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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42화 (142/158)

제142화

할리드 비아는 황제의 명령서를 가지고 곧장 라이네리오 공작가로 향했다. 보통 이런 경우 반항이 있을 걸 예상해 기사단을 대동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그는 ‘할리드 비아’였다.

검으로는 이 제국에 당해 낼 자가 없다는 그. 그것은 일종의 자신감처럼 보였다.

하지만 할리드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녹스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먼저 면제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말하지 않았어도 모두가 알았을 일. 녹스가 원하는 것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이 무리 안에서 의심받지 않고 최대한 오래 있는 것이 중요했다.

녹스는 아마 예상했다는 듯 굴 것이다. 그리고 순순히 황궁으로 연행되었다가 면제권을 써서 나오겠지.

이것은 황제파 측과 녹스 측의 정치적 쇼였다. 황제파는 범인이 라이네리오 공작이라는 낙인을 찍고, 라이네리오는 그 낙인을 피해 유유히 황궁을 나오는 것. 혹은.

‘절대적인 황족의 명령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비아 공작가의 마차가 라이네리오 저택 앞에 섰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소란스러웠다.

할리드가 왔다는 소식에 집사는 한달음에 내려왔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린 다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라이네리오 공작을 직접 보고 이야기하지.”

그 말에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집사가 서둘러 보고를 위해 녹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사가 다급히 노크하자 녹스는 이미 바깥 상황을 다 지켜보고 있었는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비아 공작이 왔군.”

“예, 그런데 분위기가….”

“황제의 명령이라도 들고 왔나 보지.”

집사는 알 도리가 없어 바로 대답하지 못했고 녹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문밖으로 향했다.

할리드 비아가 온 것을 알았는지 보좌관 집무실에서 벗어나 녹스의 집무실로 오고 있는 에스테리온이 보였다.

“공작님.”

“괜찮아.”

녹스가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연락도 없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비아 공작의 행동에 당황한 에스테리온은 녹스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녹스는 설핏 웃으며 그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다녀올 테니 밀린 일 좀 가지고 가서 처리해.”

“…이렇게 일을 떠넘기시는군요.”

“그러라고 뽑은 보좌관이야.”

에스테리온은 녹스의 태도에 안심이 되었는지 그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비아 공작께서 왜 오신 겁니까?”

“슬슬 황궁에서 부를 때가 되긴 했어.”

“예?”

“황제파가 그렇게 죽어 나갔는데 이제야 부른 게 이상한 거지.”

에스테리온은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녹스는 저를 뒤따라오는 에스테리온에게 여상하게 말했다.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야.”

아, 이건 선 긋기다.

에스테리온은 생각했다. 자신에게 허락한 선이 있는 것처럼 이건 비아 공작에게만 허락한 선이다. 녹스의 허락이 없으면 함부로 들어서지 못하는.

“…알겠습니다.”

녹스와 에스테리온 그리고 집사는 1층 홀에서 기다리고 있는 할리드 비아와 마주했다.

할리드는 녹스가 나타난 순간부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시선이 얼마나 집요한지 에스테리온은 잠시 그의 시선을 몸으로 막아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을 해결해 주듯 녹스가 먼저 나서서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비아 공작.”

“황제 폐하의 구금 명령이 있었네.”

“구금 명령이라.”

녹스가 할리드를 바라보며 묘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리 직접 오신 걸 보면….”

녹스가 손을 뻗어 손끝으로 느릿하게 할리드의 심장께를 툭 누르고선 아래로 쓸어내렸다.

“제 저택은 아닌가 봅니다.”

할리드가 황제의 칙서를 내밀었다. 그리고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어차피 서로 다 아는 판이었기 때문에 허례허식은 필요 없었다.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 그대를 귀족 살해 용의자로 지목한다. 이 시간부로 그대는 황궁으로 이송될 것이며….”

녹스는 굉장히 흥미 없다는 얼굴로 할리드가 의무적으로 읊고 있는 이야기를 듣다 이내 못 들어 주겠다는 듯 그를 지나쳤다.

비아 공작가의 마차에 올라타기 위해서였다.

할리드는 그 뒷모습을 보다 이내 의미 없다고 여겼는지 녹스의 뒤를 따랐다. 집사들과 사용인들이 그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에스테리온은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녹스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침착한 태도는 그가 여기까지 예상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묘하게….

“공작님.”

에스테리온의 목소리에 녹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심하십시오.”

