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23화 (123/158)

제123화

한편, 녹스는 오늘도 여전히 각 영지에서 올라온 서류들을 보며 오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똑똑- 소리와 함께 그의 보좌관인 에스테리온 론더가 문을 열고 한 단의 서류들을 더 들고 들어왔다. 녹스는 한숨을 쉬는 대신 놓고 가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론더는 그 서류들을 책상 위에 올려 둔 뒤 물었다.

“식사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공작님.”

“생각 없다고 전해.”

“……식사는 챙기셔야 합니다.”

“내가 자주 굶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매번 집무실에서 대충 챙겨 드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녹스는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을 올려 론더를 바라보았다.

“보좌관이 내 식사나 챙기는 직업이던가?”

“아닙니까?”

“……아예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데.”

“식사, 하십시오.”

“생각 없다고….”

“예전 몸을 되찾으시려면 잘 드셔야죠.”

그 말에 녹스의 손이 멈칫했다. 확실히 예전보다 몸이 나빠졌으니 어서 회복을 하기는 해야 한다. 근육이 빠질 때는 쉬웠는데 다시 채우려니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녹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준비하라고 해. 내려갈 테니.”

“예.”

론더가 집무실을 나가 하인에게 점심을 준비해 달라고 말했고 하인들은 간만에 식당에 내려와, 식사를 하겠다는 녹스를 위해 서둘러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녹스는 론더와 함께 서류를 정리하고서 느릿느릿 식당으로 향했다.

“온 김에 같이 식사하고 가.”

“제가 말입니까?”

“그럼, 정부를 끼고 식사를 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던가.”

“…그렇군요.”

“나는 지금 정부의 채근에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하러 내려가는 거란 말이지.”

론더가 그 말에 인상을 썼다. 녹스가 짧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인상 펴, 어떤 공작의 정부가 그렇게 인상을 쓰고 다니나.”

둘은 나란히 걸어 식당에 도착했다. 사용인들은 론더와 함께 나타난 녹스를 보고 부지런히 두 명분의 식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각자의 자리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은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일은 잘하고 있나?”

“저라고 마냥 놀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녹스가 미소 지었다. 이제 에스테리온 론더가 녹스 라이네리오의 정부라는 것이 사실로 땅땅 못 박아졌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으니까.

정부라고 마냥 노는 줄 아냐는 듯한 뉘앙스의 대답에 녹스는 능글맞게 대답했다.

“그냥 놀아도 된대도. 물론 내 침대 위에서만 놀게 되겠지만.”

“……저도 할 일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 말에 녹스가 웃는 채로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노리개라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망가지기 쉬우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그냥 두는 거야.”

“감사합니다.”

“성실하기는.”

“…….”

론더가 적응이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녹스는 그런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나오기 시작한 음식을 쳐다보았다. 하녀들이 조심스럽게 음식을 앞에 내려놓았다. 녹스는 흰 수프를 내려다보다 천천히 한 스푼 떠 입으로 가져갔다. 묘하게 달짝지근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녹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입에 안 맞으십니까?”

“응.”

녹스의 단호한 말에 사용인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녹스가 옆으로 수프를 밀어 버리자 하녀 하나가 허둥지둥 수프를 치웠다. 녹스는 스푼을 내려놓고 다리를 꼰 채 론더를 바라보았다.

“넌 마저 먹어.”

“……주방장에게 언질을 해 놓겠습니다.”

“그래야겠군. 난 음식에서 단맛이 나는 걸 싫어해.”

“잘 들었겠지.”

“예…!”

녹스는 입맛이 떨어져 음식에 집중하는 대신 론더와의 대화에 신경을 쏟기로 했다. 한편 수프를 한 숟갈 떠먹은 론더는 이상한 게 없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녹스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괸 채 말했다.

“다 나가. 필요하면 부를 테니.”

기분이 상한 공작님이 정부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 사용인들은 고개를 숙이고는 우르르 빠져나가며 문을 닫았다. 탁, 소리가 나자마자 녹스가 론더에게 물었다.

“정보상에서는?”

“비아 공작가의 외부 움직임이 확실히 보인다더군요.”

“어떤 식으로?”

“일단 기사단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고 합니다.”

“기사단의 수를 늘리려 하나?”

“네, 그렇습니다.”

녹스는 빤하다는 듯 웃었다.

“예상대로 움직여 주니 좋은데?”

“그렇습니까?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요.”

“글쎄.”

녹스는 정확히 이야기해 주지 않고 말끝을 늘였다. 론더는 자신이 더 간섭할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고 수프를 전부 비웠다. 녹스가 말했다.

“넌 네 주제를 알아서 좋아.”

“칭찬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도 좋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오해합니다.”

“오해해도 좋아.”

