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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41화 (141/158)

제141화

자신을 의심하는 눈초리. 경계하는 시선. 드디어 같은 선에 서 있는 대등한 상대를 대하는 듯한 태도.

녹스 라이네리오는 그를 향해 마음껏 웃었다. 그의 미소를 보고 황제가 얼굴을 굳혔다.

모르겠지. 내 웃음이 뭘 의미하는 건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재고 있을 것이다.

녹스는 그에게 친절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조용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관 안을 바라보았다.

“이쪽도 시신이 영,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나 봅니다.”

“…지독했지.”

녹스는 그저 묘한 미소를 유지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황제파 귀족의 장례식에 귀족파의 중심 권력이 서 있는 것은 기묘한 그림이었다.

모두가 녹스 라이네리오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언제든 목을 물어뜯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어린 양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숨을 채어갈 수 있는 맹수로 인식이 된 것이다.

녹스는 국화 한 송이를 관 안에 내려놓았다. 천천히 허리를 구부리고 관 안에 있는 고인에게 무언가를 속삭인다. 가까이 선 황제만이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곧 또 누군가….’

알 수 없는 의미의 속삭임. 펠티온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녹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허리를 펴고 관을 뉜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마치 칼날이 된 듯하다.

반역자 가문이라는 누명을 쓰고 노예로 전락했던 남자. 다시 공작이란 지위를 쟁취했지만, 그저 이름뿐.

다시는 대귀족으로서 평가받지 못하리라 여겼던 남자가 이제 모두의 경계를 받고 있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만족스럽게 그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장례식장을 나섰다.

침묵, 침묵이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호흡마저 죽여 버린 듯한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이럴 때면 꼭 제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이 있었다.

“라이네리오 공작.”

녹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대가 약속을 지킬 날을 기다리고 있어.”

황제가 눈앞에서 발톱을 드러내며 제 속살을 할퀴었다. 이런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놓고 이러시겠다.

“부디―.”

녹스가 싸늘한 얼굴로 답했다.

“그전까지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군요.”

황제가 먼저 대놓고 속을 긁었으니 녹스 또한 그대로 돌려줘야 함이 옳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의심은 커질 테고.

‘나를 감시하는 데 열을 올리겠지.’

침묵이 날카롭게 장례식장의 공기를 찔렀다. 어쩐지 한기가 도는 듯했다. 그가 탄 마차가 떠날 때까지. 마치 죽은 자가 머무르다 간 것처럼.

* * *

우기가 시작되고 수도의 하늘은 항상 회색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이전보다 비가 내리는 일이 잦아졌다. 그것도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지는 지독한 비가. 그리고 그때마다 황제 편에 섰던 귀족이 죽어 나갔다.

“꺄아아악-!”

이번에 또 한 명의 백작이 죽었다.

검으로 무자비하게 난도질당한 시신이 백작의 방 침대에서 발견되었다.

최초 발견자는 백작의 하녀였다. 하녀는 테라스에서부터 시작된 발자국을 보았노라 증언했다.

후작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암살자가 분명했다. 그것도 비명을 지르기 전에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실력자. 황제의 측근들은 황제를 찾아와 같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라이네리오 공작이 분명합니다.”

“그가 아닐 리가 없습니다.”

“폐하,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펠티온은 자신을 찾는 측근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모여 있는 측근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에 띄던 셋이 죽어 버리자 어쩐지 회의실이 텅 비어 보였다.

“심증뿐이라 그런 겁니까?”

“아니.”

황제가 대꾸했다. 그러자 황제파 귀족들의 얼굴빛이 밝아졌다.

황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녹스에게 사람을 붙여 놓은 지는 오래되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녹스가 황제파의 누군가가 살해당하는 밤마다 마부 한 명만을 데리고 죽은 자의 저택 근처에 한참 동안 마차를 세워 놓는다는 사실을.

‘다만 걸리는 점은….’

녹스의 신경이 예민해 아주 가까이서 감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분명 마차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펠티온은 눈가를 찡그렸다.

‘누군가 대신하고 있나?’

아니면 단순하게 너무 멀리서 감시한 탓에 마차에 오르내리는 것을 미처 포착하지 못한 걸 수도 있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아직 제 기량을 전부 되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몸을 숨기고 사람 하나를 소리 없이 죽일 수 있는 실력자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어떤 증거든 간에 녹스 라이네리오를 잡아넣을 수 있다면 이 살인은 멈출 겁니다.”

회의실에 자리한 황제파 귀족 하나가 말했다.

펠티온은 가만히 제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소파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할리드와 눈이 마주쳤다.

황제는 그를 오만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할리드 비아.”

