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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37화 (137/158)

제137화

펠티온은 녹스를 노려보았고 녹스는 그런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당신의 손을 타고 싶지 않으니 다른 사람을 불러오라는 그 태도는 너무나도 단호했다.

황제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녹스의 허락 없이 그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 쥐었다. 녹스가 와작 얼굴을 찡그렸다.

“내 몸에 손대지…!”

말라는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어디선가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빠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각, 사각, 풀을 헤치고 다가오는 것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펠티온은 자연스레 녹스를 제 뒤로 보내고 검을 치켜들었다.

녹스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앞을 보다가 이내 괜찮다는 듯 다치지 않은 손으로 황제를 제지하고 앞으로 나섰다.

“…할리드?”

황제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곧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할리드는 피투성이였다. 그가 다친 건 아닌 것 같고 남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듯했다.

녹스가 그 모습에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커다란 늑대가 있더군요.”

“한 마리가 아니라고?”

황제의 물음에 할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을 흠뻑 적신 피는 늑대의 것이 분명했다. 펠티온이 심각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할리드가 녹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 처리했습니다.”

녹스가 그 눈빛을 보고 설핏 웃었다. 펠티온의 시선을 피해 녹스의 미소를 훔쳐보는 것은 할리드에게 너무나 큰 자극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상이라도 주듯 녹스가 할리드에게 팔을 내밀었다.

“…팔이.”

“별것 아니야. 그런데 좀 어지러워.”

그 말에 주변을 살피던 펠티온의 시선이 녹스에게로 향했다.

할리드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다친 녹스의 팔을 바라보다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늑대를 보았다.

늑대에게 다친 것이 분명했다. 할리드가 성큼 다가가 그에게 손을 대려다 움찔하고 멈추었다. 펠티온과는 다르게.

녹스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혼자 말을 몰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도와주십시오.”

그 말에 할리드와 펠티온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할리드는 척 보기에도 덜덜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얼마든지.”

“…….”

반면에 펠티온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손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겠다던 그 녹스가 할리드의 손길은 허락했다는 사실 때문에. 할리드는 묘한 승리감에 취했다.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녹스의 손을 잡았다.

순간 녹스는 살짝 비틀거렸다. 피를 많이 흘려 어지러운 탓이었다. 할리드는 다급하게 그 몸을 받쳐 안았다. 할리드는 잠시 녹스의 몸을 꾹 끌어안았다가 천천히 제 말 옆으로 그를 이끌었다.

“올라타실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할리드는 녹스의 허리를 잡고 말 위로 휙 올려 태웠다. 녹스가 무사히 말에 안착하자 그 뒤로 할리드가 훌쩍 올라탔다. 펠티온은 그 모습을 보며 묘한 패배감에 젖었다.

녹스는 힘이 없는 듯 할리드의 가슴께에 등을 붙이고 힘을 뺐다. 할리드는 제게 기대 오는, 차가운 체온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치료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일단 막사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지.”

할리드와 녹스가 탄 말이 앞서 나가고 그 뒤를 펠티온이 따랐다. 펠티온의 시선은 딱 붙어 앉은 두 사람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둘은 무언가를 속살거렸다. 뭐라 하는지는 너무나 작아 잘 들리지 않았지만 바람결에 그들의 숨소리만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했다. 펠티온은 말고삐를 꽉 잡아 쥐었다. 나는 안 되지만 할리드 비아는 되는 이유가 뭐지?

언젠가 할리드가 했던 생각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 펠티온은 싸늘한 표정으로 두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두 남자는 펠티온의 시선을 느끼며 조용히 들켜선 안 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검을 쓴 흔적은?”

“없을 겁니다.”

“뭐, 있어도 상관은 없지만.”

녹스는 가물가물해져 가는 눈을 억지로 떴다. 할리드는 그가 흘린 피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좀 더 빠르게 말을 몰았다.

그렇게 세 사람이 막사로 돌아갔을 때, 이미 막사 근처는 갑작스레 나타난 늑대로 소란스러웠다.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이 숲에서 늑대라뇨?”

“수도에 있을 만한 늑대가 아닙니다. 이건 필시…!”

늑대를 멀리서 보고 도망친 자, 그들을 따라 막사로 돌아온 자들이 이미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떠들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황제의 얼굴이 보이자 귀족들이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늑대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펠티온에게 향했던 그들은 곧 할리드의 말 앞에 타고 있는 녹스를 바라보았다. 한쪽 팔이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서, 설마 늑대에게…!”

“치료사를 불러.”

