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하하, 말도 안 되는….”
“기사 종자들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만, 충성의 맹세를 바친 자들은 전부 남아 있습니다.”
“다들 정신이 있나 없나.”
녹스가 다그치듯 말했다. 디미트리가 무엇이 문제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녹스는 어이가 없어서 잠시 머리를 짚었다.
“상식적으로…. 아니지. 그대는 그다지 상식적이지 않았어.”
“기억하고 계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무뚝뚝한 건지, 뻔뻔한 건지 모를 말씨는 여전했다. 녹스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고 디미트리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 물었다.
“저희가 돌아갈 자리는 있습니까.”
그 말에 녹스는 잠시 입가를 가렸다. 솔직히 말해서 기사단을 다시 꾸려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다만 라이네리오 기사단을 완전히 새로 꾸려야 한다는 사실에 압박감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 자신을 주군으로 모시겠다는 기사가 있을까 싶어서. 땅으로 떨어져 더럽혀진 몸을 한 자신에게.
그런데 머저리같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녹스는 입가를 가린 손을 내리고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당연하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디미트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예전과 달라진 것 없는 모습. 녹스는 잠시 예전,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자신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 눈을 깜빡였다. 그의 시선이 멀리 던져지자 디미트리가 말했다.
“공작님께서는 예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래?”
“예.”
“어딜 봐서?”
“오래 봐서요.”
“……이런 말씨름으론 영 이길 수가 없었지.”
“그렇지요. 그러고 보니 말입니다.”
디미트리가 말했다.
“뭐지?”
“곁에 붙어 있던 그 보좌관.”
녹스가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그 또한 소문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으니 에스테리온이 자신의 정부라는 소문을 접했을 것이다. 그것과 관련된 쓴소리를 하려나. 녹스가 조금은 비뚤게 웃었다.
“솔직히 예전엔 성 기능에 문제가 있으신가 할 정도로 관심 없던 분 아니십니까?”
“……뭐?”
“이제라도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신다는 건 축복할 일입니다.”
“……고맙군.”
“별말씀을.”
그러니까 디미트리, 이 남자는 생각하는 게 좀 특이하다. 사실 남자가 남자를 정부로 둔다는 것 자체는 사교계에서도 간간이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토록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은 드문 일인데 그나마 다행이라니.
“제대로 된 사람이란 건 어떻게 아는데.”
“말 잘 듣게 생겼습니다.”
“그건 맞긴 한데….”
그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한 편이다. 어쩌면 녹스보다 더. 일단 가짜 정부라는 건 나중에 말할까. 녹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돌렸다. 디미트리는 그 속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날짜를 정해 주시면 저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자 녹스는 고민 없이 답했다.
“내일 당장.”
녹스가 간만에 시원스레 웃었다.
“그대들이 지낼 곳은 변함없이 거기 있거든.”
“…….”
디미트리는 눈을 한 번 크게 뜨고 이내 설핏 웃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대로.”
디미트리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녹스는 변한 것 없는 그를 바라보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그에게 말했다.
“이번 사냥제, 참여할 건가?”
그러자 디미트리가 의아하게 물었다.
“별 이변이 없다면 참여할 예정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무가니까요.”
“그렇지. 무가니까.”
녹스가 곧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는 디미트리의 어깨를 톡톡 건드리고 쓰다듬었다.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야.”
“예?”
“그런 게 있어.”
“못 보던 사이에 비밀이 많아지시긴 하셨군요.”
“그때, 그대를 쫓아다니던 어린애는 아무래도 없지.”
“아쉬운 일입니다.”
“아쉽기는.”
녹스는 그대로 테라스를 벗어났다. 테라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스테리온이 그 뒤를 자연스럽게 따랐다. 녹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익숙한 얼굴들이 몇 보였다. 자신의 기사단에 속해 있던 자들. 녹스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면 아무렇지 않게 설핏 웃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군.”
“일찍 돌아가시는군요.”
“볼 사람은 봤으니까.”
녹스가 사람들을 가로질러 파티장을 벗어났다. 에스테리온은 버릇처럼 그의 등 뒤를 가렸다.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녹스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에스테리온은 그런 그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날 기다렸다라….’
솔직히 말해서 눈시울이 뜨거울 정도로 감동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조금 의심이 들었다. 정말 그 모두가 날 진심으로 기다렸을까.
‘황제의 입김이 어디까지 닿아 있을지 알 수가 없으니….’
