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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34화 (134/158)

제134화

녹스는 태연해 보이는 에스테리온을 가만히 보다가 이내 서류로 눈을 돌렸다. 저러는 걸 보면 그 나름대로 이런 일에 익숙해졌다는 뜻이니 나쁠 것은 없었다.

녹스에겐 당장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어쨌든 기사단이 돌아오기로 했으니 거기에 배치될 예산도 마련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원래 인원들이 다시 찾아와 체계를 새롭게 가르칠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중 다섯이 배신자….’

안젤라에게서 보고가 올라오긴 하겠지만 녹스는 조용히 그 다섯을 스스로 골라내 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사람의 속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라이네리오의 기사단은 과거, 고작 10명의 기사를 뽑을 때도 수백이 몰렸었다. 검술 실력과 체력은 물론, 기사로서의 품격마저 시험대에 올렸었단 말이다.

지금 녹스는 자신의 기사였던 자들의 성정과 품격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자들 중 절박한 이유가 있을 만한 자들을 떠올리는 것뿐이었다.

“대충 누군진 알 것 같은데….”

녹스는 고뇌했다. 자신을 따르던 기사들 중에 자신을 배신하고 황제에게 붙은 자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어쩌면 조금 괴로운 것인지도. 한편으론 그들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명예가 땅에 떨어져 버린 주군을 섬기는 것 자체가 그들에겐 불명예나 다름없었으니. 하지만.

“날 배신한 거면 대가를 치러야지.”

녹스는 단호하게 속삭였다. 다른 귀족도 아닌 자신을 망가뜨린 사람에게 가야겠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다. 단, 선택이 본인의 몫인 만큼, 후회도 본인의 것일 테니까.

녹스는 잠들지 못하고 책상 의자에 앉아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들이 왜 자신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해.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헤아려 줄 필요가 없는 이유에 관해서도. 오랫동안 보아 왔던 인연이다. 단칼에 잘라 내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의 녹스로서는 그래야 했다.

아, 사는 게 괴롭다.

그는 버릇처럼 입 모양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잠시 잠든 에스테리온을 깨우는 것도 잊고 해가 뜰 때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천천히 빛이 밝아오더니 커튼 틈으로 햇볕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검은 눈동자가 빛을 받자 미약한 녹색 빛이 어렸다. 얼굴의 반을 밝힌 빛이 눈 부시지도 않은지 녹스는 떠오르는 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련을 둬서는 안 된다.

그는 단호하게 결심을 하고서 마음을 정리했다. 괜찮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쉬웠다.

그리고 이른 아침, 안젤라가 찾아왔다.

침구 정리를 하러 왔다는 핑계로 녹스의 방을 찾은 안젤라는 녹스를 배신하고 황제 편에 붙은 다섯 사람의 정보를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녹스가 예상하던 것과 일치했다. 녹스는 웃었고 안젤라는 그 얼굴을 보며 말했다.

“슬퍼 보이시네요.”

“그래 보이나?”

“조금요.”

“괜찮아. 이젠.”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안젤라는 여기가 마치 제 방인 양 침대 위에 편히 누워 있는 에스테리온을 깨웠다. 찰싹찰싹 맨몸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에스테리온이 스읍,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 해가 뜬 것을 보고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대 정리하게 나오세요.”

“아. 음. 그래….”

에스테리온은 입가를 가리고 하품하며 녹스에게 물었다.

“안녕히 주무신, 것 같진 않군요.”

“오늘은 보좌관 일만 봐. 하루 종일 기사단에 있을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에스테리온 론더가 방 밖으로 나가고 안젤라는 침실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녹스는 한참을 의자에 앉아 있다 일어선 후 침대 정리를 마친 안젤라에게 말했다.

“드레스 룸에 가면 제복이 하나 있을 거야.”

“예.”

“그걸 가져와.”

“네.”

안젤라는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해 보인 후 드레스 룸으로 가 검은 제복을 찾았다. 안젤라도 잘 알고 있는 옷이었다. 라이네리오 가문에서 정식 입단 한 기사들에게 맞춰 주는 정복. 안젤라는 그 제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이내 녹스의 방으로 가져갔다.

녹스는 목욕을 하러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안젤라는 조용히 제복을 방 한편에 걸어 두고선 방을 나왔다. 안젤라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녹스가 스스로 물기를 닦으며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안젤라가 걸어 두고 간 제복을 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래, 물러서 좋을 것은 없다. 과거의 자신은 무르고 멍청하고 어리석었지.

녹스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물러지고 싶지는 않았다. 녹스는 손을 뻗어 제복을 들었다. 그리고 마치 무슨 예식을 치르듯 천천히 옷을 걸치고 단추를 잠갔다. 단단한 몸에 정갈한 제복은 드디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찾은 양, 태가 살았다.

“…….”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던 녹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녹스가 밖으로 나서자 하인들이 뒤를 따랐다. 녹스는 뒤를 힐끔 보고는 그들에게 명령했다.

