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한편, 두 사람은 정원 한가운데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언젠가 할리드가 예의를 갖춰 어느 레이디를 대했던 그곳에. 녹스는 이제 겨우 진정된 호흡을 고르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저와 그는 크게 연관 없는 황궁임에도 그와 엮인 기억이 너무나 많았다.
“비아 공작님!”
“무슨 일이지?”
“폐하께서 라이네리오 공작 전하를 치료사에게 보이자고….”
“아.”
할리드의 얼굴은 어쩐지 창백했다. 그쪽까진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잠시 바닥을 바라보았다. 녹스는 슬슬 자신의 상태가 나아진 것 같아 할리드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 뜻을 바로 알아차린 할리드가 녹스를 바닥에 설 수 있게 해 주었다.
“치료사는 됐어. 다만 황제 폐하께선 어디 계시지?”
“아마 치료실로 가고 있으실 겁니다.”
이러나저러나 치료사는 봐야 한다는 거군. 녹스는 쯧 혀를 차고, 깊게 호흡을 몇 번 내뱉었다. 지하에서는 그렇게 쉬어지지 않던 숨이 천천히 내쉬어진다. 그는 쓰게 웃었다. 자신도 모르는 상처에서 아직도 이렇게 피가 질질 흐르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할리드 비아가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신경 쓰지 마.”
할리드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내가 이겨 낼 일이야.”
녹스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네가 준 상처고 네가 나를 건져 내 줬다 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네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할리드는 대답이 없었고 녹스는 알아서 하겠다는 양 먼저 몸을 돌렸다. 짧은 뒷머리 아래로 빛을 받아 식은땀의 흔적이 보였다. 할리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녹스는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 뒤를 할리드가 천천히 따라나섰다. 치료실로 향하는 길은 멀지 않았다. 둘이서 이리 조용히 걷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끼익-.
녹스는 노크도 없이 치료실 문을 열었다. 언젠가 녹스를 오래간 돌봐 준 치료사의 얼굴과 함께 펠티온이 보였다. 펠티온은 묘하게 환한 웃음으로 녹스를 맞이했다.
“어딜 갔었나. 라이네리오 공작. 걱정했네.”
“잠시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치료는 받아야지.”
녹스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다 곧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주는 건 무엇이든 받기 싫다는 태도로 비쳤다. 설령 그게 녹스의 뜻이 아닐지언정, 펠티온에겐 그랬다. 펠티온은 조금의 어긋남도 없는 미소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
끼익.
펠티온은 할리드마저 치료실로 들어오자 마치 억지로 꿰맞춘 퍼즐 조각처럼 웃었다. 녹스가 그 눈빛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읽히는 의중은 없었다.
“라이네리오 공작, 미안하게 됐어. ‘어차피’ 그대로 돌아갈 일이었는데 회의가 길어져서.”
“…불쾌하긴 하군요.”
녹스는 괜찮다는 말 따윈 하지 않았다. 실제로 괜찮지도 않았고. 이걸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괘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녹스의 차가운 말씨에 펠티온은 빙긋 웃으며 마치 평화로운 한때처럼 부드럽게 말했다.
“셋이서 식사나 하지.”
녹스와 할리드는 미간을 찡그렸다. 지금 이 분위기에서 식사 제안이라니. 하지만 황제는 자연스럽게 시종을 시켜 늦은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회의 탓에 정오를 지난 지 꽤 되었다.
“응접실에서 잠시 기다리면 돼.”
그 말엔 묘한 압박감이 있었다.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에 가까운 느낌. 녹스는 펠티온의 행동에 이상을 느꼈다. 그러나 정확히 짚어 낼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의 반응은 너무나도 급작스러웠다.
‘할리드가 나와 결탁했다는 걸 알았나?’
그런 것 치고는 차분했다. 녹스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모든 상황을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일단, 녹스 라이네리오는 일부러 펠티온과의 입맞춤을 할리드에게 보였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그를 제 앞으로 끌어냈다. 할리드를 그런 식으로 자극해 끌어들인 만큼.
‘펠티온도 할리드와 내 접촉에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하지만 이번 할리드와의 접촉은 거의 본능적인 것에 가까웠다. 그런 상황에서 계산해서 누군가를 찾아 끌어안을 수는 없었다.
그곳에서 녹스는 물에 빠진 사람이었고 뭍으로 나온 물고기였다. 자신을 밀어 넣고 끄집어낸 그 인물을 찾은 건, 빌어먹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녹스는 잠시 속으로 한숨을 내쉰 채 답했다.
“잠시라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펠티온의 상태를 조금 지켜봐야 알 것 같았다. 녹스가 수락하자 잠시 지켜보고 서 있던 할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궁인의 안내를 받아 먼저 응접실에 가 앉았다. 두 사람 중 누구도 방금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녹스에겐 그 기억이 유쾌하지 않았고 할리드에겐 자신의 죄를 상기하는 일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녹스 하나였다.
그에게 깊은 화상 자국 같은 기억을 만든 것은 할리드였다. 자신은 그가 허락해 줄 때까지 그에 대해 입을 열 수 없었다.
