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그래 보여.”
녹스의 덤덤한 어투에 론더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도 제가 골라 주는 옷을 입으시겠다고요?”
“네가 고르는 걸 입고 싶어. 그것뿐이야.”
론더가 자신을 위해 고른다면 그들이 골랐다는 사실이 조금 희석되겠지. 하지만 녹스는 그런 자세한 일까지는 말하지 않고 론더를 바라보며 옷들을 턱짓했다. 론더는 천천히 걸어와 하인들이 들고 있는 옷들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아까 자신이 한 말 그대로 옷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론더는 정말 단순히 색만 보고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와인 색은 너무 튀지, 회색은 너무 칙칙하고. 암녹색은 머리카락 색과 같으니 안되고. 그래서 고른 것이.
“이 감청색 옷이 가장 나은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걸로 가져와.”
“예.”
“그럼 전 이걸로….”
“다음, 구두를 골라.”
“…….”
론더는 처음으로 아침마다 남편이 입을 옷을 고르는 여자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옷은 그 사람의 첫인상을 결정한다.
그런 중요한 것을 자신에게 맡기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데 그 와중에 구두까지 고르란다. 론더는 처음으로 정부의 일이 조금 힘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잘못 고르면 공작님이 욕을 먹는다. 그는 심사숙고하며 구두를 고르기 시작했다.
“제법 진지하군.”
“누가 입고 갈 옷인데요.”
녹스가 소파에 기대앉아 발끝을 까딱였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구두를 바라보고 있는 론더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남자의 눈썹은 짙었으며, 인상을 쓰느라 조금 구부러져 있었다. 녹스는 그 모습을 보며 하인들을 향해 손짓했다.
“액세서리는 뭐가 있지. 내 론더가 이런 걸 고르는데 재주가 없는 듯하니 액세서리는 내가 봐야겠군.”
“다이아몬드로 된 커프스와 핀, 그리고 은으로 만든 볼로 타이와….”
“허.”
볼로 타이, 지긋지긋하게 목에 걸고 있던 그것. 물론 노예일 적 쓰던 것과는 그 용도도, 모양도, 붙어 있는 보석도 모두 달랐지만 녹스에겐 그것이 끔찍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녹스가 차갑게 웃으며 하인을 바라보았다.
“방금 무어라 했지?”
액세서리를 소개하던 하인은 잠시 얼굴을 굳혔다. 녹스는 설핏 웃으며 볼로 타이를 집어 들었다. 속눈썹을 내리깔고 조용히 볼로 타이를 내려다보던 녹스는 곧 하인과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빠악!
그리고 그것을 곧장 하인의 얼굴로 집어 던졌다. 하인의 이마에 부딪힌 볼로 타이는 그의 이마를 찢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옅은 상처에서 피가 비쳤다. 하인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데?”
하인을 내려다보는 녹스는 창문을 등지고 있었고 창문에서부터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그의 얼굴 위로 음영이 드리웠다. 오로지 녹스의 녹빛 눈만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인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노예이실 때 달았던 볼로 타이가 생각나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라는 말은 입이 찢어져도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했다간 실제로 입이 찢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었다. 머리를 굴리던 하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액세서리를 잘못 골라 와서….”
“왜 잘못 골라왔는데?”
“제가, 생각이 부족했습니다.”
“공작을 모셔야 하는 자가 생각이 부족했다라….”
녹스는 슬며시 웃으며 하인의 허벅지를 짓밟았다. 그리고 꾹 눌렀다. 하인은 둔한 통증을 느끼며 바들바들 떨었다.
고개를 푹 숙인 하인은 자신의 뒤통수에 공작님의 차가운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녹스는 손을 내밀었다. 하인 하나가 내던졌던 볼로 타이를 서둘러 주워 녹스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 자리가 생각이 부족해도 되는 자리인 줄 알았나 보지?”
녹스는 볼로 타이를 길게 늘어뜨려 하인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 단번에.
“큭!”
힘을 줘 당겼다. 무릎을 눌린 하인은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 자세로 볼로 타이에 목이 걸려 컥컥거렸다. 그 행동에 하인들이 저마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눈을 깔았다.
“왜 다들 자꾸 나를 실망시킬까….”
식사 시간부터 말이야.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사용인들은 녹스의 심기가 너무나 불편하다는 사실에 안절부절못했다. 항상 사용인들에게 관심이 없던 주인님이라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사실, 자신들이 진실로 모시는 주인님도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공작이나 황제의 사주를 받고 들어와 그를 모시는 자들이었으니까.
녹스는 볼로 타이를 더욱더 높게 들어 올리며 하인의 목을 졸랐다. 하인은 밀려오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목으로 파고드는 볼로 타이의 끈을 긁었고 녹스는 그 하인의 무릎을 더욱 세게 밟았다.
“기회가 여러 번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볼로 타이의 끈을 쥔 녹스가 점점 더 손을 위로 올렸다. 하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두 눈엔 핏발이 섰고, 관자놀이 위로는 핏줄이 부풀어 올랐다.
