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녹스의 냉랭한 목소리에 황제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싶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황제가 꺼낼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나오면 그가 꺼낼 말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으니까.
“다이아몬드 광산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다이아몬드 광산. 녹스는 설핏 미소 지었다. 황제는 지금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꽤 애처롭게 굴고 있었다. 뭐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하긴 뭐긴 뭐겠어. 본인 그 자신이지. 녹스는 냉정하게 평하며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다이아몬드 광산에 관한 이야기라면 응해 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재차 확인시켜 주듯 연회장 안에 울리는 녹스의 목소리에 귀족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오가는 시선들이 마치 먹잇감 앞에 모인 포식자들 같았다.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뇨?”
“설마, 황실의 그 다이아몬드 광산을 이야기하는 건가요?”
“설마요. 그 다이아몬드 광산은 지금껏 아무도….”
녹스는 그들의 반응 하나하나를 살폈다. 그래, 지금은 너희들이 포식자인 줄 알겠지. 녹스는 그들이 마음껏 착각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녹스에게 몰렸다. 녹스는 가볍게 턱을 들고 후작에게 말했다.
“방을 좀 빌리지.”
“얼마든지.”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후작이 두 사람을 안내하기 위해 앞장섰다.
녹스는 황제와 함께 걷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할리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주욱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빛나는 파란 눈동자. 녹스는 무심한 얼굴로 그 눈빛을 마주하다 이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황제와 함께 룸으로 들어섰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푸른 눈동자는 좇을 것을 잃어 허무하다는 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할리드는 모든 게 공허하게 느껴졌다. 손목 안쪽의 화상들이 욱신거렸다. 그 화상 같은 것이 위장에도 남아 있나 보다. 속이 참을 수 없이 화끈거리는 걸 보면. 펠티온, 제 주군이자 의형제인 저 남자가 뻔뻔히 그의 옆자리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이 그를 반쯤 미치게 했다.
권력의 정점이기에 누릴 수 있는 것. 여태까지 할리드는 그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다. 바라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황제라는 자리가 녹스 라이네리오를….
할리드의 시선이 한참 만에 문에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귀찮다는 듯 주변을 가볍게 훑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이때가 기회라는 듯 그의 시선을 받고 슬금슬금 그의 근처로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오셨습니까. 비아 공작 각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딸자식들을 가진 귀족들이 그의 주위로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할리드는 그들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온 신경을 문에만 쏟았다.
끼익.
곧이어 두 사람을 안내했던 후작이 문밖으로 나왔다. 그 말인즉슨 이제 방 안엔 단둘뿐이란 이야기였다. 할리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둘이서 할 이야기가 신경 쓰였다. 그리고 정말 ‘이야기’ 만 할지. 그것 역시 의문이었다.
이는 녹스 라이네리오의 문제가 아니다. 할리드는, 황제를 믿지 못했다. 그는 녹스를 갈망하는 사내다. 할리드는 머릿속으로 두 사람이 얽힌 장면을 계속해서 그려 냈다. 집요하게, 계속.
그리고 그 모습을 모든 귀족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 사이 귀족들의 머리는 바삐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는 모르겠지만 다이아몬드 광산 이야기가 나온 걸 보면 분명 녹스 라이네리오에게 광산과 관련된 것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지분? 다이아몬드?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귀족들의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요히 때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숨을 죽인 채 그 방을 주시했다. 할리드와 다른 의미로.
한편, 방 안에 남겨진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건 녹스였다.
“그래서 광산의 지분은….”
녹스가 말을 잇자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이던 황제가 말을 조심스럽게 끊었다.
“그 광산 지분 말일세. 내가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녹스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펠티온은 마치 녹스의 오해를 사기 싫다는 듯 빠르게 뒷말을 이었다.
“지분이 아닌 채굴된 다이아몬드의 30%를 넘기겠네.”
녹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확실히, 그렇게 한다면 자신의 손에 떨어질 이익이 훨씬 커질 것이다. 다만 황제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가장 품질 높은 것들을 선별하여 주겠어.”
녹스는 황제와 천천히 눈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입술이 비틀렸다. 눈을 마주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바라시는 게 있군요.”
“…그래.”
녹스는 숨기지 않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자신에게 원하는 게 뭐가 있겠는가. 특별할 것 없이, 몸. 그래. 그 빌어먹을 몸.
녹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으나 펠티온은 자신의 말을 물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녹스는 이를 악물고는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어차피 황제와 비아 공작의 정부로 불리는 몸이다. 이미 굴려질 대로 굴려진 몸이다. 정부 노릇을 하는 대신 지분을 받기로 한 것도 맞았다.
