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비아 공작저엔 싸늘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주인인 할리드의 기분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으니 저택 또한 자연히 그의 분위기를 닮아 갔다. 사용인들은 입을 다문 채 그의 눈치를 보았다.
할리드는 이제 막 해가 뜬 하늘을 바라보았다. 맨몸에 걸친 가운 사이로 서늘한 아침 공기가 스며들었다. 할리드 비아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걸음을 옮겼다.
“집사.”
“예.”
“사용인들을 내보내.”
“예?”
“전부.”
“…….”
할리드 비아는 스스로 가운을 벗고 집사가 준비해 놓은 옷을 하나둘 걸쳤다. 원래도 남이 시중을 들어주는 것보단 홀로 입는 것이 편했다. 집사는 심각한 얼굴로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여기 남아서 죽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할리드 비아는 올가 라이네리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녀가 모든 사용인을 내쫓았을 때. 그때 무슨 기분이었을지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할리드는 그런 자신을 스스로 비웃었다. 그는 정갈하게 옷을 차려입고 허리춤에는 검을 그리고 품속에는 단검을 밀어 넣었다.
그날 이후 한 주가 지나 다시 한번 황제의 회의실로 들어가야 하는 날이 돌아왔다. 할리드 비아는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을 했다.
아니, 녹스 라아네리오라는 단 한 사람만을 계속해서 생각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으면서 자신은 가장 쉬운 길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이제라도 인정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인 건지. 할리드는 자신의 목을 감싼 크라바트를 조금 더 조였다. 지난 며칠, 숨 쉬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막상 당일의 해가 떠오르니 모든 것이 다 진정되었다. 마치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
창밖은 평소와 같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갈 거면 서둘러.”
할리드는 아직 남아 있는 집사를 지나쳐 방을 나섰고 이내 1층으로 향했다. 늘 같은 시간에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하는 그를 알기에 사용인들은 익숙히 그를 배웅하였다.
할리드는 멀어지는 저택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황궁으로 향했다. 이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저택이건만 신기하게도 미련 한 톨 남아 있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황궁에 도착하면 늘상 자신을 맞던 시종장들이 저를 마중 나왔고 당연하게도 할리드는 허리에 찬 검을 잠시 그들에게 맡겨 두었다. 그들은 할리드가 품에 다른 검을 가지고 있을 거라곤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너무나 익숙했으니까. 그는 황제의 사람이니까. 그가 무슨 결심을 하고 이 자리에 섰는지 짐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할리드는 품 안에 숨겨 둔 단검의 존재감을 느끼며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걸었다. 황제의 집무실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점점 더 차분해졌다. 본디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비아 공작님.”
집무실 앞에 서 있던 궁인들이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면면들이 보였다. 이미 제 손에 죽어, 없는 얼굴들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들은 황제파 귀족 살인 사건이 멈추었다는 사실 하나로 얼굴빛들이 밝았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오늘은 좀 늦었군.”
황제가 느른한 얼굴로 집무 책상에 걸터앉아 할리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예.”
할리드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답했다.
“준비할 게 조금 있어서 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들 사이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황제의 눈빛이 날카롭다. 황제, 펠티온. 너는 내가 오늘 여기에 무슨 일을 하러 온 건지 아는 걸까.
할리드는 차라리 알기를 바랐다.
네가 무슨 짓을 해 그리되는 건지 처절하게 알기를 바랐다.
할리드는 등 뒤로 조용히 문을 잠갔다. 달칵, 소리가 나자 문과 가장 가까이 있던 귀족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비아 공작님?”
그가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할리드는 여느 때와 같은 얼굴로 그와 눈을 맞췄고 아주 자연스럽게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품 안에서 끄집어낸 건 두 뼘짜리 단검이었다. 할리드가 검집을 빼내어 바닥에 버릴 때까지, 그는 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콰득, 촤악-!
역으로 쥔 단검을 순식간에 귀족의 목에 찔러 넣었다 뺀 할리드는 삽시간에 몰려든 시선들을 마주하며 바로 가까이에 선 자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무슨, 공작…!”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또 하나의 목이 한 번 더 갈라졌다. 피가 순식간에 뿜어져 나왔다. 할리드는 자신의 얼굴을 점점이 물들이는 피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경비, 경비를 불러라!”
“기사단을!”
“폐하!”
“공작, 미쳤나?!”
누군가 문을 향해 달려갔다. 할리드의 큰 손이 그의 목을 낚아챘다.
“컥!”
우드득-.