그는 끅, 끅 소리를 내며 목을 깊게 긁어 댔다. 그의 무릎을 걷어 내고 일어설 수도 없었다. 제멋대로 일어서면 자신의 목숨을 보장하지 못할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다 툭.
“커헉, 헉!”
“아니면 내가 만만한 걸까?”
결국 볼로 타이의 끈이 끊어졌다. 하인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며 거칠게 기침을 해 댔다. 녹스는 그 모습을 보며 끊긴 볼로 타이를 바닥에 내던졌다.
주인에게 거슬리는 것은 내보이지 말 것. 눈앞에서 치울 것. 그 간단한 것들도 하지 못하는 것들을 붙여 놓다니. 아니면 일부러 내 신경을 긁는 건가.
“잘라.”
“…예.”
“손을.”
“…예?”
하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녹스는 설렁설렁 서서 그들을 돌아보았다.
“물건을 잘못 들고 온 대가는 치러야지.”
“자, 잘못했습니다. 공작님! 제발!”
“잘못했다며.”
녹스가 그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제발, 제발 선처를….”
목에 새빨간 끈 자국이 남은 하인이 바닥에 이마를 대고 빌기 시작했다. 녹스는 고개를 좌로 조금 기울이고 그를 내리깔아 보았다.
왜 하나도 불쌍하지가 않을까. 왜 하나도 동정이 가지 않을까. 아, 그들의 사람이기 때문이구나. 녹스는 시선을 한 번 옆으로 굴리고 말했다.
“잘라.”
“공작님.”
그때 론더가 녹스를 불러왔다.
“왜….”
녹스가 고개를 돌리고 매끈한 미소를 입에 올렸다.
“내 론더. 무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연회 전에, 피를 묻히시면 안 됩니다.”
녹스가 론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론더는 입술을 달싹였다. 녹스의 눈은 론더를 볼 때만큼은 다정했고, 따뜻해 보였다. 그는 자신이 어디까지 나설 수 있는지 재기 시작했다.
자신은 그의 정부 노릇을 하고 있었고 지금은 남들 앞에 서 있기에 더더욱 완벽한 정부를 연기해야 했다. 그것도 아주 총애 받는 정부 말이다. 론더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뒤에서부터 가운을 입은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제가 피를 보기 무섭습니다.”
“흐음….”
녹스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 아직도 머리를 조아리며 빌고 있는 하인을 향해 차갑게 시선을 내렸다. 실내 슬리퍼를 신은 그의 발끝이 하인의 머리를 툭 찼다.
“그럼 어쩔 수 없네.”
“…….”
“그냥 내쫓아. 추천장 따윈 써 주지 말고.”
“아, 알겠습니다….”
녹스가 어서 눈앞에서 하인을 치우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다른 하인들이 빠르게 그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녹스는 그가 가져온 액세서리 중 다이아몬드로 된 핀과 커프스를 골랐다. 론더도 그 사이 어떻게든 선택을 마쳤는지 검은 구두를 가지고 오며 말했다.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네가 무섭다니 어쩌겠니.”
지독하리만치 무표정했던 녹스가 론더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론더는 다시 한번 자신이 특별해진 것 같은 감각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녹스는 그런 그의 생각을 정정해 주지 않고 하인들의 수발을 받아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삭스와 삭스 가터 그리고 반질반질한 재질의 셔츠를 걸치고 셔츠 가터까지 입고 난 뒤, 감청색 연회복을 입고 다이아몬드로 된 커프스를 채웠다. 곧이어 핀을 채우려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젓고 그것을 내려놓았다.
“이건 됐군.”
“타이는….”
“필요 없어.”
녹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목을 조이는 모든 것들이 싫었다. 그렇기에 윗단추마저 두어 개 풀었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장갑까지 끼어 바깥에 드러나는 살갗이 없게 하던 예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살짝 검은 눈 밑. 조금 말랐어도 기본적인 뼈대가 커 딱 벌어진 어깨와 조금 더 좁아진 허리. 까탈스럽다기보단 퇴폐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는 모든 준비가 끝나자 소파에 앉아 론더에게 발끝을 까딱였다.
눈치가 빠른 론더는 곧바로 그의 앞에 무릎 한쪽을 꿇고 앉아 허벅지 위에 그의 발을 올리고 구두를 신기기 시작했다.
녹스는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손에 턱을 괸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론더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에게 구두를 신겼다. 조심스럽게 발목을 잡아 구두를 신기고 끈을 단단히 맸다.
그렇게 신발을 모두 신긴 론더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 했으니 칭찬해달라는 것처럼. 그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 수 있으나 녹스에게는 그런 것으로 보였다. 녹스는 손을 뻗어 론더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집으며 말했다.
“이리 와.”
이리 와, 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론더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녹스의 다리를 가만히 바닥에 내려놓고 소파로 올라 그의 위를 차지했다. 모든 하인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바닥에 깔았다.
“론더, 내가 해 줬던 거.”
“……예.”
그는 허리를 숙였고 드러나 있는 녹스의 목울대 아래에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