“오늘은 하루 종일 훈련장에 가 있을 테니 따로 찾지 마.”

“알겠습니다.”

“굳이 알려야 할 일이 생기거든, 에스테리온 론더를 시키고.”

“알겠습니다.”

녹스는 곧장 훈련장으로 향했고 하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녹스의 허리엔 이전에 황제가 하사한 검이 매달려 있었다. 자신의 검이 따로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것을 곁에 두고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자신이 이것으로 무얼 해냈는지 그리고 앞으로 더 무얼 벨 건지.

그렇게 훈련장에 도착한 녹스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대는 날 항상 놀라게 하는군.”

“그야, 아침 훈련 시간이지 않습니까.”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하지만 녹스는 훈련장을 꽉 메운 인원을 보고 잠시 머리를 짚었다. 이게 감동할 일이면 감동할 일이기는 해.

“그런데….”

“예.”

디미트리가 답했다.

“대체 어떻게 들어왔지?”

“담을 넘어서 들어왔습니다.”

“…….”

“안 들켰습니다.”

“…누구 아이디어지?”

“접니다.”

“……기사 증표는 여전히 가지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말해 놓을 테니 다음부터는 똑바로 정문으로 들어오도록.”

“예.”

“그리고 저택은 경비를 강화해야겠군.”

녹스는 머리를 짚곤 열을 맞추어 서 있는 그들의 앞에 섰다. 연단에 올라선 그에게 모든 시선이 쏠리자 녹스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들에게 약속할 수 있는 게 하나밖에 없군.”

녹스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싸늘하게 웃었다.

“날 선택한 그대들은 살아남을 거야.”

그 묘한 말에 술렁일 법도 하건만 그들은 입을 꽉 다문 채 녹스를 직시했다. 그들의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마냥 과거를 헛살지는 않은 게 아닐까. 삶이 온통 숨 막히다 생각했던 녹스는 오래간만에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그 단단한 눈빛들 사이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들을 읽어 냈다. 자신의 예상 안에 있던 사람이자 안젤라가 올린 서류에 있던 사람.

녹스는 일부러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웃었다.

“그대들은 라이네리오의 검이다.”

“예!”

한꺼번에 내뱉어지는 답은 쩌렁쩌렁했고, 그날 이후 라이네리오 기사단이 다시 창설되었다는 소식은 파도처럼 제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주인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진 기사단이라니요.”

누군가는 비웃었고.

“정식 기사단원 전원이 다 모였다더군요.”

“라이네리오 공작이 인품 하나는 훌륭했나 보죠?”

녹스에게 긍정적인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천천히 녹스는 다시금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어쩌면 조금은 빛이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녹스 라이네리오가 다시 공작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도 있다는 소식에 귀족들이 눈치를 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녹스가 어딜 바라보고 있는지. 어디까지 갈 예정인지.

* * *

시간은 흘러 몇 달이 지났고 그렇게 뜨거운 계절이 그들을 맞이했다.

황궁에서는 황제 즉위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치장을 시작했으며 다른 나라의 귀족과 왕족들을 초대하기 시작했다.

날은 점점 더 깊고 뜨거워졌다.

그리고 열대야가 찾아온 밤, 할리드는 고요히 제 저택의 지하에 갇혀 있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으르릉 컹!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적개심을 보이는 늑대들은 하나 같이 제국의 늑대들보다 훨씬 큰 몸집을 자랑하고 있었다.

덜컹, 덜컹!

열두 마리의 늑대들이 이를 드러낸 채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일단 구해 놓긴 했습니다만 어디에 쓰실 겁니까?”

할리드의 보좌관이 물었다. 할리드는 별다른 고민 없이 한 손에 들린 초대장을 뒤집어 보며 답했다.

“사냥제가 좀 시시할 것 같아서 말이야.”

할리드는 그렇게 말한 후 지하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황제에게 이번 사냥제는 아마 최악의 날로 기록될 것이다.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황제 즉위 1주년의 날이 밝았다.

황궁은 햇빛에 눈이 부실 만큼 화려했다. 외국의 사신들과 귀족들 그리고 왕족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펠티온이 황제로 즉위한 지 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인 만큼 그 어느 때보다도 성대하게 치러질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외국에서 온 귀빈들에게도 라이네리오 공작의 복권은 단연 화제였다.

그때 보았던 그 노예가 다시 복권되었다면서요. 그러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죠. 그러고 보니 그 공작이 황궁 소유의 다이아몬드를 일부 받기로 했다는 소문도 있어요. 아, 맞아. 그리고.

“기사단을 다시 만들었다면서요?”

“사업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랍니다.”

제국의 공작 자리는 그렇게 쉽고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노예까지 떨어졌던 자가 다시 제 자리로 오른다는 소식에 온 대륙이 발칵 뒤집혔던 거겠지. 하지만 그가 성공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면 어느 정도 노려봄 직한 먹잇감이 된다.

“그런데 그는 남색가가 아닌가요?”

“남색가라도 후사는 있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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