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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45화 (145/158)

제145화

할리드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녹스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할리드는 이를 악문 채 테이블을 짚고 버텼지만,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듯 결국 아래로 쓰러졌고 녹스는 눈이 넘어갈 듯한 감각을 느끼며 어떻게든 펠티온을 노려보았다.

의자를 붙잡은 팔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젠장.’

할리드와 함께 있다고 잠시 방심이라도 한 건지. 녹스가 짓씹듯 물었다.

“이게, 무슨, 짓….”

“별거 아닐 거야.”

황제의 얼굴은 커튼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로 인해 잘 보이지 않았다. 녹스는 그런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을 애쓰다 이내 바닥으로 무너졌다.

펠티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런 그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저항하지 못하는 그의 몸에 감사하며 살짝 뒤로 넘어간 목울대에 깊게 입을 맞추었다.

습,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게 얼마 만에 맡는 그의 체취인 건지. 마치 원래 제 것이었던 양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막상 자기 손에 완전히 넣어 본 적 없음에도. 펠티온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녹스를 안아 든 채 명령했다.

“지하 방으로 간다.”

“알겠습니다.”

궁인들의 고저 없는 대답이 들렸다. 펠티온은 들리지 않는 듯 녹스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방을 정말로, 쓰려고 만든 건 아니야.”

일종의 변명. 하지만 펠티온은 그 말을 뱉고 나서야 그 문장이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지, 아니야. 펠티온은 녹스를 안은 채 천천히 걸었다.

“미안, 거짓말이었네. 그게 언제일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난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대를 떨어뜨려 내 손안에 두려고 했을 거야.”

쓰지도 않을 방을 경고차 만든다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지. 펠티온은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녹스가 무어라도 좋으니 제게 감정 한 조각이라도 내주었다면 아마 평생을 그렇게 살았을 수도 있었겠지.

지하에 쓸데없이 아름다운 방을 만든 머저리 황제로.

"하지만 녹스, 내 인내심을 시험한 건 너잖아."

황제가 짓씹듯 이야기했다. 거기서 비명을 지르듯 할리드를 부르고 또 그 품에 파고들지만 않았더라면 나도 이렇게까진 하지 않았을 거야.

녹스가 알았다면 결국 다 핑계라는 말로 비웃었겠지만, 그는 지금 정신을 잃은 채 얌전히 펠티온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그는 기절한 녹스를 데리고 천천히 자신의 궁 지하로 향했다. 지하 감옥이 아닌 중앙 홀 계단 아래에 깊게 숨겨진 그곳으로.

본디 오래된 고서를 보관하는 곳으로 만들어진 지하 도서관을 전부 뜯어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방으로 만들어 놓았다. 쓸모없이 큰 샹들리에, 고급스러운 소파와 티 테이블, 그리고 크고 넓은 침대까지. 펠티온은 녹스를 침대 위에 눕혀 놓았다. 정신을 잃은 몸뚱이가 침대 위로 축 늘어졌다.

“폐하.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그때쯤 정신을 잃은 할리드가 궁인 몇 명에게 질질 끌려왔다.

“묶어.”

황제는 서늘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기절해 있는 녹스의 창백한 얼굴이 생각보다 그의 마음에 들었다. 펠티온은 항상 자신을 볼 때마다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그 눈매 대신 그가 노예일 적, 제가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하면 눈썹을 늘어뜨리고 애원하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얼굴이 다시 보고 싶었다.

“미약.”

“예.”

“미약을 가져와.”

“알겠습니다.”

한 명의 궁인이 미약을 가지러 올라가고 나머지 한 명은 억지로 의자에 끼워 앉힌 할리드의 팔과 다리를 묶었다. 쩔그렁, 쇠사슬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펠티온은 이제야 모든 게 제 뜻대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펠티온은 기절한 녹스의 머리카락을 찬찬히 쓸어 보았다. 식은땀을 흘렸을 창백한 이마를 훑고 있자 때마침 지상을 다녀온 궁인이 조심스럽게 작은 병 하나를 내밀었다.

펠티온은 녹스의 턱을 잡아 입을 벌리고 병에 담긴 액체를 입술로 흘려 넣었다. 그러고는 턱을 가볍게 젖힌 뒤 입을 맞추었다. 혀를 눌러 목구멍을 열고 미약을 넘기게 만든 그는 얌전한 녹스의 혀를 문지르고 빨다가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번들거리고 눈알이 욕망으로 빛났다. 모든 준비를 마친 황제가 말했다.

“내가 찾기 전까진 아무도 이 방에 들어오지 마.”

“알겠습니다. 폐하.”

궁인들은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황제의 눈이 마치 미친 사람의 그것 같아 시선을 피하기 위해 눈을 바닥으로 처박을 뿐이었다.

펠티온은 달콤한 혀에 섞여 온 미약한 미약의 맛을 느끼면서 두 사람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아주 기분 좋게.

* * *

황궁에 있던 황제파 귀족들은 갑자기 사라진 세 사람에 당황했다.

애초에 그들에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회의 중, 라이네리오 공작에게 이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달려간 두 남자. 그 둘 중 하나가 펠티온, 황제라는 게 문제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무슨 생각이시겠습니까.”

“후사도 봐야 하는 판국에 남사스럽게 사내를 계속….”

“그만.”

그들 중 하나가 나서서 대화를 중재했다. 이러다 황제에 대한 나쁜 이야기까지 오고 갈 기세였기 때문이다. 한 명이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오늘은 헤어지고 다음 정기 회의 날 뵙시다.”

