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50화 (150/158)

제150화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할리드의 눈은 앞에 있는 녹스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더 먼 곳을.

자신이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이제야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리드 비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방문 앞에 섰다. 그는 에스테리온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래, 차라리 저 남자가 있어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할리드 비아는 녹스의 방을 나서 1층으로 내려갔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그의 등 뒤를 따랐다. 할리드 비아는 자신을 따르는 집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저택을 나서기 직전.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내게 보고할 필요 없어.”

“예?”

“그냥 그를 위해 일해.”

“그게 무슨….”

“너희 다… 끈 떨어졌다고.”

할리드 비아는 불친절하게 그 말만을 내뱉고는 자신의 마차에 올라타 사라졌다. 집사만이 저택 앞에 서서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 * *

안델라스 후작은 황궁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마 다른 귀족들도 저와 다르진 않으리라.

수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황제파 귀족 연쇄 살인. 그 범인이 정말 녹스 라이네리오인지에 대해 이야기가 시시각각 오갔다.

사실 안델라스 후작조차 그 사건의 진범이 녹스 라이네리오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고 있지 못했다. 워낙에 비밀이 많은 남자였으니까.

다만 그가 면제권을 사용해 황궁을 벗어나면 귀족 연쇄 살인의 범인이 그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나왔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

“예.”

만약 면제권을 사용했다면 하루라는 시간까지도 필요 없었을 터였다. 녹스 라이네리오라는 남자는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남기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그가 범인이 정말 아니었다는 건가. 그리고 그걸 증명하느라 시간이 걸린 거고. 그가 예상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라이네리오 가문에 편지를 보내야겠군. 편지지를 가져오너라.”

“예.”

안델라스 후작은 곧장 라이네리오 가문으로 넣을 편지를 썼다. 몸은 괜찮은지, 진짜 살인 사건의 범인이 당신인지, 그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안델라스 후작은 인내할 줄 알았다. 단 한 줄의 문장만을 적어 보냈다.

[배는 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한 문장이 담긴 편지가 라이네리오 가문으로 전해졌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방 안에서 그가 보낸 편지를 뜯어보았다.

그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그는 이내 책상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 거칠게 글자를 갈겨 썼다.

“에스테리온.”

“예.”

그 일 이후로 결코 녹스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에스테리온이 곧장 대답해 왔다. 녹스는 갈기듯 적은 편지를 접어 그에게 내밀었다.

“안델라스 후작가로 전해.”

“…알겠습니다.”

에스테리온은 그 편지를 받아 들고 직접 방을 나서는 대신 하인을 불러 편지를 맡겼다. 그리고 녹스의 곁을 지켰다. 녹스는 어제와 비교하자면 매우 안정된 듯 보였다.

이후 발작하거나 숨을 쉬지 못하거나 울며 절규하는 일 따윈 없었다. 되레 침착해졌다.

그는 그날이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그러나 에스테리온에겐 그 모습이 더욱 아슬아슬하게 느껴졌다. 그는 누군가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행동했다.

표정엔 의욕이 없었고 손끝엔 힘 한 점 들어가 있지 않았다. 누군가 조종하는 실에 묶인 양 기계적으로 평소의 일상을 해내고 있었다. 에스테리온은 그런 그를 회유도 해 보고, 달래보기도 했으나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차를 좀 내올까요.”

“됐어.”

너나 안젤라가 우린 차는 별로 내 입에 맞지도 않아. 녹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에스테리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녹스는 에스테리온의 기색을 알아채지 못하고 무감정하게 명령했다.

“제메일을 불러와.”

“아, 도련님 말씀입니까?”

“그래. 할 말이 있어.”

에스테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제메일 도련님은 직접 데리러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얌전히 계십시오.”

“내가 살아 있다 보니 보좌관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말도 다 듣고.”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녹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에스테리온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방 밖으로 나갔다. 녹스는 집무 책상 의자에 기대앉아 몸에 힘을 뺐다. 멍청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디라도 상관없이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녹스는 충동에 사는 인간이 아니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것들이 있었다.

자신의 유일한 피붙이 제메일.

그리고 에스테리온과 그의 여동생.

약속했으니까. 그는 그것을 지켜야만 했다.

눈꺼풀이 무거웠으나 잠이 오진 않았다.

그저 눈을 뜬 채로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기를 몇 분,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테리온이 제메일을 데리고 돌아왔다.

“형…!”

“제메일.”

녹스가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제메일 또한 어제의 소란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밝게 웃으며 녹스에게 다가갔다.

“몸이 많이 좋아졌네.”

“당연하지. 요즘 놀고먹는 거 말곤 내가 하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검술 연습 정도는 하잖아.”

“그건 그냥 산책 같은 거고.”

제메일은 좀 과장되게 밝은 척을 했다. 녹스는 그런 서투른 배려를 모른 척 가만히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부른 거야? 집무실로 불렀던 적은 없었잖아.”

