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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39화 (139/158)

제139화

녹스의 말에 에스테리온이 그 옆에서 차를 올리며 물었다.

“왜 황제 폐하가 공작 전하를 의심해야 한다는 겁니까?”

녹스는 에스테리온이 내려 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떫고 썼다. 이거나 저거나 내 차 취향은 영 맞추질 못하는군.

녹스는 쯧 혀를 차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녹스가 취향에 대해 전혀 말해 주지 않아 이것저것 보이는 대로 우려 올리던 에스테리온은 조용히 저 차를 목록에서 제외시켰다.

“그래야 할리드가 움직이기 편해지니까.”

“할리드 비아 공작이요?”

“내가 아무리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한다 해도 기본적으로 이어져 있는 믿음이 있을 거야.”

그들은 내가 모르는 시간을 공유했을 테니까. 녹스가 짧게 조소했다.

할리드를 어떻게 구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할리드 손에 쥐인 자신까지 공유할 정도의 관계다. 쉽게 틀어질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 믿음을 이용하는 거지.”

에스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 전하께 시선이 몰린 사이, 비아 공작이 움직이게 한다는 거군요.”

“잘 알아들어서 좋네.”

녹스가 기어코 찻잔을 죽 밀어 치웠다. 에스테리온이 풀 죽은 얼굴로 찻잔을 치웠다. 녹스는 그가 실망한 얼굴을 하든 말든 황제가 취할 행동에 대해 고민했다.

‘그래, 나에 대한 의심은 싹을 피웠을 테고.’

그럼 어떻게 나오려나. 녹스는 에스테리온을 시켜 안젤라를 불러들였다. 언제나처럼 발랄한 얼굴의 안젤라는 활짝 웃으며 그의 서재로 들어왔다.

“황제 폐하의 정보가 필요한 거죠?”

“징그럽단 말이야.”

“징그럽지 않으면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힘들어요.”

안젤라는 가볍게 대꾸한 후 물었다.

“황제의 움직임에 관한 모든 걸 바라시는 걸 거고.”

“그래.”

안젤라가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자신만만한 얼굴이기도 했다.

“꽤 많은 돈을 준비하셔야 할 거예요.”

“지금 내 돈 걱정을 하는 건가?”

“아하하. 그건 아니지만요.”

안젤라는 치맛자락을 들고 가볍게 인사한 뒤 자리를 나섰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시간 반 만에 나타나 속삭였다.

“황제 폐하께서 당신을 의심하세요. 늑대를 푼 인물로.”

예상하던 바다. 녹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젤라는 무언가 불퉁한 얼굴이 되더니 이내 집무 책상 위에 턱을 대고 앉아선 꿍얼거렸다.

“아이,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듯 행동하니까 김이 빠지잖아요.”

“그래서, 다음 정보는.”

“매정하셔라.”

안젤라는 훌쩍거리는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물증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택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안젤라는 마치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말했다.

“아마 이 저택에 있는 사용인 중 황제가 꽂은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증거를 찾으려고 할걸요?”

“별로 도움 되는 정보는 아니군.”

“그래도 황제 폐하의 정보를 이만큼 빼 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안젤라가 살살 눈웃음쳤다. 녹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눈싸움을 한참 동안 이어 갔다. 가운데 낀 에스테리온만 영문을 모를 뿐이었다.

“아이, 알겠어요.”

먼저 백기를 든 건 안젤라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쥐고 있으려 했던 패를 까 들었다. 원래는 돈을 더 받고 풀려고 했는데 훌쩍.

그녀는 또 한 번 눈물 훔치는 척을 했다. 이젠 좀 가증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황제가….”

안젤라가 악마처럼 웃으며 속삭였다.

“황궁 지하에 방을 꾸민대요.”

“…….”

녹스의 얼굴이 굳었으나 안젤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실실대며 그에게 물었다.

“그 방이 누구 방일지, 궁금하지 않아요?”

녹스는 대답이 없었고 안젤라는 처음부터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는 듯 다시 인사를 올리고 사라졌다.

적막, 방 안엔 그것뿐이었다. 에스테리온은 미간을 찡그렸다. 황제가 지하에 방을 만들고 있다고.

안젤라의 태도와 녹스의 반응을 보아선 그 방이 누구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녹스가 옆에서 허,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날 지하 방에 처넣겠다.”

녹스는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고작 하룻밤만 달라며 매달릴 땐 언제고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지. 녹스는 종을 흔들었다. 하인 하나가 공손히 들어왔고 녹스는 차갑게 명령했다.

“집사를 불러와.”

녹스의 차가운 명령에 하인이 허겁지겁 방을 나섰다.

공작님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소식에 집사는 한달음에 녹스의 방으로 달려왔다. 그는 호흡을 다스리며 가볍게 노크한 후 안으로 들어섰다.

녹스는 책상에 팔꿈치를 얹은 채 손에 턱을 괴고 있었다. 시선은 못마땅한 것을 보는 듯하나 참아 주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네 주인에게 전해.”

“…예.”

“시일은 오늘 밤.”

“…….”

“다음은 카일론.”

녹스의 입에서 황제파의 주축이 되는 귀족 중 하나의 이름이 발음되었다.

