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엘리나포케 백작 옆에 슬쩍 붙어 있던 집사가 말했다.
“원하시는 일은 잘 풀리셨습니까. 백작님?”
“이제 다시 보석상을 열 수 있어.”
그는 녹스가 놓고 간 서류들을 챙겨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한편, 녹스는 마차에서 서류를 한 번 더 살핀 뒤 시종에게 넘겼다. 엘리나포케 백작에게 사기를 친 것은 없었다. 그저 좀 과한 요구를 했을 뿐이지.
“지금 묻혀 쓰러지긴 싫겠지.”
황제가 즉위한 후 이제 겨우 안정을 찾은 제국이다. 이 평화로운 때에 의미 없이 가문을 잃긴 싫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곧 백작이 말했던 다른 주제를 떠올렸다.
“사냥제라.”
나쁘지 않지. 어차피 이쯤 열릴 것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즉위 1주년이란 아주 특별한 일도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황제파의 힘을 과시하기도 좋은 자리이고.
녹스는 곧 라이네리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집사에게 말했다.
“집사.”
“예, 공작님.”
녹스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고, 집사는 그의 뒤를 바지런히 쫓았다.
“산데스의 늑대를 구하라고 해. 열두 마리 정도. 엘리나포케 백작이 도와줄 거야.”
“예?”
“그리고 왼팔은, 사냥제 때 받겠다고.”
집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이 있었다. 누구에게 전하라는지에 대한 명령이 없다는 것. 그것은 바로 제가 진실로 모시고 있는 주인에게 전하라는 뜻과 다름없었다.
‘이런 관계가 의미가 있는 건가.’
집사는 잠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지만 앞만 보고 걷는 녹스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녹스를 감시하던 자들은 이제 할리드와 녹스를 연결하는 새가 되었다. 집사는 묘하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집사는 알았다. 이 저택엔 할리드의 손을 탄 자들과 황제의 손을 탄 자들이 교묘하게 섞여 있음을.
집사의 경우 할리드가 심어 놓은 사람이었지만 다른 사용인들 중 황제의 손을 탄 자들이 있었고 녹스는 자신에게 새를 날리라 시켰다.
‘그렇다면 황제가 알면 안 되는 일이라는 건가.’
집사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는 어찌 되었건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한동안 입단속을 해야겠군.’
그리고.
집사가 시선을 슬쩍 내렸다. 할리드의 사람이 아닌 사용인들은 은근슬쩍 내쫓아야 할지도 몰랐다. 집사는 고민하다 그 아래에 무언가를 썼다.
녹스의 말은 곧바로 집사의 새를 통해 할리드에게 전해졌다.
집사가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민하는 동안, 할리드는 그가 보낸 새를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 두 문장을 보곤 곧장 자신의 시종에게 명했다.
“산데스의 늑대를 구해라. 비밀리에.”
“알겠습니다.”
늑대, 사냥제의 왼팔. 그 두 단어는 한 가지의 결과를 말하고 있었다. 엘러딘 바이스. 그를 사냥제 때 처리하라. 할리드는 집사가 보낸 작은 종이를 촛불에 태웠다.
할리드는 녹스를 위해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그게 누군가를 배신하고 죽이는 일이라고 해도. 할리드는 녹스가 전하는 말 아래로 집사가 던진 질문을 내려다보았다.
[태양의 새들을 전부 처리합니까?]
할리드는 제가 고른 자가 제법 눈치가 빠르다 여겼다. 따로 답은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답하지 않는 것 자체로 대답이 될 테니까.
집사는 그날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결정했다. 일단 황제 측의 새들을 골라내어 처리해야 했다.
‘비아 공작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그리고 라이네리오 공작님께선 어떤 생각을 하시는 거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것은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 * *
일주일 뒤였다. 녹스는 에스테리온과 함께 디미트리 에이던, 라이네리오 가문의 부기사단장이었던 그의 저택에 찾아갔다. 녹스와 론더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주변에 수군덕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에스테리온은 주변을 슥 한 번 둘러보곤 녹스의 등 뒤를 가리며 걸었다. 누군가 그의 뒷모습을 흘끔거리는 게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녹스는 에스테리온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눈치채곤 제법이다 싶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거야 이미 익숙해졌지만 누군가 막아 준다는 것은 또 색다른 기분이라. 녹스는 한 번 느릿하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디미트리, 대체 내게 무슨 생각으로 초대장을 보냈을까,’
자신은 이제 그 용맹하고 강인하던 라이네리오 가문의 기사단장이 아니었다. 노예로 떨어졌다 살아보겠다고 아득바득 다시 기어 올라온 아귀에 가까웠다. 아니지, 자신이 원해서 올라온 것도 아니니 끄집어 올려 내진 짐승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녹스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안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길을 비켜 주었다.
