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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25화 (125/158)

제125화

녹스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더 세게 하라는 듯 머리를 잠시 눌렀다. 론더가 입술을 벌리고 그 위를 강하게 물었다.

흐, 작은 숨소리가 새어 나오자 론더는 그 숨소리에 귓가가 다시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자신이 문 곳을 핥다가 이내 희고 얇은 피부를 빨았다. 그리고 울대를 따라 올라가 턱 아래에 입술을 붙이니 자연스레 녹스가 턱을 들었다. 턱 아래, 고개를 들면 얼핏 비칠 그곳에 붉은 울혈을 남겼다.

론더의 입술은 자그맣게 떨면서도 곧 목 옆선으로 옮겨 가 그곳에도 자신의 자국을 남겼다. 론더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정의 내리지 못했다. 남들 눈앞에서 나쁜 짓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떤 의식을 치르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렇게 서너 개의 자국을 남기고 쪽 소리가 나도록 피부를 빨다 떨어진 론더의 입술은 타액으로 가볍게 번들거렸다. 녹스는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어 주었다.

“오늘은 얌전히 집에서 기다리고 있자.”

“……예.”

“가면 위험한 사람들이 꽤 있어서 말이야. 알겠지?”

론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는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린아이들의 장난처럼. 입술과 입술만 붙였다 떼며 간지러운 애정 표현을 보였다.

론더는 되레 이것이 더욱 부끄러운 짓처럼 느껴졌다. 론더가 조심스럽게 물러나 그의 옆에 섰다. 녹스는 소파에서 일어나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하인들이 검은 장갑을 가지고 왔다. 녹스는 그 장갑을 손에 끼고 말했다.

“마차는?”

“주, 준비되어 있습니다.”

“가지.”

녹스가 그렇게 말하며 먼저 방을 나섰고, 론더는 그 자리 그대로 녹스의 방에 멍청히 서 있었다. 사용인들이 그를 흘끔거리며 지나가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론더는 아무도 남지 않은 방 안에서 자신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진 것들을 하나하나 세고 있었다. 목울대와 턱 아래 그리고 목선과…. 그렇게 한참을 자신의 입술에 닿았던 감촉을 되감고 되감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전부 연기일 뿐이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주제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고 그 방을 벗어났다.

녹스는 1층으로 내려가 준비되어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공작이라는 작위에 알맞게 크고 화려했으며 라이네리오 가문의 인장이 커다랗게 찍혀 있었다. 어느 누가 봐도 이 마차에 탄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녹스는 다리를 꼬고 앉아 바깥을 바라보았다.

공작저에서 후작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것 같아 잠시 눈을 감았다. 파티에 가면 아마 사람들은 제게 다가오기보단 주변에서 쑥덕거릴 것이고 오로지 황제와 할리드만이 제게 다가오겠지.

하지만 녹스는 사람들의 구경거리와 놀잇감이 되고자 가는 것이 아니었다. 녹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검게 물든 암녹빛 눈동자밖에 남지 않았다.

반짝이는 샹들리에와 푸른 빛이 도는 잔들, 붉은색 천으로 장식된 후작 저택은 아주 오래간만에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귀족들은 저마다 모여 오늘 참석할 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기 단연 화두에 오르는 자들은 정해져 있었다. 녹스 라이네리오와 할리드 비아 공작, 그리고 황제 폐하. 그들은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황도를 휩쓸었던 스캔들을 입에 담았다.

“두 분께서 어찌 나오실지….”

“그러게요, 라이네리오 공작이 정부를 들였다는 소식이 파다하지 않습니까.”

“공작이 복권되면서 인연이 다 끊긴 걸까요?”

“그럴 리가요. 얼마 전에도 라이네리오 공작이 황궁에 들렀다지 않았습니까.”

“그저 일 적으로 들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러자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제 폐하와 비아 공작만 미련이 남은 거 아닙니까?”

그 말에 모든 사람이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이 쏠리자 당황한 듯 잠시 목 뒤를 주물럭거리더니 주변을 살피고는 가만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냥, 떠오른 이야깁니다.”

“설마요….”

“그분들이 뭐가 아쉬워서.”

그러자 짓궂은 작자들이 혀를 놀렸다.

“그 몸이 대단했나 보지요.”

“이런.”

귀부인들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묘하게 웃었다. 아직 황제에게는 짝이 없다. 할리드 비아도 마찬가지이고. 나이가 많은 귀부인들이 그 자리에 자신의 딸을 밀어 넣기 위해 안달이 나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나란히 남자 노예, 아니. 이젠 공작이 된 라이네리오에게 푹 빠져 있다니. 그다지 인정하고 싶은 사실은 아니었다.

