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40화 (140/158)

제140화

카펫으로 피가 흘렀다. 깨진 머리 밖으로 형체를 잃은 눈알이 흘러내렸다. 할리드는 그것을 무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함께했던 전우이자 동료였다. 비록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의 등을 믿고 맡길 정도는 되었다. 그런 그를 지금 자신이 살해했다. 할리드는 손안을 가득 채운 것이 빗물인지 식은땀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확실한 건 하나였다.

배신의 고통보다 전우를 죽였다는 죄책감보다 녹스 라이네리오의 잘했다는 말 한마디가 제겐 더 무겁다는 것. 할리드는 차마 웃지 못했다. 배신을 등에 업고 얻는 대가가 너무나 달았다.

쏴아아-.

비는 멈출 기미 없이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할리드는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테라스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가 정원에 내려앉아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담을 넘을 무렵. 빗소리 사이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할리드는 로브를 더 푹 뒤집어쓰고 비가 내리는 거리를 달렸다. 뺨을 때리는 빗줄기가 숨을 막아 호흡이 가팔라졌다. 비가 내려 낮아진 온도에도 심장이 펄떡거리며 열기를 내뿜었다.

“하아, 하….”

할리드는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놓고 한참을 뛰다 보니 자신이 어디 서 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은 비아 저택이 아닌 라이네리오의 저택이었다. 할리드는 숨을 헐떡이며 멍청하게 저택 앞에 서 있었다. 빗물이 너무나 거세 지붕이 있는 곳에 서 있던 경비병이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할리드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여기 있는 걸 누군가 본다면 녹스가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그는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아름답게 구부러져 있는 쇠창살 앞에 섰다. 저택 안쪽이 보였다. 할리드는 문득 과거를 떠올려 냈다.

어릴 적 자신이 버려지고 우연히 녹스를 보았던 곳이었다. 다른 하인에게 웃어 주는 걸 보며, 자신은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냐고 그를 저주하고 원망했던 자리이다.

할리드는 그 기억을 떨쳐 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쇠창살 너머, 창문 안쪽으로 녹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면. 할리드는 목구멍이 꽉 막히는 걸 느꼈다.

에스테리온 론더가 그의 젖은 로브를 받아 들었다. 녹스는 끝이 살짝 젖은 머리를 한 채 에스테리온을 바라보며 무언가 이야기했다. 그에 에스테리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가 손짓하면 그는 가까이서 이야기를 듣기 위해 녹스의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귓가와 입이 가까워지면 녹스는 무언가를 속삭이며 에스테리온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할리드는 그 모든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게 어떤 모습이든 결국은 녹스였으니까.

녹스에게 자신을 바친 것은 자신의 의지였다. 자신은 녹스의 패, 그 이상의 것이 되려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내가 망가뜨리고 부서뜨린 너에 대한 마지막 양심이었다.

키스할 수 없어도 괜찮아.

할리드는 스스로 되뇌면서도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빗물 사이로 옅은 핏물이 비쳤다. 녹스는 에스테리온에게 가 봐도 좋다는 듯 손짓을 했다. 할리드는 푹 눌러쓴 로브 아래로 보이는 녹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 안에 담기 위해 애썼다.

녹스가 창가에서 사라지기 전에 조금만, 조금만 더.

끼익-.

창문이 열렸다. 마치 누군가가 할리드의 소원을 들은 것과 같이. 녹스는 비가 오는 창가에 서서 문을 열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할리드는 잠시 거기 못 박힌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녹스의 눈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와 다르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녹스는 허리를 숙여 창가에 팔꿈치를 얹고 제게 속삭였다.

할리드는 자그맣게 움직이는 입술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읽었다.

‘이리 와.’

할리드는 자신이 잠시 환각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녹스는 여전히 창가에서 그를 기다리듯 기대선 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할리드는 우아하게 구부러져 모양을 낸 쇠창살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 오로지 녹스 하나만을 보며 그것을 훌쩍 뛰어넘었다. 녹스가 쯧 혀를 찼다. 할리드 정도가 마음먹으면 뛰어넘을 수 없는 게 뭐 있겠냐마는.

할리드가 라이네리오의 정원에 발을 들였다. 녹스는 마치 그가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양 그를 향해 손짓했다. 할리드는 마치 감히 신께 다가가지 못하는 신자처럼 주춤거렸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녹스의 목소리는 빗소리가 무색하게도 또렷하게 들렸다. 할리드는 허벅지에 힘을 주고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창문 바로 앞에 섰다. 저택의 바닥이 조금 더 높은지 녹스의 눈높이가 살짝 더 높았다.

“잘했어?”

“네, 예….”

“저번에 물어보지 못한 건데.”

녹스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물었다.

“배신자가 된 기분은 어때?”

“…….”

“망가져 가는 기분이 어때.”

“나는….”

할리드가 초점 없는 푸른 눈을 들어 녹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초점이 흐릿함에도 푸른 안광은 괴기했다. 녹스는 그 눈을 보며 손을 뻗었다. 녹스의 손가락이 가볍게 할리드의 턱 아래를 쓸었다. 할리드는 그 손길에 한숨을 터뜨리듯 답했다.

“기껍습니다….”

“아, 하하.”

녹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눈매를 휘며 입가를 가렸다. 할리드는 그 얼굴에서 차마 눈을 떼지 못했다. 녹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할리드는 꼼짝할 수 없었다.