집사는 그 짤막한 이름만을 할리드에게 전했다.

푸드득. 새가 날아올랐다.

할리드는 편지를 확인한 즉시 누구도 보지 못하게 태운 다음, 검을 쥐었다.

녹스가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우둔한 그로서는 짐작할 길이 없었다. 아니, 그냥 짐작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할리드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꾹 쥐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황제의 그 속삭임에 넘어간 자신의 목을 베고 싶었다.

고작 그가 사랑스럽다는 사실 하나를 인정하지 못해 황제에게 그 몸뚱어리를 가져다 바친 꼴이 되었다.

할리드는 초점 없는 어두운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은 계속해서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할리드는 녹스에게 자신을 바친 후 황제의 행동에 귀를 기울였다.

황제의 곁에 있는 할리드는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황제의 행동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하에 방을 만든다고?”

아, 폐하. 지하의 방은 어떤 곳인지요.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요.

할리드는 웃지 않았다. 조금도 웃기지 않았으니까.

“내가 한 일은 내가 거둬야지.”

할리드는 로브를 눌러쓴 채 오로지 검 하나만을 쥐고 자신의 방 테라스에서 뛰어내렸다.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설령 저택의 누군가 보았더라도 모르는 척했을 것이다.

그가 공작저를 벗어났을 때, 하늘에서 하나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떨어지던 비는 곧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고 눈앞이 부옇게 번질 정도로 쏟아져 내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비를 피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하늘은 더욱더 어두컴컴해졌다. 가문의 사용인들도 바깥에 있다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그렇게 비를 피하는 가운데 라이네리오 가문의 주인, 녹스 라이네리오가 외출을 하겠다며 나섰다.

이렇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빗줄기를 뚫고 대체 어디로. 사용인들은 귀를 기울이고 눈알을 돌려 댔다. 하지만.

“아무도 따라오지 마.”

평소 그렇게 붙이고 다니는 에스테리온도 없이 녹스는 홀로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했다.

사용인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녹스는 카일론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를 세워 놓곤 하늘을 바라보았다.

할리드 비아라는 패가 어디까지 해 줄지를 가늠했다.

우르릉, 쾅! 비는 더욱더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고 이내 번개마저 내리꽂혔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다렸을까.

어두워졌던 저택의 불이 순식간에 켜지며 소란스러움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제법 거리가 있는 곳에 마차를 세웠음에도 그 혼란이 느껴졌다. 녹스는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은 채 마부에게 명령했다.

“저택으로 돌아가지.”

* * *

카일론 베네딕트.

그는 공작 위에 오른 황제의 최측근 할리드 비아와 엘러딘 바이스에 비할 바는 아니나 황제가 제2황자일 적부터 오래도록 곁을 지킨 충신이었다.

백작 위에서 후작 위로 오른 그는 황제가 즉위한 뒤, 말 그대로 걱정할 것 없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얼마 전 불미스러운 일이 터졌다.

“엘러딘 바이스 공작님께서 돌아가시다니.”

심지어 황궁에서 주최한 사냥제에서 벌어진 일이라 끈질기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늑대에게 물려 죽은 귀족들의 가족은 알게 모르게 황제의 탓을 했다.

황제가 피의 즉위식을 치른 사람이 아니었다면 진즉 말이 나왔을 것이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눈치를 보고 있지만 황제에 대한 불만이 귀족들 사이에 은근히 깔려 있었다.

카일론은 자신의 방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지금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이 무어가 있을까.

“늑대를 풀어 놓은 자가 누군지 확실히 알아내야 할 것 같은데….”

원망의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는 비가 내리는 테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르릉,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번쩍, 쾅! 저택 가까이 번개가 내려친 듯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때, 테라스 문 밖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카일론의 입이 벌어졌다. 형형한 안광이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서도 푸르게 빛났다.

“누, 누구…!”

카일론은 다급히 자신의 호위기사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곧 거대한 그림자의 남자가 입술을 움직이는 게 먼저였다.

“화, 황제….”

‘황제 폐하의 명령.’

그 입술 모양을 알아들은 카일론은 제 입을 막았다. 천천히 로브를 쓴 커다란 몸이 테라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커다란 몸집이 보였다.

카일론은 왠지 그 덩치가 익숙하다 느꼈다. 그러고 보니 황제 곁에 선 커다란 사내. 아, 그래.

“하, 할리드 비아 공작. 대체 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카일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황제 폐하의 명령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비밀리에 떨어진 명령입니까?”

그 물음에 할리드는 몇 초간의 침묵 끝에 답했다.

“그래.”

카일론은 뒤를 돌았다. 일단 닦을 만한 것을 내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몰랐다.

등 뒤의 할리드가 칼을 뽑아 드는 것을.

다시 한번, 쿠구궁, 쾅!

번개가 지상에 내리꽂혔다. 등을 찔려 그대로 폐가 찢어진 카일론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을 기는 자의 눈에서 배신감이 읽혔다.

할리드는 비와 함께 섞여 나오는 식은땀을 느끼며 한 번 더 칼을 들었다.

푹, 끄득.

완벽한 살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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