그것은 공작인 그의 지위를 알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저 그의 뒤에서 수군거리기 위함일 수도 있었다. 녹스는 똑바로 걸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파티의 주최자인 디미트리 에이던, 그가 보였다. 녹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든, 무슨 말을 하든, 어떤 뉘앙스를 풍기든 금이 가지 않기 위해. 녹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자리에 초대해 주어 고맙군.”
그렇게 말을 걸자 잠시 다른 자와 대화하고 있던 디미트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이내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을 꼭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그랬나?”
“예.”
디미트리 에이던. 그는 원래도 좀 무뚝뚝한 자였다. 그래서 지금 저 얼굴이 딱히 상처가 되진 않았다. 그냥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싶었다. 녹스, 자신은 꽤 많은 게 변해 버렸는데.
“일단 오늘이….”
“제 사촌 동생의 아내 생일 되는 날입니다.”
보통 챙기나? 그런 사람의 생일?
녹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일단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주인공들은 따로 있다는 말일 텐데. 생일 축하한다는 말 정도는 해 줘야겠지. 녹스가 디미트리에게 그것을 물으려 했다. 하지만 디미트리가 한 박자 더 빨랐다.
“이렇게 만난 것도 오랜만인데 잠시 둘이서 대화할 시간 있으십니까.”
“아….”
녹스는 잠시 망설였다. 디미트리는 곧고 올바른 기사였다. 그렇기에 어린 자신이 기사 단장직을 맡았을 땐 자신을 성장시키고 시험하는 사람이 되었고, 자신이 완전히 자랐을 때는 완벽한 부하가 되어 주었다.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충신에 가까운 남자였다.
그런 그가 지금의 자신에겐 무슨 소리를 할까. 녹스는 가만히 생각하다 이내 그를 곧게 바라보았다.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명예를 모른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렇다 할 것이고, 자신을 비난한다면 온전히 그 비난을 받으려 했다. 녹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 에스테리온에게 손짓했다. 에스테리온이 가볍게 녹스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테라스로 갈 테니 앞을 지켜.”
“알겠습니다.”
그저 보좌관과 그 주인이라기엔 좀 가까운 거리감.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며 더욱 수군댔다. 디미트리의 시선이 에스테리온에게 향했다. 그는 서늘한 시선으로 에스테리온을 바라보다 곧 녹스에게 시선을 옮기고선 안내하듯 앞서 걸었다.
녹스는 그 뒤를 따랐고 곧 디미트리가 걷은 커튼 뒤로 사라졌다. 에스테리온은 녹스의 명대로 그 앞을 지키고 섰다. 그리고 묘하게 피어오르는 호기심을 막으려 애썼다.
둘이서 무슨 대화를 할까. 공작님이 걱정이기는 했다. 예전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라니. 녹스의 추락 이후 기사단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수치로 남아 있으리라.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에스테리온이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 녹스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당황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테라스로 들어오고 커튼이 닫히자마자 디미트리가 녹스를 마주 보며 한쪽 무릎을 꿇어 왔기 때문이었다. 녹스는 눈을 크게 뜨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라이네리오 공작 전하.”
“…디미트리.”
그는 녹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돌아오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시선이 곧았다.
“…믿었다고?”
내가 돌아올 거라 믿었다니. 집안이 그리되고 내가 그렇게 조롱받아도 다시 일어설 거라 믿고 있었다는 걸까. 녹스는 디미트리를 내려다보았다.
단단한 표정. 무뚝뚝한 얼굴. 그리고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검은 눈.
‘왜 몰랐을까.’
그것은 분명 신뢰의 눈빛이었다. 디미트리는 한 손을 가슴 위에 올렸다.
“한 번 바친 충성을 거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게, 그대의 명예를 망가뜨린 거라 생각하진 않나?”
“한 번 충성했던 주군을 배신하는 것만이 제 가장 큰 수치입니다.”
“디미트리.”
“라이네리오 공작 전하.”
녹스가 디미트리를 부르자 그는 무례하게도 녹스의 말을 끊었다. 마치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하지만 디미트리는 녹스가 그런 말을 입에 올리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이었던 기사단장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자랐는지 옆에서 다 지켜본 사람이 바로 디미트리 에이던이라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녹스를 버릴 수 없었다.
“다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들?”
“예.”
디미트리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우리를 믿지 못했어도 상관없다. 우리가 당신을 믿고 있었으니까.
“단 한 명도 빠짐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