런 경우 그냥 ‘네’라고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집사와 사용인의 관계가 원래 그러할 뿐만 아니라, 어차피 이 집안 사용인들은 전부 녹스 라이네리오라는 인물을 관찰하고 감시하기 위해 배치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걸 내가 설명해야 하나?”
집사가 날카롭게 묻자 하녀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래, 그럼 이만 가 보도록.”
안젤라는 소중한 휴식 시간을 집사와의 대화에 다 쓰고 다시 녹스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녹스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녹스의 책상으로 스르륵 다가가 책상 위에 두 손을 얹어 놓고 대충 허리를 숙인 뒤, 손등 위에 턱을 올린 채 말했다.
“집사가 다 보고하라는데요?”
서류를 보던 녹스가 물었다.
“그래서, 넌 어쩔 건데.”
“아이, 집사 쪽은 재미없잖아요.”
하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정보 길드 쪽 인물이라 그런지 성격을 종잡을 수 없었다. 녹스는 알아서 하라는 듯 말했다.
“그쪽에 나에 대해 보고해도 상관없어. 다만 집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사용인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서 내게 보고해.”
“알겠습니다.”
안젤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곱게 인사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 바르게 섰다. 가만히 서 있으니 잘 만든 비스크 인형 같았다. 녹스는 서류를 마저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락, 사라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집무실에 가득 찼다.
* * *
할리드는 날이 갈수록 쌓여 가는 집사의 한 줄짜리 보고서를 한꺼번에 불태우며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탁, 타닥. 날씨는 따뜻해졌지만 커다란 저택엔 언제나 벽난로가 타오르고 있었다. 할리드는 피곤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머릿속에 자꾸만 펠티온과 녹스의 입맞춤이 떠나가질 않았다.
분노가 일었다가도 녹스의 얼굴을 떠올리면 차갑게 가라앉았다. 처음부터 내가 욕심내지 말아야 했던 사람이었다. 추락했다고 제 품에 영원히 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를 억지로 추락시킨 게 자신이었다.
그 사실이 그의 정신을 좀먹어 갔다. 타닥, 탁. 할리드는 가만히 벽난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면 마치 그것이 제 속인 것만 같았다. 위장이 뜨겁도록 타오르는데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가슴 한구석에 까만 재가 쌓여 문드러질 뿐. 할리드는 홀로 난로 앞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연초가 손에 잡혔다.
할리드는 천천히 연초를 입에 물었다. 연초와 함께 있던 성냥을 죽, 긋자 성냥 끝이 타들어 갔다. 불을 대어 스읍, 숨을 빨아들이니 연초에 불이 붙었다. 할리드는 연기를 삼켰다 뱉으며 뿌옇게 흩어지는 것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러다 주홍색으로 타오르는 불길에 눈이 간 것은 우연이었다. 할리드는 입에 문 것을 왼손으로 옮겼다. 그리고 홀린 듯 오른쪽 팔의 소매를 걷었다. 여기저기 굴러 옅은 흉터들이 남아 있는 팔이 보였다. 할리드는, 녹스의 팔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잘 알았다.
“…큽.”
치이익,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할리드는 왼손에 들고 있던 연초를 자신의 팔 안쪽 살에 비벼 껐다. 그러자 피부가 금세 붉게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곧 부풀어 올랐다. 그는 그 짧고 아찔한 고통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뜨겁게 올라오는 고통에 인상을 썼다. 할리드는 떠올렸다. 녹스가 이것을 숨이라고 불렀음을. 이럴 때마다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고 나지막이 읊조리던 모습까지도.
하지만 할리드에겐 그저 고통만 느껴질 뿐이었다. 무엇이 네 숨이었는지 모르겠다. 네가 왜 이런 고통에 살아 있음을 느꼈는지도… 나는 모르겠다. 할리드는 비벼끈 연초를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치이익, 탁!
다시 한번 연초 끝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아까처럼 몇 모금을 빨고 연기가 제 눈앞에 너울거릴 때 붉게 달아오른 상처 옆에 다시 한번 연초를 지졌다. 살이 타는 냄새, 날카롭게 올라오는 고통. 할리드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는 그런 자신이 밉고 싫었다. 널 내 품에 안을 생각만 했지, 한 번도 널 이해해 보려 한 적 없었다. 만약 내가 널 이해하려고 했었다면 무언가 조금 달라졌을까. 어쩌면 아주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여기까지 와서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머저리였다. 그저 펠티온과 입 맞추는 모습에 질투심을 느낄 뿐이었다. 추악하게도.