론더가 뚝 입을 다물었다. 대신 수프 그릇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천천히 녹스의 눈으로 향했다. 녹스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녹안이 마치 자신을 찌르는 듯해서 론더는 저도 모르게 다시 시선을 내렸다. 녹스가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다 이내 싱긋 웃었다.

“이리 와.”

론더가 자리에서 일어나 녹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녹스는 그의 목 리본을 확 풀어 던지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참아.”

“예.”

론더는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녹스가 자신의 앞에 놓인 목덜미를 바라보다 셔츠를 걷어 냈다. 단단한 승모근이 긴장한 듯 올라와 있는 게 보였다. 녹스는 입을 가볍게 벌리고 그 위를 물었다. 잘근, 잇자국을 남기는 그 감각에 론더가 움찔 떨었다.

하지만 녹스는 그에 멈추지 않고 피부 위를 빨았다. 붉은 울혈이 그의 목덜미에 피어났다. 녹스는 그 짓거리를 서너 번 반복했다. 론더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녹스는 그의 반응에 약간의 장난기가 발동해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고 귓가에 바람을 훅 불었다.

“……!”

“하하.”

론더가 몸을 뒤로 확 물리며 귀를 감쌌다. 녹스가 짧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론더는 확연히 붉어진 귀를 문지르면서도 말씨만큼은 덤덤하게 말했다.

“…놀랐습니다.”

“넌 얼굴에 티가 참 안 나.”

“장점이기도 하죠.”

“그런데….”

녹스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론더는 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살짝 뒤로 뺐다.

“…말씀, 하지 마십시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렇게 해.”

론더가 빠른 걸음으로 잠시 식당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론더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젠장, 왜….”

그는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렸다. 붉어진 귀는 돌아올 생각을 안 했고 부푼 앞섶은 잘 들어맞는 바지 덕에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잠시 그 자리에서 마른세수를 한 번 했다. 밖에서 기다리던 사용인들이 아닌 척 흘끔흘끔 론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사용인들 사이에 한 가지 소문이 돌았다. 라이네리오 공작의 정부가 식당에서 공작에게 희롱당했노라고.

“오늘 식사가 불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마쳤을 때쯤 집사가 식당으로 들어와 말했다.

“잘 아는군.”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고개 숙여 사죄하는 집사의 모습에 녹스가 단호히 대답했다.

“주방장을 잘라.”

“예?”

“못 들었어? 자르라고.”

“하….”

“설마 하지만, 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래.”

그는 하루빨리 이곳에서 그들의 손길이 닿은 사용인들을 전부 치워 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새로 들어올 사용인들도 전부 그들의 입김이 닿아 있는 놈들이겠지만. 녹스는 집무실로 돌아가며 짜증스럽게 크라바트를 고쳐 맸다.

“뻔뻔하기도 하지….”

그의 중얼거림에 곁을 따르던 집사가 움찔거렸다. 녹스는 그의 반응을 모르는 척하며 집무실로 돌아갔다.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보좌관들에게서 올라온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한 녹스는 불쾌한 기분을 잊기 위해 펜을 멈추지 않았다.

한 시간, 두 시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오늘 치 분량의 서류를 모두 보았다. 녹스는 흘긋 시계를 확인한 후 하인에게 명령했다.

“목욕을 준비해.”

데미트리 안델라스 후작 저택에서 있는 연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하인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녹스가 아직 오늘 연회에 입고 갈 옷조차 골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분주하게 드레스 룸에서 여러 가지의 연회복을 꺼내 오기 시작했다.

녹스가 목욕하는 동안 옷과 구두 그리고 액세서리까지 모두 준비를 마친 하인들이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평소처럼 혼자 목욕을 마친 그가 나왔을 때 자연스럽게 마른 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연회복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마음에 드시는 걸로 고르시면 곧바로 준비를 마치겠습니다.”

“론더는?”

“예?”

“앞으로 옷을 고를 땐 론더를 불러와.”

“알겠습니다.”

“그 애가 골라 주는 옷이 아니면 입지 않을 거야.”

하인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정부를 많이 아끼시는 모양이야. 그 눈짓을 눈치채지 못할 녹스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을 잠시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다 놓인 옷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짙은 와인 색과 감청색 그리고 암녹색과 어두운 회색 등 여러 벌의 옷이 놓여 있었다. 녹스는 생각했다. 저것도 어차피 전부 할리드와 황제가 채워놓은 옷들이겠지.

그들이 자신을 생각하면서 골랐을 역겨운 옷들. 녹스는 샤워 가운을 입은 채로 소파에 앉아 론더가 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십 분쯤 기다렸을까.

식사 후 잠시 얼굴을 감췄던 론더가 애매한 표정을 지은 채 방에 들어왔다.

“옷을 골라 달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그러자 론더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여기서 정확히 말하고 넘어가는데.”

“뭔데.”

“전 똑같이 생긴 옷을 여러 벌 사 두고 돌려 입는 사람입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