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그는 척 보기에도 자신이 망나니라고 외치는 것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명치까지 풀어 헤친 셔츠에 한 손에 들고 있는 술병, 게다가 늘어지게 묶은 붉은 긴 머리까지. 무엇하나 백작가 영식이라 보기 힘들었다. 녹스는 그를 서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네.”
“예? 저를요?”
그가 킬킬대며 웃어댔다. 그러고는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듯하더니 맞은 편에 앉는 대신 테이블에 손을 짚고 허리를 숙여 녹스를 내려다보았다. 그에게서 술 냄새가 훅 풍겨 왔다.
“그 귀한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님과 폐하 그리고 비아 공작님까지 온다는 말에 재미있는 꼴을 구경하러 왔더니 별일 없군요?”
“무슨 별일이 있기를 바랐나.”
“글쎄요. 아름다운 밀회?”
그가 실실대며 말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였다. 그가 손을 들어 녹스의 턱을 툭 건드렸다. 그리고 천천히 턱선을 쓸기 시작했다.
“아니면 이렇게 된 걸 기뻐해야 하나? 제가 두 분께서 매달리시는 공작 전하의 몸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의 손가락이 턱 끝에 닿았다가 이내 귓불을 문질렀다. 녹스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관심이 많았나?”
“그럼요.”
베일런의 눈동자가 목울대와 덜미에 가득한 울혈에 꽂혔다. 흰 피부 위에 붉게 피어 있는 것이 제법 자극적이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째, 저와 한번 놀아 보시겠습니까?”
“글쎄.”
녹스가 턱을 살짝 들었다.
“그대는 내 몸보다 다이아몬드에 더 관심이 있을 텐데.”
우뚝.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녹스는 옅게 미소 지었다. 조각상을 만든 듯 굳어 있던 얼굴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니 삽시간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베일런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허’ 하고 웃었다.
“설마요. 제 아버지도 아니고 제가 그런 것에 관심이 있을 리가.”
“내가 바보 천치인 줄 아는군.”
“…….”
“상업에 뛰어들자고 글렌디픽 백작에게 말한 것이 자네인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녹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불쾌하기 짝이 없어.”
“…무슨 소린지 조금도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녹스가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이아몬드 국내 유통 건에 대해서는 다른 자와 이야기를 나누어 봐야겠군.”
녹스가 그리 말하며 문 쪽으로 걸었다. 녹스는 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셋을 세자마자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왜, 대화해 볼 의사가 생겼나?”
녹스가 뒤돌아보는 대신 문의 손잡이를 잡은 채 물었다. 등 뒤의 남자가 잠시 머뭇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긴 지금까지 정체를 숨기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모든 사업을 벌인 남자이니 그럴 수밖에.
“…합시다. 이야기.”
“좋아.”
녹스가 그대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베일런은 그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이내 맞은편에 앉아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테이블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제대로 대화가 되겠나?”
“다 알고 있으면서 그런 핑계로 후려칠 생각 마십시오. 마신 게 아니라 뿌린 것뿐입니다.”
“저런, 몰랐군.”
“저도 이런 분이실 줄 몰랐습니다.”
“왜, 좀 간편히 빼먹으려 했는데 그게 불가능할 것 같아 아쉽나?”
“솔직히 말하면 좀 놀아 보자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저런, 망나니인 척만 하는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닌가 보군?”
“망나니 행세를 하다 보면 망나니가 됩니다. 저도 많이 변했죠.”
“뭐, 나는 일만 똑바로 진행되면 그대의 행동거지가 어떻든 상관없네.”
그러자 베일런이 씨익 웃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깥의 귀족들이 지금 혈안이 되어 공작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이아몬드 건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그리고 그대는 참지 못하고 이리로 들어왔군.”
“제가 먼저 차지할 먹잇감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저를 기다리는 덫이었다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쁜가?”
“…아뇨.”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어딘가에 들킬 거라고 생각도 안 했는데 이렇게 들킬 줄이야. 대체 언제부터 아신 겁니까?”
“글렌디픽 백작이 사업에 성공하자마자.”
“그렇게 빨리?”
“내가 본 글렌디픽 백작은 상업에 그리 관심이 많은 인간이 아니었거든.”
“제 아버지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주 오래전에, 내가 어릴 때.”
“…그렇군요.”
“그럼.”
녹스가 다리를 꼬고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렸다.
“내가 광산에서 나오는 다이아몬드의 국내 독점권을 준다고 했을 때. 그대는 내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나?”
취기가 돈 것처럼 흐리멍덩하던 베일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아까와 달리 반짝이는 갈색 눈이 보기 좋았다. 녹스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번 거래가 꽤 성공적일 거라 생각했고 결과는 그의 예상대로였다.
* * *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하지.”
“그보다, 왜 그러고 나오신 겁니까?”
“자네가 꼬이라고.”
베일런이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머리를 한 번 헤집었다.