대답은 없었지만 에스테리온은 녹스가 제 말을 들었다는 걸 잘 알았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그렇게 할리드 비아와 함께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할리드와 녹스는 마주 보고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오로지 침묵만이 가득했다. 녹스는 황제의 집무실에서 벌어진 일들을 대충 알 것 같았고 할리드도 특별하게 보고할 것이 없었다.

녹스는 다리를 꼬고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할리드는 골몰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볼 수 있을 때 마음껏 봐 두어야 했으니까. 녹스가 손가락으로 턱 끝을 두드렸다.

‘남들 보여주기식 쇼 하나 하자고 불려 다니는 건 썩 유쾌하진 않네.’

하지만 녹스 자신에게도 필요한 쇼였다. 내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마차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황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황궁에 도착했을 때, 황제의 명령으로 도착한 황궁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다만, 여기서 조금 비틀린 점은….

“폐하께선 아직 회의 중이십니다.”

아무래도 녹스 라이네리오의 다음 걸음을 멈추게 할 뾰족한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할리드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이를 본 녹스가 일일이 반응하지 말라는 듯 그의 팔꿈치를 툭 쳤다.

녹스의 죄목은 귀족 살해. 마차 앞에 모여 있는 황궁 기사. 다음 명령의 부재. 그렇다면 용의자로 취급되는 녹스 라이네리오는 당연히 지하 감옥으로 가게 된다.

흐음, 드잡이질을 하시려는 걸까. 이제 와서. 아니면 그냥 실수인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자신이 지하 감옥에 들어가든, 황제가 만든다는 지하 방에 가둬지든 어차피 자신이 다시 제 발로 나오게 될 거란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난 폐하께 가 보지.”

할리드가 말했다. 이는 녹스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할리드는 기사들에게 녹스를 넘긴 후 빠른 걸음으로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녹스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할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걸음을 옮겼다.

예전처럼 제 팔 따위를 억지로 잡아당기는 짓 따위는 하지 못한다. 용의자이긴 하나 죄인으로 확실히 낙인이 찍히기 전까지는 대귀족이었다. 기사들은 불편한 기색을 애써 지우며 그를 지하 감옥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하나의 실수가 발생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정확히 할리드와 펠티온을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녹스 라이네리오는 아주 당연하고 간단한 걸 놓쳐 버렸다. 그건.

“…….”

자기 자신을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지옥으로 들어가는 듯 어두컴컴한 아가리를 벌린 지하 감옥 입구 앞에서 녹스는 숨이 턱 하니 막히는 걸 느꼈다.

허, 녹스는 어이가 없어서 헛숨을 들이켰다.

* * *

할리드는 황제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리는 문에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문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황제도 끼어 있었다.

‘일일이 반응하지 마.’

할리드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그렇게 자신을 진정시키고 난 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이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그는 어디로 갔습니까.”

“따로 명하신 게 없으니 당연히….”

할리드가 펠티온을 바라보았다.

“지하 감옥으로 갔습니다.”

“…….”

펠티온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쇼였기에 펠티온은 녹스를 사사롭게 괴롭힐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를.”

그때 황제파 귀족 중 하나가 공손히 말을 올렸다.

“회의가 끝날 때까진 잠시 내버려 두시지요.”

“……이유는?”

“유치한 드잡이질일 뿐입니다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시면 오만함이 하늘을 찌를 겁니다.”

할리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펠티온도 기색은 숨겼지만 난감함을 느꼈다. 지금 녹스 라이네리오는 어느 모로 보든 황제파의 적이다.

그런 그에게 이런 식으로 작은 모욕을 주자는 말은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 나서서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시선을 주고받았다. 할리드는 이 회의가 괜한 시간 끌기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초조했다. 할리드는 자신이 왜 이렇게 초조한지는 모르겠지만 기묘한 불안감이 발목을 타고 오르는 듯했다.

황제파 귀족들이 쓸데없는 말을 떠들고 황제가 그 의미 없는 말들을 흘리고 있는 사이, 할리드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이유 모를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어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노크 소리의 간격이 상당히 짧았다. 할리드는 펠티온이 대답도 하기 전에 먼저 문을 열었다. 불안감이 눈앞에 들이닥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지?”

할리드가 싸늘하게 묻자 녹스를 지하 감옥으로 데려갔던 기사 중 하나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빠르게 말했다.

“라이네리오 공작 전하의 상태가 이상하십니다. 숨을….”

할리드는 뒤늦게 떠올렸다. 그가 지하에서 무엇을 느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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