녹스는 힘 없이 고개를 기울인 채로 제메일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요 근래 잘 먹이고 잘 입혀 놨더니 제법 잘 자란 태가 난다.

“난 네게 공작 작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어.”

“어, 응. 그건, 알지.”

하지만 제메일은 그의 말 맺음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생각이었다니. 제메일이 이상함을 감지하고 손가락을 꼼지락대자 녹스가 긴장하지 말라는 듯 설핏 웃으며 말했다.

“더 높은 자리엔 관심 없어?”

“어?”

제메일이 눈을 크게 떴다. 소년의 눈에 비친 녹스는 지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몰라도 괜찮아.”

녹스는 아무런 말도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냥 그걸 물어보려던 것뿐이니까 돌아가도 좋아.”

“…….”

제메일이 불안한 눈으로 에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에스테리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신경이 극한으로 곤두서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가 이성을 잃고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그래. 알았어. 일단 생각은 해 볼게. 무슨 뜻인진 잘 모르겠지만.”

“그래. 저녁 잘 챙겨 먹고.”

“알았어, 혀, 형도….”

제메일은 불안한 눈을 한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에스테리온은 단둘이 남은 조용한 방 안에 얌전히 입을 다문 채 서 있었다. 지금 녹스가 바라는 것은 무언가 묻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에스테리온은 확실히 하고 싶은 게 있었다.

“제 여동생은 다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응.”

녹스 라이네리오는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에스테리온은 저 작은 머리통 안에 얼만큼의 생각이 굴러다니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저걸 갈라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어필했다.

“차를 내오겠습니다.”

“…그러든지.”

그렇게 에스테리온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녹스는 테라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장 높은 층인 이곳에서 뛰어내리면 어쩌면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포와 분노, 절망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던 그 수만 가지의 감정이 조금 가라앉고 나자 자신이 지켜야 할 것들이 보였다. 그리고.

“……펠티온.”

그에 대한 살의가 가라앉질 않았다. 계속해서 가슴 한구석에서 끓어 올랐다. 가끔은 속이 답답해 무언가를 토해 내고 싶을 정도로.

‘죽여 드리겠습니다.’

녹스는 할리드가 남긴 그 한마디를 기억하며 시선을 책상 위로 돌렸다. 할리드 비아. 너는 무슨 결심을 한 걸까. 녹스 라이네리오는 비뚤게 웃었다.

“네가 내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

그것이 뭔지 스스로 깨달았다면.

“용서라는 거,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가 헛웃음을 켰다.

“살아서는 못 받겠지만.”

녹스는 조용히 테라스에서 고개를 돌렸다. 녹스야말로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피가 질질 흐르는 상처를 지져 막고 앞으로 걸어야 할 때였다. 자신의 고통에 빠져 허덕일 시간이, 그에겐 없었다.

자신이 직접 준비할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후작에게 편지를 전달해 놓았으니 기본적인 일은 그가 처리해 놓겠지. 녹스가 귀족파의 수장이었던 자를 끌어들인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명분만 있다면 얼마든지 끌어들일 수 있어.”

녹스의 눈이 어둡게 번뜩였다.

그리고 그 시각, 녹스에게서 온 편지를 받은 안델라스 후작은 편지의 내용을 보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단 한 줄, 자신의 편지처럼 고작 한 줄만이 써 있는 문장은 감히 누가 보아선 안 될 성질의 것이었다.

그는 혹여나 누가 그것을 볼세라 촛불에 태웠다. 그리고 테이블을 짚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라면….”

후작이 테이블을 꽉 붙잡았다.

“편지지를, 편지지를 다 가져오거라. 있는 것 전부다!”

“예, 알겠습니다.”

그의 저택이 소란스러워졌다. 후작의 편지가 귀족파에 몸담은 모든 귀족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밀스러웠으며 또한 조심스러웠다.

녹스는 그저 안젤라에게 물밑의 움직임을 보고받으며 이번에도 입에 맞지 않는 차를 가볍게 들이켜고 내려놓았다.

“이것도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래.”

안젤라와 에스테리온이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녹스의 손엔 방금 도착한 비아 공작가의 편지가 들려 있었다.

“그보다 그 편지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에스테리온이 물었다.

녹스는 입 안에 남은 달달한 차향을 느끼며 미간을 찡그렸다. 편지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황제 폐하의 정기 회의 날. 모든 것이 다 끝날 겁니다.]

부탁인지 명령인지 모를 애매한 투. 하지만 녹스는 그를 비웃는 대신 그것을 테이블에 곱게 밀어 넣어 두었다.

“전부 다 그가 끝낼 거야.”

“전부 다라니요?”

녹스는 말 하지 않았다. 그가 끝낼 것이 두 개. 녹스는 그 두 가지를 마음에 새기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다음 정기 회의까지.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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