“처음부터,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황제가 장난스럽게 녹스의 교육을 도와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했어야 했다. 녹스 라이네리오라는, 자신을 저버린 거짓말쟁이가 미워서 그를 사랑스러워하는 자신을 인정할 수가 없어서, 네 의지와 상관없이 황제의 손에 교육이란 이름으로 널 내맡긴 것을 이제 와 후회한다.
멍청하다. 멍청해.
할리드는 세 번째 연초를 팔뚝 안에 비벼 껐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뚝, 턱 끝으로 땀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고, 할리드는 화끈거리는 손목 안쪽을 꾹 쥐었다. 그러자 동그랗게 올라온 물집이 눌리는 고통과 열기로 인한 화끈거림이 더욱 선명해졌다.
“…녹스.”
할리드는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를 나지막이 불렀다. 네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나지만 그래도 네가 보고 싶다. 멍청하게 나를 원망하지 않았냐 물었던 네게 거짓말을 했던 것도 내가 어리석어서였고, 이제 와 네게 빌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죄였다. 전부, 자신이 우둔해서 저지른 죄.
할리드는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이를 악문 채 한참을 거기에 있었다. 이것이 숨으로 느껴질 때까지. 네 한 자락이라도 이해해 보고 싶어서. 그리고 이것으로 널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곧장 네게 용서를 빌고 싶다. 비록 늦었다 할지라도.
그때 누군가 할리드의 등 뒤로 다가왔다. 집사였다.
“새로운 기사단 인원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곧 가지.”
“알겠습니다.”
할리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서받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네가 이용할 수 있을 만한 패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게 무엇이 되든, 무슨 짓을 하든.
* * *
슬슬 바람이 따뜻해지고 햇볕이 뜨거워지는 나날이 이어지던 중, 소문 하나가 사교계를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현 황제가 즉위하고 숨죽여 살던 데미트리 안델라스 후작이 자신의 생일 연회를 연단다.
사람들은 저마다 쉬쉬하며 모른 척하려 했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따라붙었다. 바로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이 그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것.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이?”
“요즘 사교계에 얼굴을 비춘다고는 하나 여전히 보기 힘든 작자죠.”
“한번…. 보러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귀족들은 저마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 빠른 자들과 가십에 홀려 있는 자들은 일찍이 데미트리 후작에게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귀족이 그 연회에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래 봤자 노예로 떨어졌던 자의 참석이다. 고고한 척하는 자들은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양 고개를 치켜들고 다른 곳을 보려 노력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더 놀라운 소식이 그들의 귀에 들려왔다.
“할리드 비아가 데미트리 안델라스 후작의 연회에 참석한다 그랬다고요?”
“심지어 황제 폐하께서도 참석하신다 하지 않습니까.”
“역시….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 때문이겠죠?”
“세 사람의 관계가 대체 어떻게 되어 가고 있죠?”
“글쎄요. 하지만 분명 그 연회에 가면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귀족들의 까마귀 같은 눈초리가 오갔다. 그들은 슬슬 눈치를 보다 저마다 데미트리 안델라스 후작에게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데미트리 안델라스 후작은 그 꼴을 보고 픽 웃었다.
“내가 그 공작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그의 이름은 많이 바래져 있었다. 아마 원래 같았으면 많은 귀족이 귀족파의 수장이었던 그의 처지나 소식을 외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십에 미쳐 있는 귀족들은 녹스 라이네리오 라는 먹잇감을 외면하기엔 너무나 어리석고 또 미쳐 있었다.
그는 몰려드는 답신을 집사에게 정리하라고 명령하곤 창밖을 보았다.
“일이 재미있어지겠어.”
그리고 이전에 그가 말한 대로 녹스 라이네리오가 정말 다이아몬드 광산의 지분을 얻었는지도 궁금했다.
녹스 라이네리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사교계에 그리고 정치계에 함부로 발을 얹었을 것 같진 않았다. 즉, 그에겐 이번이 새로운 데뷔 무대라는 말이었다.
“바라는 대로 제대로 판은 깔아 줄 테니….”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안델라스 후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수염을 한 번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