“정말 덫에 단단히 걸렸네요.”
“빠질 만한 덫이잖나.”
“그렇기는, 하죠.”
“그럼 나중에 저택으로 사람을 보내지.”
“알겠습니다.”
녹스는 베일런과의 대화를 마치고 룸에서 나왔다. 들어갈 때와는 다르게 셔츠를 단정히 채우고 나온 녹스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녹스가 방에서 나오자 은근슬쩍 귀족들의 시선이 붙어 왔다. 어디 한번 벗겨 먹어 볼까 살피는 면면들. 녹스는 샴페인을 한 잔 들고 느긋하게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어머, 공작님.”
귀족들은 너무나도 쉽게 다가왔다. 그들에게 할리드 비아와 녹스 라이네리오의 이름은 그 무게부터가 달랐다. 귀족들은 노예였던 자에게 가볍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들의 눈은 탐욕으로 번뜩였다. 다이아몬드, 그 단어 하나가 그들을 움직이게 했다.
“무슨 일이지?”
녹스는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봤다. 쉽게 다가왔던 귀족들은 그의 눈빛을 보고 움찔거렸다. 녹스는 느지막이 미소를 입에 올렸다. 사교계에서 미소는 가면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속내를 감출 수 있는.
“자, 잘 지내셨나 하여….”
능숙하게 미소를 올리는 그의 모습에 귀족들이 슬쩍 어깨를 뒤로 물리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녹스는 그들을 보며 잔을 가볍게 내밀었다. 스스럼없이 다가왔던 귀족은 슬쩍 눈치를 보다 저도 손에 쥐고 있던 샴페인 잔을 녹스의 잔에 가볍게 부딪혔다.
“언제부터 내게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저희야 늘 공작님의 안정을 바라지요.”
녹스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 그 귀족을 바라보았다. 그 귀족은 웃는 낯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이 붙어 오자 슬쩍 눈을 피했다. 거짓말을 했을 때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이 사교계에서 진심으로 상대방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녹스는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고맙군.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
녹스가 몸을 살짝 숙여 상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이아몬드 국내 유통 독점 거래가 잘 이루어졌거든.”
“…그렇습니까?”
귀족의 눈빛이 일순 변했다. 도대체 언제, 라는 눈이었다. 녹스는 상대를 알았다. 글렌피딕 백작의 뒤를 따라 상업에 뛰어든 귀족 중 하나. 녹스는 허리를 바로 세웠다.
“하지만 이번에 돌려받을 사업체들과 연결된 무역선은 아직 구하지를 못했네.”
“아, 그런 거라면….”
그의 말에 상대가 반색했다. 그리고 녹스가 그 이야기를 꺼냄과 동시에 주변으로 귀족들이 슬금슬금 몰려들기 시작했다. 귀족들 사이에선 사업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사업은 대부분 서로서로 아는 얼굴들로 연결되어 새롭다고 할 인물이 나타나지 않아 정체기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모두가 비등비등했고 변화 따윈 없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이라는 인물이 끼어든 것이다.
“라이네리오 공작님.”
“무역 건이라면 저희 가문에서….”
노예로 전락했던 자라도 자신에게 돈을 물어다 준다면 얼마든지 거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 자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반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차는 자들도 있었다. 오래된 구 귀족들이 그러했다. 녹스는 그들을 한 번 훑어보고 고개를 돌렸다. 저런 가치관을 가진 귀족들은 그에게 필요 없었다.
이번에 황제가 새로이 자리를 채우며 올라온 신귀족들. 그들이 녹스의 표적이었다. 실제로 그의 주위에 몰려든 자들은 젊은 축에 속했다. 물론 모든 신귀족이 제게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황제파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단 말이지….’
황제와 공작의 정부로 알려져 있기에 오히려 그와 엮이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녹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귀족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녹스는 지금 그들에게 새로운 사업을 물어다 줄 비둘기 같은 존재였다.
“다음 달에 저희 저택에서 연회가 있는데….”
“다음 주, 괜찮으시면 잠시 식사라도….”
“따로 편지를 보내지.”
녹스는 그들이 자신을 먹잇감으로 보는 걸 알았다. 이것은 호감 따위가 아니다. 그저 맛 좋은 먹잇감에게 접근하는 맹수들의 조심스러운 걸음일 뿐이지. 녹스가 세력을 만들기 위해선 일단 ‘주목’ 받을 필요가 있었다. 안델라스 후작이 자연스럽게 자리에 끼어들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는가?”
“아! 안델라스 후작님.”
“마침 잘 왔군.”
녹스가 안델라스 후작을 보며 말했다. 언질 받은 게 없는 그는 잠시 의아한 눈으로 녹스를 보았다. 녹스는 안델라스 후작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안델라스 후작의 어깨가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 그것은 상대가 자신의 아래에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안델라스 후작에게로 향했다. 그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