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무슨 일이십니까.”
안델라스 후작은 녹스의 눈을 들여다보다 이내 눈을 자연스럽게 휘었다. 눈주름이 진 눈매가 서글서글하니 퍽 가까운 사이처럼 보였다.
“다이아몬드의 국내 독점 유통이 결정되어서 이제 슬슬 국외 유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귀족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황궁에서 나오는 다이아몬드는 그 질이 최상급이었다. 황궁에서 국내외로 다이아몬드를 팔아 벌어들이는 수익만 해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해외 유통을 자네가 맡아 보는 건 어떤가?”
“제가, 말입니까?”
“그대가 원한다면.”
안델라스 후작의 눈이 흔들렸다. 녹스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잡을지, 잡지 않을지는 오롯이 그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후작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맡겨만 주신다면….”
“내가 후작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는가.”
녹스는 귀족들 앞에서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과 가까이 지내면 무어가 떨어질지. 어떤 이득을 볼 수 있는지 말이다. 녹스의 말에 귀족들의 귀가 열렸다.
‘라이네리오 가문의 사업체가 몇 개였죠?’
‘못해도 스무 개는 넘을 겁니다.’
‘후작의 유통 라인은 한정적이니 그 외 국외로 갈 것들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겁니다.’
녹스는 뻔히 보이는 미끼를 드리웠고 귀족들은 낚싯대가 끝에 있음을 앎에도 미끼를 먹기 위해 몰려들었다. 녹스는 입가를 가린 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디 보자. 집어 먹을 게 하나, 둘, 셋….
* * *
녹스는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가 취기를 핑계 삼아 잠시 테라스로 나왔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눈에 불을 켜고 사업에 대해 이야기했고 녹스는 그들을 상대하느라 살짝 지쳐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황제와 할리드가 접근하지 않았지.’
아무래도 녹스 주변으로 사람이 몰려드니 다가오지 못하는 게 눈에 보였다.
‘뒤늦게 챙기는 척하긴.’
어차피 더러운 소문은 퍼질 대로 퍼졌는데. 녹스는 난간에 팔꿈치를 얹고 멀리 떨어진 정원을 내다보았다. 정교하게 조각된 분수가 보였다. 물은 차가워 보였고 그 위로는 달이 비치고 있었다. 테라스의 문이 열린 건 녹스가 흔들리는 달의 잔상을 좇을 때였다.
“…라이네리오 공작.”
“…….”
익숙한 목소리에 녹스가 허리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할리드. 그가 거기 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비아 공작.”
“…갑자기 보이지 않길래.”
“제가 공작과 얼굴을 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
그때, 연회장 안에서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가 테라스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커튼 틈으로 손을 잡고 댄스홀로 나오는 귀족들이 보였다. 녹스는 잠시 보였던 그 잔상을 좇다가 곧 할리드에게 물었다.
“저번에 가르쳐 준 춤은 기억하고 있나?”
할리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녹스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할리드는 녹스의 의중을 알 수 없었지만 착실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리 와.”
녹스가 마치 댄스 신청을 하듯 손을 내밀었고 할리드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녹스는 연회 홀에서 새어 나온 빛에 녹빛으로 빛나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할리드는 검게 물들지 않은 그의 눈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모르겠다며 슬쩍 감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태껏 왜 그것을 몰랐는지 스스로를 자책했다.
할리드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녹스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녹스가 자연스럽게 딸려 가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레이디의 댄스 신청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않을 정도는 되십니까.”
“…아마도.”
“잘하셨군요.”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음악에 맞춰 녹스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리드가 그에 맞춰 걸음을 옮겼다. 제법, 잘 외우고 있었다. 게다가 능숙해진 감도 있었다. 녹스처럼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 창피당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탁, 타닥.
음악에 맞춰 두 사람의 발이 느리게 움직였다. 할리드의 숨결이 가까이서 느껴졌다.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녹스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할리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할리드는 지금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걸음을 맞추며 함께하는 이 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 음악은 멈추었고 쌍을 이루어 춤추던 귀족들은 서로의 손을 놓고 헤어졌다. 할리드는 음악이 끝났음을 앎에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녹스는 고개를 들어 할리드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왜.”
“…….”
“놓고 싶지 않습니까?”
“……주제넘게도.”
“하하.”
주제넘게라. 녹스는 그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뒤꿈치를 살짝 들어 그에게 입 맞출 듯 다가갔다. 할리드의 눈이 조금 커졌다. 할리드의 입술이 가볍게 열리고, 그의 눈꺼풀이 조금쯤 닫혔을 때.
“할리드.”
녹스가 멈추었다.
“이젠 내가 네게 입 맞출 이유가 없어.”
“…뭐?”
“내가 지금 싫은 걸 참고 네게 키스할 이유가 없다고.”