데미트리 안델라스 후작은 지금 흐르고 있는 분위기를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녹스 라이네리오의 평판은 역시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샴페인을 입가로 가져간 순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입구로 쏠렸다. 데미트리 안델라스 후작은 지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주인공들 중 한 명이 도착했음을 눈치챘다.

오늘 이 자리는 자신의 생일 연회이기 때문에 그에겐 손님을 맞이할 의무가 있었다. 그가 시선을 돌리자 사람들 사이로 감청색 연회복이 보였다. 그리고 미약하게 녹빛이 도는 머리카락도.

데미트리 안델라스 후작은 느긋하게 걸어 녹스 라이네리오 앞에 섰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녹빛 눈을 어둡게 빛내며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건가?’

안델라스 후작이 그렇게 생각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연회에 참석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라이네리오 공작 전하.”

안델라스 후작은 가벼운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올리다 그의 풀어진 셔츠를 보았다. 단정치 못하게 무슨. 하지만 곧 그게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그건 그 주변에 있는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셔츠 안쪽, 흰 피부 위로 붉은 울혈들이 여러 개 남아 있었으니.

“어머….”

누군가의 탄성에 녹스는 입꼬리 끝을 올려 웃었다.

“내 일이 있어서 좀 늦었어.”

귀족들이 쑥덕거렸다. 그럼에도 녹스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는 얼굴로 후작을 주시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안델라스 후작은 생각이 없는 작자는 아니었는지 녹스의 그런 태도에도 낮춘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그래, 그에게 동아줄을 내려 줄 사람. 바로 녹스 라이네리오, 자신이었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안델라스의 극진한 태도에 귀족들이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녹스는 안델라스 후작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안델라스는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후 속삭이듯 물었다.

“다이아몬드 광산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 그거.”

녹스가 불쾌한 듯 웃었다. 그 얼굴에 안델라스 후작은 그가 실패한 줄로만 알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녹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반대였다.

“30퍼센트.”

“…30퍼센트나 말입니까?”

“글쎄, 조금 더 아양을 떨면 더 떨어질 것 같기도 하고.”

별로 그러고 싶진 않지만. 녹스의 불쾌한 미소에 안델라스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녹스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지나가던 하인에게서 샴페인을 한 잔 받아 들고는 반투명하게 빛나는 술을 주욱 들이켰다.

붉은 울혈 자국이 다 드러나게 셔츠를 풀어헤친 채 샴페인을 한 번에 들이켜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가문에서 내다 놓은 한량 같았다. 귀족 몇몇이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누군가는 혀를 차며 부채를 흔들었고 누군가는 그에게 접근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키웠다. 녹스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귀족들을 보지 않는 척 스윽 훑었다. 대부분이 쓸모없었지만 그중엔 분명, 녹스 그가 노리던 작자도 끼어 있었다.

“글렌디픽 백작을 아나?”

“음, 아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몇 번 식사를 한 적은 있습니다. 오래전 이야기지만요.”

“그대가 귀족파의 수장이었을 때?”

“그렇습니다. 그는 뛰어난 장사치입니다. 귀족들이 상업을 쉬쉬하는 것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상업에 뛰어들어 돈을 거머쥔 자죠.”

“그의 아들은 어떻지?”

“어떻긴요…. 그는 미치광이에다 망나니입니다. 다만 글렌디픽 백작이 엄청나게 싸고돌고 있죠.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그러는 건지….”

“모르는군.”

“예?”

“됐어.”

녹스는 빈 샴페인 잔을 지나가는 하인의 쟁반에 올려 두었다. 그때 사람들이 녹스가 입장했을 때처럼 한 곳을 쳐다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만 그가 들어섰을 때보다 웅성거림이 컸다. 그렇다는 건…. 녹스는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기어코 오셨군요.”

“할리드 비아 공작도 말이에요.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에게 정말 푹 빠진 걸까요?”

황제의 갈색 머리와 할리드의 잿빛 금발이 보였다. 녹스는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의 입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녹스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어깨를 돌려 그들에게 비스듬하게 섰다.

그가 마치 돌아설 듯 보이자 두 사람의 발걸음이 알게 모르게 빨라졌다.

“라이네리오 공작.”

황제가 먼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할리드는 한 발짝 물러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녹스는 돌리려던 몸을 멈추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눈동자가 자신을 끈질기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황제 폐하.”

“잠시, 이야기하고 싶어서.”

“무슨 이야기일까요. 전 폐하와 대화할 거리가 없는데.”

녹스가 고저 없이 하지만 단호하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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