“…일단 그러지요.”

그렇게 그들은 뿔뿔이 황궁을 떠났다. 자신의 발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겉보기에 황궁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비록 황제파 주축인 세 명이 죽었다 하더라도 아직 할리드 비아가 남아 있었으니까. 황제의 오른팔. 그 누구든 베어 내 전진해 줄 남자가.

하늘은 짙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기에 접어들어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오늘은 빗방울이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다음 주면 다시금 비가 쏟아질 거라는 관측사의 이야기가 있었으니 아마 이번 주는 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황궁을 떠난 귀족들과 달리 황제궁의 궁인들은 저마다 숨을 죽였다. 그 누구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그 아래로 끌려간 두 사람의 안위는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기묘하게 돌아가고 있는 이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녹스 라이네리오가 면제권을 써 당당히 궁 밖으로 나올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의외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라이네리오 공작이 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하 감옥에 갇힌 것도 아니었다. 귀족들은 저마다 추측하기 바빴다.

“모종의 거래가 오고 가는 게 아닐까요?”

“황제 폐하와 녹스 라이네리오 공작 전하면 분명 그럴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그 세 명을 죽인 건 역시 라이네리오 공작이 맞다는….”

“아직 뭐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귀족들은 저마다 자신의 정보책에 귀를 기울이며 황궁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자신의 황제가 저희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거라 믿으면서, 그가 지혜롭게 이 상황을 정리할 거라는 희망을 품은 황제파 귀족들도 그리고 황제의 절대적인 명령을 파훼하고 귀족파의 기상을 더욱 올려 줄 귀족파 귀족들도 모두 녹스 라이네리오를 기다렸다.

그들 아무도 황궁의 지하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 * *

할리드 때문에 꽤 강한 약물을 먹였으니 정신을 차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차분히 두 사람이, 아니, 녹스가 일어나길 기다리려 했던 황제는 점점 속이 탐을 느꼈다.

눈앞에 먹이를 두고 기다리는 짐승의 심정이 이러할까. 펠티온은 천천히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녹스의 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재킷을 아무렇게나 벗겨 던지고 목에 잘 감겨 있는 크라바트마저 벗긴 뒤 이내 셔츠 단추를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단추가 하나씩 풀어질수록 잘 짜인 몸이 드러났다. 아무래도 요즘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더니 몸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 펠티온은 문득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그 몸도 제가 알고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가장 단단했을 시절의 네 몸 역시 알고 있다면 더 만족스럽지 않을까. 그때, 네가 내게 준 모욕 따윈 잊고 자존심 굽혀 연락했으면 우리 사이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펠티온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과거를 되짚기엔 현재, 눈앞에 너무나 먹음직스러운 그가 존재했다. 머리카락을 닮은 암녹색 속눈썹이 닫힌 눈꺼풀 아래 얌전히 감겨 있었다.

펠티온은 하, 하고 한숨을 거칠게 내쉰 후 녹스의 하의를 거칠게 벗겨 냈다. 길쭉하게 드러난 두 다리. 아직 깨어나지 못했지만 약효가 도는 듯 묘하게 붉은 기가 비치는 피부. 그 모든 게 펠티온을 자극했다.

“눈 떠. 녹스.”

펠티온이 녹스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댄 채 속삭였다. 그의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 왔다.

“지금 당장 떠야 해. 아니면….”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커다란 손이 근육으로 단단한 녹스의 허벅지를 무릎에서부터 천천히 쓸어 올렸다.

입을 크게 벌려 그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허리를 끌어안고 제 몸에 그의 몸을 바짝 붙였다. 이미 미약을 먹였을 때부터 단단히 서 있던 펠티온의 성기는 하의 아래에서 존재감을 여실히 내비치고 있었다.

붉은 울혈이 지든, 피가 나든, 펠티온은 녹스의 목덜미에 이를 세우며 맨몸이 된 녹스의 몸에 허리를 붙인 채 치댔다. 기절한 녹스의 몸이 그의 허리 짓에 따라 인형처럼 흔들렸다.

하아, 펠티온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강한 흥분을 느꼈다. 제가 무슨 짓을 해도 거부하는 손짓 없이 얌전히 누워 있는 그가 생각보다 썩, 나쁘지 않았다.

“물론 난 네가 날 바라보는 게 좋아.”

그 가맣게 물든 눈동자가 날 담는 게 좋다고. 펠티온은 이제 잠든 녹스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내렸다. 다물어 있는 입술을 슬쩍 벌려 진하게 입을 맞추며 슬금슬금 벌어진 허벅다리 사이로 손을 내렸다.

미약의 효과 탓에 잠들어 있음에도 묘하게 부푼 녹스의 성기 아래로 손을 내리자 복권 뒤 아무도 만지지 못했을 밀부가 그의 손끝에 붙어 왔다.

황제는 그것이 이제 제 것에 억지로 꿰일 것을 알기에 일순 황홀감에 잠겼다.

“할리드보다 더….”

더한 걸 네게 새기고 싶은 욕망.

펠티온은 녹스에게 그 무엇보다도 큰 흉을 내고 싶었다. 그걸 들여다볼 때마다 그 외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떠올릴 수 있도록.

끼익.

그리고 그때,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쩔그렁, 쇠사슬이 당겨지는 소리였다.

아, 할리드 비아. 그가 먼저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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