할리드가 그 말을 끊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사냥 대회 때는 혹시 모를 부상을 위해 치료사를 항시 대기시켜 놓곤 했다. 녹스는 팔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이 점점 무뎌지는 걸 느꼈다. 슬슬 위험하겠는데. 녹스가 말에서 내리려 하자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에스테리온이 한달음에 다가왔다.

“공작님…!”

그가 다친 녹스의 팔을 보고 굳은 얼굴을 했다. 할리드가 녹스의 허리를 붙잡으려 했으나 녹스는 조용히 그 손을 물렸다. 움찔, 할리드가 멈추었다. 녹스는 할리드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팔을 뻗은 에스테리온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에서 내렸다. 할리드에게 이제 네 역할은 끝났다는 듯 다시 매정한 태도를 보였다. 할리드는 잠시나마 녹스가 제게 기대어 품에 남은 체온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무언가 커다란 것을 슥슥 끌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막사에 있던 사람들은 웅성거리다가 순간 몸을 굳혔다.

바스락.

풀숲을 헤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디미트리였다. 그는 한쪽 손에 커다란 늑대의 시신을 끌고 있었다.

“아, 다들 괜찮으십니까?”

“디미트리 경!”

“늑대를 잡아 오신 겁니까?”

“좀 위험하긴 했습니다만 다행히 다치진 않았습니다.”

펠티온의 얼굴이 굳어졌다. 수도에 있을 수 없는 맹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누군가 일부러 풀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황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유가 뭐지?

늑대는 훈련받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제 막 야생에서 잡아다 놓은 것 같았지. 그런 맹수를 풀어놓는다는 것은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공격당하게 두겠다는 것이다.

‘누가 다쳐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황제가 고민하는 사이 늑대를 본 사냥 참가자들이 헐레벌떡 막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황제는 시종을 불러 명령했다.

“황궁 기사단을 불러라.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기 전에 전부 치워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돌아온 자작 하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리를 후들후들 떨며 비틀비틀 뛰어왔다. 그는 곧장 황제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그가 단순히 간이 작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치켜든 귀족의 입에선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시, 시체가…!”

순간 황제는 미간을 확 찡그렸다. 설마 늑대에게 당한 귀족이 있단 말인가. 아니 없는 것이 이상했다. 참여자 중 그런 크기의 늑대를 홀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엘러딘 바이스 공작님께서 쓰러져 계신 걸 보았습니다!”

그 말에 황제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엘러딘 바이스. 그가 누구던가. 황제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곧 비틀거렸다. 시종이 그를 받치려 했지만 조금 더 빠른 손이 있었다. 할리드, 그였다.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대가 있었지. 할리드.”

황제는 조금 충격적이었는지 얼굴에서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할리드는 그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곧 그를 바로 일으켜 주곤 무릎 꿇은 귀족에게 물었다.

“엘러딘 바이스 공작으로 추측되는 시신이 어디쯤 있었지?”

“이, 이곳에서 북쪽으로 쭉 가시면 됩니다.”

“그렇군.”

할리드는 말도 타지 않고 검을 든 채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자신이 그를 죽인 곳으로.

무릎 높이까지 오는 나무를 손으로 치워 가며 도착한 곳에선 피비린내가 났다. 할리드는 엘러딘 바이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죽어 있는, 그의 뜯겨 나간 반쪽짜리 얼굴을.

그 옆엔 할리드가 죽인 늑대 하나가 누워 있었다. 그는 느리게 주변을 훑었다.

엘러딘의 시신은 늑대가 내장을 파먹은 건지 뱃가죽이 열려 시뻘겠고 팔다리는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그 근처가 온통 피로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곧 근처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가 더 있다.

척 보아도 먹다 만 모양이었으니까. 할리드는 검을 빼 들었다. 스릉, 그 작은 금속 소리에 반응한 늑대가 삽시에 달려들었다. 할리드는 어깨를 낮추고 검을 휘둘렀다. 제게로 뛰어드느라 드러난 아랫배를 갈랐다.

깨앵, 깽!

푸확,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갈라진 늑대의 배에서 핏덩어리가 터져 나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늑대가 신음을 흘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할리드는 그에게 다가가 벌어진 아가리에 칼을 밀어 넣었다. 켁, 소리와 함께 곧 늑대의 몸이 축 처졌다.

할리드는 엘러딘 바이스의 시신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던 눈빛이 도무지 잊히지 않는다.

‘당신…!’

늑대가 나타난 순간, 엘러딘 바이스의 목덜미를 틀어쥐어 달려드는 늑대의 아가리 속으로 처넣었다. 배신감이 넘실거리던 그 눈빛이 잊히질 않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그는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녹스가 잠시나마 기댔던 온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할리드는 저도 모르게 조그맣게 웃었다. 아. 그가 만족해하니 기뻤다. 징그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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