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녹스는 에스테리온이 고른 초대장을 보았다. 고급스러운 남색의 편지지엔 흰색 잉크로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녹스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 편지를 받았다. 거기에 무언가 있음을 감지한 에스테리온은 순순히 그에게 편지를 넘기고 그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디미트리 에이던]
녹스는 그 이름을 쓰다듬었다. 이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녹스가 쓰게 웃었다. 에스테리온은 녹스의 표정 변화를 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잘 아시는 분입니까?”
“…잘 알지.”
녹스가 천천히 답했다.
“라이네리오 기사단의 부단장이었으니까.”
그 말에 에스테리온이 그 편지지를 내려다보았다. 녹스는 또박또박 쓰인 글자를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미소 끝이 쓰디썼다. 녹스는 그 편지를 에스테리온에게 돌려주었다.
“이곳으로 하지.”
편지에 적힌 날짜는 일주일 뒤였다. 녹스는 자신이 그 자리에 나가도 될까 고민했다. 어린 자신에게 믿음을 주던 부기사단장은 이제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두렵기도 했다.
괜찮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충분했다. 다음 주 수요일. 무슨 시선을 받든 묵묵히 서 있을 준비를 하는 데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녹스가 덤덤히 대답했다. 에스테리온은 받은 편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부단장을 만나는 자리에 자신이 함께 서 있어도 되는 걸까? 그런 질문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하지만 한 번 명령을 내리면 번복하는 일이 없는 녹스는 그저 태연히 집무실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할 뿐이었다.
에스테리온은 초대장을 챙겨 놓은 뒤, 그와 함께 방을 나섰다.
보좌관들은 날이 갈수록 일에 익숙해졌다. 처음엔 녹스가 따로 확인해야 할 정도였지만 지금은 나름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그래도 녹스는 그들이 통과시킨 서류를 따로 살피곤 했다. 에스테리온은 자신들이 그렇게 못 미덥나 생각하다가 시간이 지난 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그는 그냥, 그런 성격이었다.
아침부터 저택은 가볍게 부산스러웠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을 꽂아 넣은 할리드 비아 공작의 행차신데. 어찌 대충할 수 있을까. 녹스는 삐딱하게 생각하며 오늘치 훈련을 끝낸 후 가볍게 몸을 씻었다.
안젤라가 내어 온 차를 마시고 에스테리온이 가지고 온 서류를 살피다 보니 1시가 지나 있었다. 녹스는 점심을 간단히 때우고 할리드를 맞이하기 위해 응접실로 향했다.
그다지, 직접 마중을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녹스가 직접 마중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집사가 스스로 모시겠다고 자처했다. 녹스는 이제 그냥 웃음도 나오지 않아서 마음대로 하라고 전했다.
“론더.”
“네.”
“넌 보좌관 집무실로 돌아가.”
그러자 에스테리온이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녹스가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피식 웃으며 입을 뗐다.
“넌 내 보호자가 아니야.”
“…주제넘었습니다.”
“알았으면 됐어.”
녹스는 잠시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를 일부러 기다리게 할 수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그를 이 집 안에 오래 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미리 나와 앉아 있는 것이다. 녹스는 안젤라에게 말했다.
“할리드 비아 가문의 요즘 동태는 어떻지?”
“기사단의 숫자를 계속해서 불리고 있습니다. 정확한 목적은 알지 못합니다만 아마 지금 제국에서 가장 인원이 많은 기사단일 겁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일개의 부대가 될 겁니다.”
녹스는 설핏 미소 지었다. 안젤라는 자기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양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이 지나자 밖, 복도에서 두 사람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집사와 할리드가 오는 게 분명했다.
녹스는 응접실 중앙에 마련된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그렇게 곧.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안젤라가 응접실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문의 크기와 별 차이가 나지 않는 할리드가 그 앞에 서 있었다. 녹스는 일어나는 대신 간결하게 대답했다.
“앉으시지요.”
녹스의 간단한 말에 할리드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집사는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다 나갔고 녹스는 안젤라에게 명령했다.
“차를 내와.”
“알겠습니다.”
그렇게 안젤라까지 응접실을 나가자 단 두 사람만이 방 안에 남았다. 지독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녹스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으며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보자고 한 이유가 뭡니까.”
할리드는 잠시 시선을 좁혔다. 녹스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긴, 자신은 녹스를 다시 만난 이후, 그에게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이 없었다. 지금에 와서 관심을 기울여 봤자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속은커녕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할리드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저번에 했던 말.”
할리드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내게 키스할 이유가 없다는 그 말 말입니다.”
녹스는 턱을 살짝 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할리드는 그의 턱선을 집요하게 바라보다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제가 당신을… 아니, 널 위해 뭐든 하겠다는 말이 네게 지겨운 말일 걸 알아.”
그러게, 지금 그 말을 몇 번째 듣는 건지 모르겠어, 할리드.