그의 손아귀 안에서 목이 조여졌다. 곧이어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그의 손에 잡힌 몸이 추욱 늘어졌다. 할리드는 그 몸을 매정하게 바닥으로 내쳤다. 당혹스러운 얼굴들이 보인다. 그들이 소리를 지르는 게 보였다. 하지만 할리드의 귀엔 그저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들의 말은 전부 뭉개져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펠티온의 앞에 섰다.
“설마…!”
누군가 무언갈 깨달았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그 입은 곧 할리드의 손에 쥐인 단검에 의해 찢겨 나갔다. 비명이 터지고 왈칵 피가 샜다.
바깥에서도 이 소란을 들었는지 누군가 문을 쿵쿵 두드려 댔다.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
“지금, 아아악-!”
할리드 비아의 이름을 입에 올리려던 남자의 목덜미에 검이 꽂혔다. 까드득, 콱. 단번에 꽂아 넣은 검 끝에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할리드는 그것을 부수고 더 깊게 쑤셔 넣은 후 검날을 비틀어 빼냈다.
털썩, 쓰러진 몸에서 스멀스멀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할리드는 그 짧은 사이에 피투성이로 변했다. 회금발은 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고 흰 뺨은 온통 핏방울이 튀어 푸른 눈만이 선명히 보였다.
자, 이제 남은 것은 할리드와 펠티온, 단 두 사람뿐이었다.
“열쇠! 열쇠를 가지고 와라!”
“폐하!”
밖에서는 뚝 끊긴 비명 소리에 다급히 문을 흔들어 댔다. 하지만 황제가 머무르고 있는 집무실의 문은 상당히 단단했다. 펠티온은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굴로 할리드를 보고 있었다. 그를 마주 보는 할리드의 얼굴 또한 지독하게 무표정했다. 마치 마스크를 뒤집어쓴 것처럼.
“제가 이럴 줄 알았습니까?”
“내가 미쳤으니 너도 제정신일 리는 없지.”
황제가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방향으로 미쳐 버렸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전부 다 버릴 각오가 되어 있을 줄은 몰랐어. 할리드.
그가 녹스를 만나기 전 제게 보여 주던, 의형제의 얼굴을 했다. 하지만 할리드의 얼굴엔 그 어떤 감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녹스 라이네리오에게 손대선 안 됐어.”
“왜, 오직 네가 남긴 상처만 안고 살아가야 하니까?”
“그런 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면?”
두 남자는 펠티온이 황위에 앉기 전과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랐다. 그때의 둘은 같이 등을 맞대고 있었으나 지금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날 죽이고 나가려고?”
“할 수 있다면.”
“네가 녹스 라이네리오를 가지기 위해 택한 방법이 이건가? 어리석기 짝이 없군.”
펠티온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할리드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깨달았다. 펠티온은 아직도 여전히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녹스 라이네리오라는 남자를 한없이 상처입히고 짓뭉개고 진창에 처박아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고도 아직 그와 ‘함께하겠다’라는 욕심을 버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가질 생각 없어. 가질 수도 없고.”
아마 비뚤게나마 그의 증오라도 받아 마시며 살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였겠지.
“고맙다는 말은 안 할게.”
할리드의 말에 펠티온이 미간을 찡그렸다.
“덕분에 내가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거든.”
펠티온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움직였다. 그렇다면 할리드 비아는 무엇을 위해 움직일까.
“망가진 그를 돌릴 순 없어.”
할리드는 단검을 바로 쥐었다.
“하지만 ‘우리’가 없는 미래를 선물해 줄 수는 있겠지.”
펠티온이 허,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다시는 괴롭지 않을 미래는.”
할리드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없는 세계야.”
“…….”
펠티온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할리드는 아주 오래간만에 미소를 지었다. 할리드는 펠티온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지금까지 귀족들을 죽인 건 나야.”
펠티온의 눈이 커졌다.
“내가 널 배신한 지는….”
할리드가 조금의 후회도 없다는 듯 말했다.
“좀 됐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펠티온에게 겨눈 그는 아주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녹스 라이네리오에게 그들이 없는 미래를 선물해 주는 것.
그것이 할리드 비아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자 그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젠 황제를 죽인 반역자가 될 생각이고.”
“할리드, 비아…!”
펠티온의 고함이 터졌다. 그 고함이 터짐과 동시에 할리드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펠티온은 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카앙-!
날붙이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사나운 두 시선이 서로를 벨 듯 바라보았다.
펠티온의 장검과 할리드의 단검이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황제는 이를 아득 물었다.
“우리가 없는 미래가 필요하다고?”
그는 짓씹듯 발음하였다. 칼을 맞댄 펠티온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고, 핏발 선 눈알은 한없이 붉었다.
그는, 그것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