그런데 황제가, 저를 망가뜨린 펠티온이 이리 뻔뻔히, 이미 더럽혀진 몸을 제대로 팔라며 요구할 줄은 몰랐다. 헛웃음이 나올 법한데 기가 차서 그런지 웃음은 조금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서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펠티온. 그 때문에. 도대체 당신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직접 사람을 바닥까지 끌어내렸으면서, 다시 한번 끌어내리려 하면서. 도대체 왜? 녹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무얼, 바라십니까.”
녹스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물었다. 펠티온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단 하룻밤.”
“…….”
“하룻밤이면 충분해.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
펠티온의 내려간 눈꼬리가 저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녹스는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저런 비에 젖은 개 같은 몰골이라니. 입으로는 사람을 진창에 처박고 있으면서 마치 자신이 불쌍한 사람이 된 것인 양. 녹스는 소파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나가.”
“……녹스.”
“나가라고!”
녹스가 소리쳤다. 핏줄 터진 붉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녹스는 절망스러웠고, 수치스러웠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지? 하룻밤을 팔라는, 창부에게나 할 법한 말을 이제 이름뿐이라도 공작의 이름을 달고 있는 내게. 펠티온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내 생각은 변함없을 거야.”
녹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악문 턱이 덜덜 떨렸다. 펠티온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꾹 깨문 입술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녹스가 비명처럼 지른 말을 들어주기 위해 몸을 돌렸다.
끼익, 소리가 들리고 황제가 문밖으로 나갔다. 녹스는 의자 손잡이를 부서져라 쥔 채 숨을 내뱉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비참했다. 속이 긁히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목구멍으로 손을 집어넣고 위장을 긁어내는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하하하…!”
날 대체 어디까지 떨어뜨려야 만족할 생각이지? 펠티온, 이 빌어먹을 황제! 내가 붙여 준 목숨으로 살아가는 주제에 내 모든 것을 앗아 가는 악마 같은 남자.
이를 너무나 세게 악물어 잇몸에서 피가 나는지 비릿한 피가 타액에 섞여 들었다. 녹스는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머리를 감쌌다. 다 싫다. 전부 싫다. 그냥 죽어 버리고 싶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그냥,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자신이 견뎌야 하는 모든 것들이 버거웠다. 제 몸이 빈껍데기가 되어 아무것도 담지 못했으면. 영혼이든 무엇이든 전부 조각나 부서져 버렸으면.
녹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게 번들거리는 눈이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냐, 내겐 책임질 것이 있다. 지켜야 할 것이 있고, 약속한 것도 있다. 그리고 꼭 해야 할 일이 아직 내겐 남아 있다.
녹스는 흐트러진 머리로 몇 번을 곱씹고 곱씹었다. 지금 이 감정. 이 수치심. 이 원통함을. 내가 언젠가 돌려주고 말리라. 내 발 아래서 피를 토하고 죽어 가는 꼴을 보고야 말리라.
녹스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평정을 되찾기 위해 애썼다. 몇 번의 호흡이 지나가자 겨우 자신을 억누를 수 있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검은 욕망을 내리누를 수 있었다. 당장에 제 몸을 난도질하거나 창밖으로 그대로 내던져 버리고 싶은 그 강렬한 충동을.
그리고 몇 초 후, 녹스는 차분히 표정을 정리할 수 있었다. 무너지지 말자. 그래,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엔 황제가 제 손으로 귀족파의 초석을 세우는 것도 있었다. 그래, 내가 어디까지 떨어지든 네가 있을 자리는 그 아래라는 걸 알려 줄 것이다. 반드시.
“일단, 여기 온 목적은 황제가 아니었으니까.”
녹스는 다시 한번 스스로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잠시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누군가 미끼를 물길 기다렸다. 자신이 오늘 어느 집안의 망나니처럼 하고 나온 것도, 후작의 파티에 참석한 것도, 전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니까.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틈으로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녹스도 이름만 알고 있을 뿐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문틈으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황제와 할리드 비아가 보였다. 녹스는 가만히 그들을 보다 문득 할리드와 눈이 마주쳤음을 깨달았다. 허, 녹스가 헛웃음을 쳤다. 지금 이 순간에 나와 눈이 마주친다고?
그것은 그가 계속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시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녹스가 그렇게 문틈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자 낮지만 조금은 경박한 목소리가 옆에서 튀어나왔다.
“제가 이렇게 왔는데 다른 곳만 보고 있다니. 좀 섭섭합니다.”
글렌디픽 백작가의 하나뿐인 아들. 베일런 글렌디픽. 그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