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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31화 (131/158)

제131화

“……나는.”

할리드는 목이 메는 듯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네게 무얼 선택하라 할 자격이 없어….”

녹스가 느른한 목소리로 답했다.

“잘 알고 있네.”

할리드가 그의 손을 꾹 붙잡고 그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녹스는 제가 황제의 요청을 받아들였는지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손등 하나를 허락해 주었을 뿐이다. 할리드가 천천히 녹스 라이네리오의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입술은 건조하고 버석했으며 조금은 까슬했다. 녹스가 할리드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네 머릿속의 나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도대체 어떻길래 너를 이렇게 매달리게 만드는 건지. 네 머릿속에 있던 나는 이미 네 손에 다 갈가리 찢겨 망가졌는데. 녹스가 손을 뻗어 할리드의 뺨을 매만졌다.

“왼팔을 하나 잘라 와.”

“……예.”

할리드는 녹스의 손바닥이 자신의 뺨을 쓰다듬자 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고 손바닥 안쪽에 입술을 쪼듯 맞췄다.

황제의 왼팔. 여기 있는 두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황제의 왼팔이자 책사.

엘러딘 바이스.

‘그 남자처럼 까다로운 남자도 없지.’

녹스의 시선이 잠시 모로 돌아가며 생각에 빠졌다. 책사를 상대할 땐 더 뛰어난 책사로 대응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녹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자는 찢고 잘라서 불사르는 게 맞지.

아무도 이기지 못할 무력으로.

“기대하고 있을게.”

“예….”

할리드가 녹스를 올려다보았다.

“도련님.”

녹스는 그에게 옛날처럼 웃어 주었다. 멍청한 할리드. 네 손으로 죽인 사람에게 매달리는 아둔한 인간. 녹스는 무엇이든 망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를 포함해 무엇이라도.

* * *

녹스 라이네리오는 이후 수많은 파티에 참여하며 자신의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귀족들, 특히 안델라스 후작 아래로 모인 귀족파들이 그것을 반겼다.

귀족파 몰락 이후 권력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녹스는 기꺼이 미끼를 드리웠고 사정이 어려운 자들은 그 미끼를 외면할 수 없었다.

황제가 내어 준 자금으로 귀족파의 배를 불리며 서서히 몸집을 부풀려 나갔다.

녹스가 그러는 동안, 황제파는 황제에게 의중을 물어보았으나 펠티온은 차마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녹스 라이네리오. 그 몸을 한번 안아 보겠다고 이런 짓을 했다는 말을 어찌할까.

녹스는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안정적으로 귀족파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안델라스 후작이 흩어진 귀족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모은 덕분이었다.

물론, 황제의 눈치를 보아 황제파로 들어간 인물들은 다시 포섭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포섭할 생각도 없었다.

녹스가 바라는 건 귀족파가 아닌 이상에야 답이 없는 종자들뿐이었다. 자신을 배신하지 못하게, 자신이라는 끈이 끊어지면 나락으로 떨어질 자들.

오늘 만나러 갈 자도 그런 귀족 중 하나였다. 엘리나포케 백작. 그는 본디 커다란 보석상의 주인이었으나 현 황제가 오른 뒤 모든 끈이 떨어져 보석을 공급받지 못해 보석상의 문을 닫아 놓은 지 오래된 인물이었다.

‘아등바등 살고 있나 보군.’

녹스는 마차에서 내리며 겉으론 화려해 보이는 백작의 저택을 평가했다.

달튼 엘리나포케 백작은 보석상으로도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해외에서 이색적인 동물을 들여와 수집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전하.”

엘리나포케 백작의 집사가 그를 맞이하러 나왔고 녹스는 그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로 향하는 길의 대부분이 실내 정원처럼 꾸며져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 보기 드문 색깔의 새나 자그마한 동물들이 나타났다 후다닥 풀 틈으로 사라졌다.

녹스는 응접실로 향하다 말고 잠시 붉은 새와 눈을 맞췄다. 그러자 그 새가 말했다.

“안녕.”

“흠.”

“말을 따라 하는 새입니다. 사용인들이 오고 가며 하는 말을 배운 모양이더군요.”

녹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새를 가만히 보다가 지나쳤다. 그렇게 응접실에 다다르자 미리 도착한 듯 엘리나포케 백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녹스를 맞이했다.

“어, 어서 오십시오. 공작 전하!”

“이리 반겨 주어서 고맙군.”

“아, 하하.”

그는 손바닥에 난 땀을 바지에 닦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녹스는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보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엘리나포케 백작이 민망한 듯 손을 거두고 부리나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녹스는 안부를 주고받는 시간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저쪽도 본론을 원할 테니.

녹스가 뒤쪽을 보고 가볍게 고갯짓하자 그를 따라온 사용인 중 하나가 챙겨 온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뒤로 물러났다.