녹스 라이네리오가 자신에게 다가올 적에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빗물과 핏물이 흘러내리는 입술 위로 녹스의 입술이 겹쳤다.

방금 내달리며 뿜어내던 열기는 어딜 갔는지. 녹스의 입술이 너무나 뜨거웠다. 녹스의 뜨거운 혀가 상처가 난 입술을 핥았고 할리드는 입술을 벌렸다. 녹스 혀는 할리드의 입술 안으로 침범해 가볍게 그의 혀끝을 건드렸다. 그리고 할리드가 이성을 놓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할리드는 녹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녹스의 머리를 두 손으로 그러쥐고 고개를 틀어 그의 입 안으로 깊게 혀를 밀어 넣었다. 입천장을 쓸고 오목하게 들어가는 혀 가운데를 문지르고 제게로 넘어오는 타액을 삼켰다.

하아, 입술 새로 잠시 숨이 샜다. 할리드는 그 틈마저도 아깝다는 듯 입술을 겹쳤다. 녹스는 곧 할리드의 혀를 가볍게 깨물었다. 아, 허락해 준 시간이 끝났다. 할리드는 그것을 기민하게 눈치채고 입술을 떼어 냈다.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한 녹스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

녹스는 그를 지배하듯 보았다.

“내가 네게 키스할 이유가 생겼네.”

할리드는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코와 입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숨이 터지는 경험을 했다. 마치 물 안의 물고기처럼. 녹스가 그의 젖은 로브를 가볍게 들췄다.

“그러니 그 기회를 잃지 않게 앞으로도 잘해야지.”

할리드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녹스는 그의 로브를 다시 푹 눌러 씌워 준 다음,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녹스가 제게 등을 보이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지만 할리드는 그것마저도 아쉬워 한참 동안 그 창문 아래 서 있었다.

그가 사라진 것은 빗줄기가 아주 조금 약해졌을 때. 마치 그 자리에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녹스는 위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할리드가 떠나는 모습을 전부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젠 입에 맞는 차를 내올 자신이 없어진 에스테리온이 아예 술을 내왔다.

“차는 포기했나?”

“그렇습니다.”

“너무 당당한데.”

“솔직히 맞출 자신이 없습니다.”

녹스는 얼음이 담긴 위스키를 가볍게 기울였다. 비가 오는 날에 썩 어울리는 술은 아니었다. 하지만 별말 없이 술을 가볍게 넘긴 녹스는 비 오는 수도를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쯤부터 우기였나.”

녹스는 빈 잔을 내려다보았다. 그 독한 걸 쭉 넘긴 걸 본 에스테리온은 일부러 다시 잔을 채우지 않았다.

한동안은 제 뜻대로 상황이 돌아갈 것이다. 할리드 비아는 의심받지 않을 것이고 의심의 시선은 모두 자신에게 모일 것이다.

황제가 자신을 의심한다.

그가 자신을 경계한다.

그렇게 너와 나, 선을 그으면 그을수록 녹스의 패는 쓸 만해진다.

네 심장을 꿰뚫을 검이 네 품 안에 있단다. 녹스는 술잔을 에스테리온에게 넘기고 침대로 향했다.

다음 날 아침, 카일론의 사망 소식이 수도 내에 멀리 퍼졌다. 귀족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사냥제에서 일어난 비극에 이어 다시 한번 황제파의 귀족에게 일어난 암살 사건. 우연이 아니다. 우연일 수 없다.

사람들은 시선을 모았다. 누구에게?

녹스 라이네리오에게. 이제 겨우 형식을 갖춘 귀족파의 기둥이 되는 자. 황제와 할리드 비아에게 원한을 가진 자. 그 누구보다도 그들을 증오하고 미워하는 자.

하지만 녹스 라이네리오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제국의 소식을 전혀 모르는 사람인 양 행동했다.

누군가 연회에 참석한 녹스 라이네리오에게 용기 내어 다가갔다.

“이번에 카일론 베네딕트 후작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에 가실 생각이신가요?”

“아, 저런.”

녹스가 느른하게 답했다.

“그런 소식이 있었군요.”

“…예, 연이어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수도가 떠들썩하답니다.”

귀족은 녹스의 태도가 거짓이라 짐작하면서도 그의 얼굴이 너무나 태연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몰랐던 사람처럼. 관심이라곤 한 톨도 없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의심이 갔다. 그 놀라운 소식에도 너무나 태연해 보였기에.

“훌륭한 분이신데 너무 일찍 가셨군요.”

“…그렇지요.”

“장례식이라.”

녹스가 잠시 시선을 멀리 던졌다.

“한 번 방문하긴 해야겠군요.”

녹스는 그렇게 연회를 떠났다. 그리고 그 귀족의 말대로 곧장 카일론 베네딕트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탁-.

라이네리오의 문장이 박힌 마차가 베네딕트 후작저에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기어코 마차에서 내린 녹스를 보았을 때 소란스러움은 더욱 커졌다.

녹스는 앞을 보고 걸었다. 언젠가 노예로 걷던 때보다도 노골적인 시선이 그의 뒤를 따랐다.

모두가 의심하고 있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를. 녹스는 느긋하게 걸어 관이 있는 곳까지 향했다. 그리고 그와 마주쳤다.

“……라이네리오 공작.”

“이런 곳에서 뵙는군요. 폐하.”

황제, 펠티온.

녹스는 아주 오래간만에 그를 향해 웃을 수 있었다. 일그러져 크게 떠진 그의 눈매가 너무나도 유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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