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할리드는 그런 그를 보며 차마 비웃을 수 없었다. 만약 펠티온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자신 역시 영원히 몰랐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할리드는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손목을 틀어 그의 공격을 옆으로 흘렸을 뿐.
카가각!
검이 검날을 따라 미끄러지는 순간, 펠티온의 몸이 휘청였다. 할리드는 앞으로 쏠리는 펠티온의 명치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끅…!”
펠티온은 신음을 내뱉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할리드는 몸을 돌려 그대로 그의 머리채를 잡고 반쯤 무릎 꿇은 그의 종아리를 강하게 밟았다.
뚜둑, 끅.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펠티온의 비명이 터졌다.
할리드는 입술을 꽉 깨물고 부러진 그의 다리를 다시 한번 짓밟았다. 완벽히 부러진 그의 다리를 확인한 할리드는 펠티온의 턱 아래 검을 대었다.
펠티온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고 기다려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칼날의 감촉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펠티온은 눈을 뜨고 할리드를 살폈다. 그가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남자는 시선을 교환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때는 등을 맡길 수 있었던 사이였는데, 언제 이렇게까지 추락했나. 누가 더 어리석었는지 따위는 잴 수 없었다. 펠티온은 할리드가 자신을 당장 죽이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를, 불렀나?”
“…….”
“하, 하하. 애쓰는군. 보기 안쓰러울 정도야, 그래.”
펠티온이 한 번 어깨를 강하게 틀었다. 검날이 목으로 가볍게 파고들었다.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사이에.
쾅!
“폐하!”
“이게 무슨 짓이오. 공작!”
순식간에 황제의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황제의 목 아래엔 할리드 비아 공작의 칼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차마 함부로 다가가지 못한 채 검만을 빼 들고 자리에 멍청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할리드는 펠티온의 머리채를 강하게 틀어쥐어 턱을 더 높이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검날을 더 바싹 들이댔다. 황제의 시종장이 기겁을 하며 외쳤다.
“대, 대체 무엇을 바랍니까!”
할리드는 답이 없었다. 그저 문 쪽을 가만히 바라보며 칼날을 거두지 않을 뿐이었다. 펠티온은 목 앞에 자리 잡은 날카로운 칼과 욱신거리는 다리 탓에 어떻게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펠티온이 자조하듯 웃으며 말했다.
“그날 네게 그를 주는 게 아니었어.”
“나 또한 그날 그를 네게 가져다 바친 게 후회가 된다.”
두 사람 사이의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서로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의 크기였다. 멍청한 두 남자. 결국엔 손에 쥔 거라곤 아무것도 없이 버려질 남자 둘.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여 주겠다니 눈물이 다 나는군.”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순간 문 앞을 차지한 기사들 뒤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춤거리며 기사들이 하나둘 물러섰다. 그리고 그 사이로 검은 옷을 입은 그가 보였다.
“어차피 나도 마지막으로 보는 걸 테니까.”
녹스 라이네리오가.
콱, 끄득.
펠티온은 순간 확 하고 번지는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제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아니었다. 펠티온은 제게 닥친 마지막 순간에 녹스 라이네리오의 검은 눈을 찾았다.
널 망가뜨리고 유린한 나의 마지막을 보러 왔구나!
네가 내 죽음에 희열을 느낀다면, 그것은 내가 네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너는 나를 증오해야 한다. 그리하여 내가 죽더라도 내가 남긴 상흔을 안고 죽을 때까지 괴로워하며 살아야 한다!
펠티온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기뻐할 것이라 생각했다. 영원히 잊히지 않을 상처를 남긴 남자의 죽음을 기꺼워할 것이라고. 하지만.
꽈득, 끅!
할리드의 검이 펠티온의 목을 잘라 내려는 순간, 펠티온이 본 것은 그저….
“…….”
아무런 감흥도 없이 자신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는 녹스의 시선뿐이었다. 펠티온은 속이 뒤틀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끄득.
목에서부터 뜨거운 고통이 느껴졌다.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는 바닥을 짚고 헐떡였다.
피가 후드득 쏟아지는 와중에도 펠티온은 고개를 들어 녹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이렇게 죽어 가고 있음에도 그의 검은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희열이나 기쁨, 증오. 그 무엇 하나도.
펠티온은 무언가 숨통을 콱 틀어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결국엔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 사실에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펠티온을 바닥을 긁다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궁인과 기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것은 펠티온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차라리 날 증오해 줘.
내 죽음에 기뻐해.
그의 핏발 선 눈이 끝끝내 녹스를 놓지 않고 바라보았으나.
“이제 다, 끝났습니다.”
콰득.