“이, 이건…?”

“일정량 이상의 다이아몬드를 그쪽에 대어 주겠다는 계약서일세.”

그 말에 백작이 반색하다 이내 얼굴을 굳혔다. 당장에 그는 이 저택과 문 닫은 보석상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거기에 키우는 동물들은 어떻고.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돈이!

녹스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미소 지으며 다른 계약서 하나를 더 내밀었다.

“보석을 사들일 돈을 주겠네.”

“저, 정말이십니까?”

“원한다면 다이아몬드가 아닌 다른 보석을 취급하는 귀족들과 다리를 놓아 줄 수도 있어.”

“고, 공작님.”

백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녹스가 그에게 이리 잘해 주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편을 만들자고 아무 대가도 없이 무언가를 내어 줄 리가.

“다만 이자를 받는 대신 보석상에서 나오는 총매출의 이 할을 받고 싶네.”

“지, 지분을 사들이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백작이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물었다. 녹스는 그에게 속살거렸다.

“그래, 내 지분이 들어가 있으면 내가 그대의 보석상에 보석을 끊을 일도 없지.”

“그, 그건 그렇겠지만….”

녹스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백작은 어차피 지금 궁지에 몰린 상태였지만 총매출의 이 할이라는 말에 덥석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그대가 곤란하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다른 사람을….”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공작님!”

백작이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사용인을 불러 펜을 준비하게 했다.

백작은 곰곰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아마 회복하는 단계에서의 이 할은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후의 이 할은 아마 피가 빠지는 듯한 금액일 게 뻔했다.

“사인만 하면 모든 게 편안해질 걸세.”

하지만 녹스의 말은 부드럽고 달콤하기만 했다. 백작은 제 상황을 떠올렸다. 어차피 지금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이 지금 무너지느니 이 끈이라도 잡는 것이 옳은 것이라 그는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서류를 꼼꼼히 살핀 후 사인을 마쳤다. 녹스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십시오.”

녹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닐세, 일이 바빠서.”

“아, 제가 바쁘신 분을.”

“그리고 다른 보석 광산을 가진 자들에게 그대의 이름을 전해 놓을 테니 그 뒤는 알아서 하게.”

그 말에 백작은 녹스를 마치 구렁텅이 속에서 자신을 건져 준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기, 길을 놓아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녹스는 그렇게 말하는 백작을 스치듯 바라보다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말이야. 내가 관심이 생긴 게 있는데.”

“어떤 관심 말입니까?”

“백작은 해외에서 꽤 많은 동물을 들여온다지?”

“그야, 예전엔 그랬습니다. 아, 혹시 구하고 싶은 동물이라도 있으십니까?”

“뭐, 그런 거지. 간단한 부탁 하나 들어주겠나?”

그러자 백작이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맹수가 가지고 싶어. 특히 사나운 것들로.”

그 말에 백작은 특이하다는 얼굴로 녹스를 바라보았다. 흔히 애완동물로 들이는 것은 작은 새나 소동물들이다. 그들은 위험하지 않고 또 예쁘니까. 그런데 사나운 맹수라니.

‘물론 그런 동물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

백작은 홀로 생각했다. 녹스는 그저 더는 묻지 말라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녹스의 시선을 받은 백작은 어쩐지 입 안이 바짝 타는 것 같아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산데스 지역의 맹수들이 사납기로 유명합니다. 늑대, 곰, 사자, 치타 등의 수렵이 이루어지는 곳이죠.”

“그렇군.”

산데스라. 녹스가 지역의 이름을 한 번 발음했다. 백작은 어쩐지 이 공작이 께름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에게 동아줄을 내려 준 은인이라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어쩐지 긴장되는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 보기 위해 다른 주제를 입에 올렸다.

“그러고 보니 곧 황제 폐하의 즉위 1주년이군요. 늘 그랬던 것처럼 사냥제를 여실까요?”

그러고 보니 녹스 라이네리오 앞에서 황제의 이름을 꺼내서 좋을 것이 없었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백작은 아차,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는 더 싸늘하게 식어 갔다. 녹스 라이네리오의 서늘한 시선이 그를 한 번 훑었다. 백작은 그대로 굳은 채로 고드름 같이 얼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한 번은 넘어가 주겠다는 듯 건조한 목소리가 흘렀다.

“뭐, 그렇겠지.”

“차, 참가하실 겁니까?”

“아마도.”

“그, 그렇군요. 제가 바쁘신 분을 너무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만 가지.”

백작이 직접 그를 정문 앞까지 안내했다. 녹스는 그의 배웅을 받아 마차를 타고 떠났고 엘리나포케 백작은 식은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안델라스 후작님보다 깐깐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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