어차피 이제 할리드는 제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전 라이네리오 기사단 중에 손을 댄 자가 있다면 먼저 말했겠지. 그래도 확실한 게 좋으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곧이어 마차가 멈추고 녹스는 에스테리온보다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집사에게 명령했다.
“기사단.”
“예?”
“내일, 내 기사들이 올 테니 기사단장실과 부단장실 그리고 그들이 지낼 숙소를 오늘 내로 다 정리해 놔.”
“아, 알겠습니다.”
집사의 대답에 녹스가 이어 말했다.
“건드린 건 없고?”
앞서 말한 기사단의 이야기와 주어 없이 뱉어진 말. 아마 전 기사들에게 손쓴 일이 있냐는 거겠지. 집사는 자기 선에서 아는 게 없어 고개를 저었다.
“물어봐.”
“알겠습니다.”
이젠 아주 전용 통신구가 되었다.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녹스는 에스테리온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집사는 멀거니 서서 고민해야 했다. 그러니까 기사단에 손을 댔냐는 질문도 해야 하고 에스테리온 론더와 오늘 한방을 쓴다는 것도 보고해야 하는 건가?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때마침 안젤라가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인 트레이를 들고 공작님의 방으로 가는 게 보였다. 집사가 그녀를 붙잡았다.
“공작님이 부르셨나?”
“아뇨?”
“…그런데 왜 지금 들어가지?”
“그야, 밖에서 돌아오셨으니까 차를 마셔야죠.”
“……왜?”
“말을 많이 하셨을 테니까 목이 칼칼하실 것 아니에요.”
“……어떻게 알아 그걸.”
“그냥, 제 감?”
안젤라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집사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자신의 방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안젤라는 트레이를 한 손으로 자연스럽게 받친 후 노크했다.
똑똑-.
“안젤라입니다.”
“들어와.”
안젤라는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후 가까운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에스테리온이 녹스의 옷 시중을 들다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알아낸 게 있어서요.”
“뭐지?”
“할리드 비아 공작에 관련된 건 아니고요.”
“그럼?”
“이번 파티에 다녀오신 뒤에 말이죠.”
“미행을 붙였나?”
“미행이라기보단 그 파티에 있던 정보원에 가깝죠.”
“방심을 못 하겠군.”
“아마 황제 입김이 닿은 자들이 몇 명 있을 거예요.”
“그 목록은?”
“방금 들어온 정보라 정리해서 따로 올리겠습니다.”
녹스는 옷을 다 벗고 이내 가운을 걸치며 그녀에게 물었다.
“…몇 명이나 있지?”
“많지는 않아요. 다섯 명 정도?”
“전체 인원이 백 하고도 이십이니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군.”
안젤라가 말했다.
“정확히 무슨 이유로 황제와 손을 잡았는지도 최대한 빨리 알아내서 보고하겠습니다.”
“그러지.”
“아, 그리고.”
안젤라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살짝 틈을 만들었다.
“이번 이야기를 조금 팔아도 될까요?”
“라이네리오 가문에 다시 기사단이 생긴다는 사실?”
“예, 그럼요. 누구보다 정보가 빨라야 하잖아요.”
“마음대로 해. 오히려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신기하군.”
“저는 친절한 편이거든요.”
안젤라가 웃으며 찻잔에 차를 따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은 총 두 개였고 그녀는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말과 함께 문밖으로 사라졌다. 에스테리온은 그녀를 간단히 평가했다.
“속을 모르겠군요.”
“그렇지.”
아마도 그녀는 정보 길드에서 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녹스는 오늘 집사가 제 방으로 가져다 둔 편지를 하나둘 살펴보기 시작했다.
역시나 쓸모없는 건 바닥으로 툭툭 떨어트렸다. 에스테리온은 조금 이따 저걸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편지지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아, 아무래도 진행되나 보군.”
“뭐가 말입니까?”
“즉위 1주년 기념 사냥제.”
“사냥제에 참석하실 겁니까?”
“빠지면 좀 곤란하게 되어서.”
“…….”
에스테리온은 종종 녹스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땐 침묵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녹스는 황가의 인장이 박힌 편지를 테이블에 던지듯 올려 두었다.
“좀 자. 새벽에 내보내 줄 테니까.”
“네.”
녹스는 책상 위에 있는 촛불 하나만을 남겨 두었다. 에스테리온은 잠시 침대 위에서 움직이는 듯하더니 재킷을 벗고 셔츠의 단추를 모두 푼 뒤 침대에 엎어졌다.
저게 익숙해지니까 이제 저런 짓도 하는군. 녹스는 어이없어해야 하는지 기특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단 얼굴로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은 에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