할리드의 한마디와 함께 다시 한번 왈칵, 피가 쏟아졌다. 목은 반 이상이 갈라졌고 카펫은 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펠티온은 점점 어두워져 가는 시야로 녹스 라이네리오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제발 그의 얼굴에, 그의 눈에 단 한 점의 감정이라도 비치길 바라면서.
하지만 끝내 그는 발견하지 못했다.
증오도 분노도.
아무것도.
그리하여.
아주 미세한 감정 조각도 쥐지 못한 채.
그의 의식은 끊겼다.
* * *
녹스 라이네리오는 할리드의 약속대로 황궁에 도착했다.
“…뭔가 소란스러운데요.”
에스테리온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궁 앞에 내리자마자 내부가 소란스러움을 느꼈다. 궁인들은 끊임없이 뛰어다녔으며 그 사이로 누군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열쇠는 대체 언제 오나!”
녹스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그 안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았다. 순간 고함이 귓가에서 멀어졌다.
삐, 이명이 들리며 쿵, 하고 심장이 뛰었다. 녹스 라이네리오의 검은 눈에 녹색 빛이 반짝였다.
아, 피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쾅!
저 멀리서 문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그 소리를 따라 걸었다. 곧이어 황제의 시종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궁인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에스테리온이 앞으로 나서 궁인들을 옆으로 밀어내며 길을 내기 시작했다. 녹스는 그가 내어 주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제야 녹스를 발견한 사람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에 닿았다.
“라이네리오 공작님께서 오셨어.”
“라이네리오 공작님께서?”
“언제 오신 거지?”
“지금 그게 중요해? 라이네리오 공작님께서 이 상황을 막아 주시길 빌어야지.”
지금 황제를 해치는 이가 할리드 비아 공작이라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약간의 기대를 가졌다. 황제에게 검을 들이민 할리드 비아라는 사내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녹스 라이네리오. 그일 것이 분명했기에.
녹스는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궁인들이 웅성거리자 기사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녹스는 가볍게 턱을 들었다. 오만해 보이는 눈동자가 기사들을 압도했다.
그들은 저도 모르게 검을 조금 내리고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녹스 라이네리오가 앞으로 나섰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쭉 뺐다. 어쩌면 이 상황이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큰 기대감을 안은 채로.
하지만.
꽈득.
끅.
녹스 라이네리오의 시선이 그에게 닿자마자 할리드 비아가 손에 쥐고 있던 단검으로 가차 없이 황제의 목을 베었다.
“폐하-!”
시종장이 소리쳤다. 핏물이 터지며 집무실의 바닥을 흠뻑 적셨다. 할리드 비아가 기어코 황제의 목을 베었다. 그러고는 그 목을 완전히 끊어 내 바닥으로 내던졌다.
툭, 데구루루.
머리는 바닥을 굴러 녹스 라이네리오의 발치로 굴러갔다. 녹스는 이 상황을 어디선가 겪어 본 적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그래. 전 황태자의 머리가 이렇게 굴러왔었지. 그 파티장에서. 형편없이. 녹스는 그 머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저를 보며 희번덕거리던 펠티온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는 분명 제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녹스는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나 당연하게도 그 기대에 응답해 주지 않았다. 네가 내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처럼 네 죽음마저도 내겐 가치가 없다.
펠티온이 가장 견디지 못할 만한 것을 마지막으로 건넨 녹스는 발끝에 닿은 황제의 머리를 가볍게 툭 쳤다. 온화해 보이던 갈색 머리가 온통 피로 젖어 있었다.
삐-.
귓가로 이명이 들려왔다. 녹스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기사들과 시종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자리에 굳어 서 있었다.
황제가 죽었다.
그것은 곧 명령의 부재였다.
할리드 비아는 이제 머리가 없는 황제의 몸뚱이를 바닥에 내던진 채 멀거니 서 있었다.
아무도 그가 왜 황제를 죽였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단 한 사람을 빼놓고서. 할리드의 눈동자가 녹스를 바라보았다. 마치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을 눈에 한참 동안 담아 두려는 것처럼.
녹스는 그의 푸른 시선을 마주하다 설핏 웃었다. 아니, 웃어 주었다.
“황궁 기사단.”
녹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들을 불렀다. 기사들이 몸을 움찔 떨었다.
“황제 폐하를 시해한 반역자를 잡아라.”
녹스 라이네리오의 입술 끝에 자비 따윈 없었다.
“마지막 남은 황족으로서 명령한다.”
그 말에 기사들이 순식간에 정신을 되찾았다. 마지막 황족. 녹스 라이네리오의 어미 올가 라이네리오는 분명 황족 출신이었다.
황제의 형제도 자식도 없는 지금. 황족으로 칭할 수 있는 자는 녹스 라이네리오. 여기 서 있는 그밖에 없었다.
“반역자를 붙잡아라!”
기사 한 명이 외치자 나머지 기사들이 저마다 검을 치켜들고 할리드에게 덤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