“…제대로 된 물증 없이는 잡아들이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만.”

그 말을 들은 황제가 다시 물었다.

“그대의 마음은 지금 어디를 향해 있지?”

그러자 할리드가 서늘한 푸른 눈으로 황제에게 약간은 쏘아붙이는 듯 답했다.

“폐하께서 계신 곳입니다.”

펠티온의 얼굴이 허를 찔렸다는 듯 일그러졌다. 내가 있는 곳이라.

그러나 정작 펠티온은 제 마음이 어디로 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식은 당연히 있었다.

그런데 욕망, 그 지저분하고 추한 욕망이 도저히 갈무리되지 않았다.

펠티온은 자신이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던 지하 방을 떠올렸다. 그것은 녹스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다.

언제든 너를 다시 끌어내릴 준비가 되어 있으니 적당히, 지금의 거리를 유지하고 살자는, 더 이상의 변화나 복수 따윈 생각하지 말라는 그에게 전하는 경고.

펠티온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경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녹스가 선을 넘기를 바라는 마음도 존재했다.

네가 다시 한번 추락하길. 이번엔 내 품으로 떨어지길. 그 넓디넓은 지하 방에 널 처박아 놓고 오로지 나만을 기다리게 만들고 싶다는 그 득실득실한 욕망.

펠티온은 이성과 욕망 사이에서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였다. 이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었다. 계속 갈팡질팡 고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를 향한 죄책감과 욕망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펠티온은 결국 명령했다.

“시종장.”

“예.”

“녹스 라이네리오의 사건 당시 동선을 가지고 와.”

“알겠습니다.”

시종장은 녹스 라이네리오를 직접 감시하던 자가 작성한 그의 동선과 그 근방에서 라이네리오 가문의 마차를 발견했다는 목격서를 가지고 왔다. 제법 두툼한 두께였다.

황제파 귀족들은 황제가 내어 준 자료를 보고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구금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폐하.”

“그렇겠지.”

“하지만 빠져나가겠죠.”

할리드 비아가 말했다. 그 서슬 퍼런 눈빛에 펠티온이 입을 다물었다.

할리드의 말에 모두가 한 가지를 떠올렸다. 녹스 라이네리오가 가지고 있는 면제권.

그 면제권이 아직 두 개나 남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하지만 일단 진행해 보자는 듯 말을 이었다.

“면제권을 사용하여 구금을 푼다고 하더라도 잠시 억제는 될 겁니다. 억제되었을 때 새로운 증거를 찾아 다시 집어넣으면….”

펠티온이 할리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할리드는 그의 시선을 받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파에서 서서히 일어나는 거대한 몸이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황제파 귀족들이 고개를 돌렸다.

“당장이라도 분부 내려 주십시오. 라이네리오 공작을 구금하라 명령만 내리신다면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그래.”

나서겠지. 아무렴, 누구 일인데. 미묘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두 남자의 관계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웠다.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정말 피를 나눈 형제보다 진하게 엮인 의형제 사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볼 수 있는 건. 그에 대한 욕망. 그것밖에 없었다.

불꽃을 바라보는 자의 눈엔 불꽃만 비치듯 그들의 눈 안엔 욕망만이 가득하여 서로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할리드 비아.”

“예. 폐하.”

“지금부로 녹스 라이네리오를 귀족 살해자로 보고 구금을 명한다.”

“알겠습니다.”

“장소는….”

황제가 말끝을 늘였다.

“황궁으로 하지.”

보통 고위 귀족은 확실히 죄가 인정되기 전까지는 본인의 저택에 구금되는 것이 대부분이나 황제는 강수를 두었다.

할리드 비아는 알 수 없는 얼굴로 펠티온을 바라보다 그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그가 조용히 자리를 뜨자 황제파 귀족들이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녹스 라이네리오가 이번 구속 명령을 면제권으로 파훼할 것이 뻔하니 다음 수를 준비해 두어야 했다.

황제는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귀족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이내 창밖으로 보이는 비아 공작저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마차는 속도를 내며 사라졌고 황제는 앞으로 그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네가 어떻게 할까. 할리드 비아.’

황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자신처럼 녹스에 대한 욕망을 접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궁금했다. 자신과 똑같이 그를 다시 추락시켜 억지로 날개를 꺾을지 아니면 그를 지키는 방법을 택할지.

“넌 날 닮았지.”

펠티온이 속삭였다. 아무도 듣지 못한 속삭임이었다. 황제는 더 이상 할리드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과거를 알았고 예전부터 이어지던 그 지독한 욕망을 알았다.

너 또한 그의 추락을 바라겠지. 나처럼.

황제는 창문의 커튼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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