“할리드.”
“예.”
단둘이 남은 응접실에서 녹스가 그를 불렀다. 할리드는 떨구고 있던 고개를 들고 그의 부름에 답했다.
“의심받을 만한 짓을 한 적 있나?”
“제 판단으로는 없습니다.”
녹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황제의 상태가 영 이상하다는 거지. 일단 본능적으로 할리드를 찾은 제 행동에 질투를 느꼈다고 생각이 되는데, 행동하는 방향을 영 종잡을 수 없었다.
‘뭘 하고 싶은 거지?’
녹스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쯤, 누군가 똑똑. 노크를 했다.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궁인의 알림이었다. 녹스는 느릿하게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궁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나섰다.
‘어차피 무언가 한다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닐 거야.’
펠티온은 황제가 되기 전까지 숨죽이고 살아오던 인간이다. 지금 당장 못마땅하고 아니꼬운 게 있어도 이렇게 곧바로 드러내지는 않을 거라는 게 녹스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녹스는 흘끔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무슨 짓을 할 거였으면 할리드 비아를 빼고 단독 대면을 했겠지.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 걸어가니 식당 앞은 금방이었다.
양쪽 문이 열리면서 화려한 식당과 함께 먼저 나와 상석에 앉아 있는 황제가 보였다. 녹스와 할리드의 자리는 황제의 양옆, 두 칸의 여유를 두고 준비되어 있었다.
펠티온은 여유로운 얼굴로 두 사람을 맞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녹스는 저 선량해 보이는 얼굴로 그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잘 알았다.
녹스와 할리드는 각자 양쪽으로 나뉘어 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자리에 앉으니 잔에 물이 채워졌고 식사가 순서대로 하나씩 나와 세팅되기 시작했다. 먼저 입을 연 건 녹스였다.
“귀족 살해 용의자로 불러 놓고 이렇게 식사 자리를 함께하시다니요.”
일종의 비꼬기였다. 너희 쪽 인간들이 퍽이나 좋아하겠다는. 그걸 알아듣지 못했을 펠티온이 아닌데도 그는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어차피 그대가 면제권을 써 빠져나갈 걸 다 아는데.”
녹스가 물었다.
“그래서 제게 화풀이라도 하신 겁니까.”
그 축축한 지하 감옥에 자신을 기어코 밀어 넣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난처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하지만 그건 정말 몰랐어. 회의가 길어졌을 뿐이고…. 아니, 아니야. 그냥 다 변명으로 들리겠군.”
“예, 폐하께서 제게 변명하실 필욘 없습니다. 본디 제가 겪어야 할 절차이기도 했으니까요.”
“이해해 줘서 고맙군.”
“예.”
이건 이해 같은 게 아니었다. 그저 무관심에 가까웠지. 세 사람은 각각 식사를 시작했다. 녹스는 좀 먹다 말았고 펠티온과 할리드도 대충 반쯤 해치우곤 그릇을 치웠다.
다음 요리가 나오는 가운데 펠티온이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녹스.”
“뭡니까.”
펠티온이 여상한 말투로 물었다. 마치 오늘 산책하러 나갔다 왔냐고 묻는 듯 가벼운 말씨였다.
“면제권을 쓴다는 건 앞에 일어났던 살인 사건들 모두 그대의 짓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가?”
그 말에 녹스가 잠시 식기를 놓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녹스는 잠시 표정 없이 그의 눈을 직시하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글쎄요.”
“말장난을 하자는 거군.”
“어차피 이런 일 모든 게 다 말장난 아니겠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펠티온이었다. 펠티온이 고개를 돌리고 음식을 내려다보며 포크와 나이프를 쥐었다.
“그 면제권이 영원하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
“설마 제가 그걸 모를까요.”
녹스는 그다지 먹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지만 억지로 한 조각을 썰어 넘겼다. 그리고 목에 걸린 것 같은 느낌에 물을 한 모금 넘겼다.
“아, 그리고 할리드 비아 공작.”
“…예.”
할리드가 조용히 답했다.
“그대가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에게 지은 죄는 알겠지만, 남들이 보는 눈은 신경 써야지.”
“…알겠습니다.”
녹스는 두 남자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어차피 둘 다 제겐 똑같은 머저리일 뿐이었다. 쓸데없이 사내의 몸에 눈이 멀어 감정적으로 휩쓸리는 모양새 따위가 딱 그랬다.
녹스는 문득 무언가 걸리는 게 있어 잠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래, 펠티온은 분명 오랫동안 자신을 감추고 숨죽이며 살아온 자다. 그래서 할리드 비아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든 제게 어떤 욕망을 느끼든 내리누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편견의 일종이었다.
막상 생각해 보면 그는 녹스, 자신의 몸을 욕망하여 다이아몬드의 지분을 수락했고 하룻밤에 눈이 멀어 채굴량의 삼 할을 이야기한 사내다. 모두를 죽이고 황제 자리에 오른 남자. 펠티온.
그렇게 생각한다면, 펠티온, 그가 움직일 타이밍은.
챙그랑!
할리드 비아의 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산산이 부서지는 유리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