할리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녹스는 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할리드의 손이 녹스의 손목을 한 번 꾹 잡았다가 놓았다.
“저번에 폐하께 키스한 건….”
“입 맞출 이유가 있었지.”
녹스의 손가락이 할리드의 어깨를 거미처럼 기어올랐다.
“네겐 없고.”
“…….”
“네게 뭐가 부족한지… 알겠어?”
녹스는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고 그를 지나쳤다. 할리드는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녹스는 그를 등지고 다시 연회 홀로 들어갔다. 할리드는 시선을 그대로 내린 채 주먹을 꽉 쥐었다.
녹스는 테라스에서 나와 벽에 가까이 붙은 채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동했다. 사람을 더 상대하기엔 매우 피곤했다. 오늘 귀족들과 충분히 대화를 나누었으니 이만 돌아가고 싶었다. 다행히 그는 어렵지 않게 연회 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춤과 술에 취한 사람들은 벽 따위를 쳐다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녹스는 연회 홀 밖에 대기하고 있던 후작가의 하인에게 제 마부와 마차를 불러 달라 말했고 곧 마차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은.
‘허무해.’
그냥, 그랬다. 제가 느낀 감상은 그것뿐이었다. 분명 이루어 낸 것은 있는데 아무 기쁨도 느껴지지 않았다. 녹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만 버티자. 조금만 더 버티자.
마음속에 다짐이 하나둘 쌓인다. 그것이 새카맣다 보일 정도로 가득하게.
녹스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차가 굴러가는 내내 머리를 텅 비웠다. 그러자 새카만 공간 안에 홀로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덜컹, 덜컹.
마차 흔들리는 소리가 몇 번 들리나 싶더니 곧 곧 라이네리오 저택 앞에 도착했다. 펠티온과 할리드를 보고 온 뒤 그들이 준비해 놓은 보금자리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짜증이 났다. 그는 사용인이 문을 열어 주자 입을 꾹 다문 채 마차에서 내려 곧게 걸었다. 냉랭한 표정에서 말 걸지 말라는 뜻이 선명히 보였다.
“오셨습니까. 공작님.”
그런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있었다. 녹스가 미간을 좁힌 채 옆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서 있는 것은.
“조심히 다녀오셨습니까.”
에스테리온 론더. 그였다. 유일하게 자신의 손으로 고른 자신의 측근. 하, 한숨이 탁 하고 터졌다. 에스테리온은 잠시 그의 얼굴을 보다가 기민하게 그가 피곤하고 예민한 상태임을 알았다.
“아, 물러날까요?”
“…아니야. 이리 와.”
녹스는 따라오라는 듯 걸음을 옮겼고 에스테리온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곤 그의 뒤를 따랐다. 녹스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기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으니까. 그걸 눈치챘기에 에스테리온도 얌전히 입을 다물고 그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침실에 도착했을 때, 에스테리온은 손을 뻗어 문을 열고 녹스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녹스의 방을 담당하는 하인들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말아.”
“네 알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안젤라를 부르지.”
“예.”
하인들은 론더의 명령을 받아 방문 앞을 떠났다. 그렇게 뒤늦게 방으로 들어가니 녹스가 침대 위에 쓰러져 누워 있었다. 에스테리온이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녹스는 아무런 의지가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테리온은 종종 제 공작이 깊은 우울감에 빠지는 것에 대해 자세히 알진 못했지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은 잘 알았다.
에스테리온은 녹스의 허리를 받쳐 안아 그의 연회복을 천천히 벗겼다. 자신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싫어하는 건 알지만 이렇게 뒀다간 그냥 이대로 잠들 것 같았다.
“론더.”
그때 마침 녹스가 입을 열었다.
“예, 공작님.”
“몸을 팔라는 제안을 받았어.”
“예…. 예?”
에스테리온이 인상을 와작 구겼다. 녹스는 그 얼굴을 보며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차피 굴러먹은 몸뚱이 이리 쓰고 저리 쓸 생각이기는 했어. 그런데 막상 대놓고 몸 팔라는 소리를 들으니 자존심이 상하더라고.”
“…….”
에스테리온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맞장구도 그에 대한 위로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녹스의 마음에 들었다. 말이 없는 것. 녹스는 그런 게 좋았다.
“비참하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고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싶기도 하고.”
녹스의 눈은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에스테리온은 녹스의 셔츠를 풀기 시작했다. 툭, 툭. 단추를 끄르자 에스테리온, 자신이 남겨 둔 자국이 보였다. 에스테리온은 잠시 손을 멈칫했다가 이내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담백한 손길로 옷을 벗겨 냈다.
“론더.”
녹스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옷을 다 벗겨 그에게 입힐 가운을 가지고 오던 에스테리온이 답했다.
“예.”
“그냥 너랑 잘까.”
희미한 체념이 깔린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