속마음과 달리 녹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할리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녹스가 앉아 있는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녹스가 고개를 조금 더 들어 할리드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고개는 곧 천천히 내려갔다.
“이건 또 무슨 짓일까.”
녹스가 설핏 웃으며 말했다. 할리드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뭐든 좋아. 쓰다 버려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패가 되고 싶습니다.”
녹스가 입술 끝을 올렸다. 할리드는 그 입술 끝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어쩌면 최초로 보는 진심 어린 미소일 것이다. 그게 비록 비소라 하더라도. 할리드는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마치 잡아 달라는 듯 파르르 떨며 애처롭게.
“당신이 하는 것은 무엇이든 따를 겁니다. 당신이 내게 키스해 주리라 기대조차 하지 않겠습니다.”
할리드는 깊고 갈라진 목소리로 굳은 결심을 내뱉었다.
“다만 손등에 입 맞출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녹스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할리드가 홀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녹스는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이해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녹스는 자신 앞에 무릎 꿇은 할리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엔 푸른빛이 일렁였다. 지금 내뱉은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을 만큼 푸르게 빛나는 눈. 녹스는 저 푸른 빛을 아주 좋아했다. 무척이나 오래전에, 그래. 네가 어릴 때.
하지만 지금 녹스에게 저 푸른빛은 저를 찌르는 칼날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녹스는 할리드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림자 져 검게 보이는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반면 할리드는 초조했다. 녹스가 무엇이라도 좋으니 뭐라 답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녹스는 자신을 애태우듯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았다.
녹스는 시선을 내리다 문득 할리드가 제게 내민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팔을 앞으로 내미느라 살짝 짧아진 소매 안쪽으로 무언가 남은 흔적을 보았다. 녹스의 눈이 잠시 가늘어지더니 이내 할리드의 팔목을 잡았다.
“……이건.”
할리드가 순간 손을 거두려 하는 것을 녹스가 막았다.
“가만히 있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할리드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마치 어릴 적 자신에게 했던 말투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할리드가 어찌 거부할 수 있을까. 할리드는 가만히 팔에 힘을 뺐고 녹스는 천천히 할리드의 소매를 걷었다.
거기엔 자신과 똑같은 화상 자국이 있었다. 녹스는 무언가 유쾌해져 괜히 그 흉터 위를 천천히 쓸어내리며 물었다.
“왜 그랬지?”
“…그대를 이해해 보고 싶어서.”
할리드의 대답에 녹스는 부드럽게 미소를 끌어 올렸다. 이런다고 나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자신이 당한 짓이 얼마인데. 고작 숨 좀 쉬자고 스스로 한 짓을 따라 하는 걸로는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녹스는 확신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할리드가 스스로를 해칠 정도로 뇌 한구석이 망가졌다는 사실은 녹스에겐 정말로 기쁜 일이었다.
미소를 내리누르고자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곧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부드러운 웃음소리에 할리드의 눈이 기대를 담았다. 하지만 녹스는 곧장 웃음을 멈추고 단단하면서도 조금은 부드럽게 말했다.
“난 널 바로 믿을 수가 없어, 할리드.”
그래, 마치 제가 모시던 도련님일 때처럼. 할리드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이제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녹스는 이미 모조리 가져다 버린 추억을 아직도 그는 안고 있었다.
녹스는 그의 추억 따위 제 알 바 아니었다. 그냥, 자신이 이용해 먹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억지로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는 그 추억을 그가 들먹이고자 한다면 기꺼이 어울려 줄 자신도 있었다.
“내가,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녹스는 그 말에 커다란 뱀처럼 스산하게 속삭였다.
“황제의 팔다리 중 가장 중요한 걸 잘라 봐.”
할리드의 눈이 크게 뜨였다. 녹스는 눈썹을 가볍게 내리며 할리드의 손등에서 손을 떼었다.
“물론, 넌 못 하겠지만.”
할리드가 다급하게 떠나가는 녹스의 손목을 쥐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아니, 넌 못 해.”
녹스가 단언했다.
“넌 너밖에 모르니까. 사랑이 뭔지 모르니까. 그리고 멍청하기 짝이 없으니까.”
할리드는 녹스의 폭언에도 녹스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할리드의 손이 녹스의 손을 꽉 붙잡았다. 녹스는 억지로 힘을 주어 빼지 않고 그저 가만히 할리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할리드.”
“정말로….”
녹스가 그의 말을 잘랐다.
“황제가 나보고 몸을 팔라더군.”
순간 분위기가 일렁였다. 녹스는 천천히 바뀌는 할리드의 표정을 보고 꽤 즐겁게 웃었다. 그래, 그게 진짜 나를 위한 분노인지 아니면 내게 닿지 못하는 너를 위한 분노인지는 상관이 없다. 다만 네가 황제에게 분노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녹스는 할리드에게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