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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53화 (153/158)

제153화

할리드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기사들을 피하지 않았다.

반항하는 척, 몇 번 검을 튕겨 내긴 했지만, 그는 곧 순순히 기사들의 손에 붙잡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할리드는 제압당하는 와중에도 녹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녹스는 앞으로 굴러간 황제의 머리를 무미건조하게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폐하의 시신을 수습해야지.”

“…….”

녹스 라이네리오의 얼굴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이 상황을 미리 알았던 사람처럼.

하지만 시종장은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이 전부를 예상했다면, 그가 꾸민 짓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를 지목해 입을 연다는 건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녹스는 고개를 조금 기울인 채로 할리드를 내려다보다 시종장을 불렀다.

“시종장.”

“…예. 공작 전하.”

“그가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알아내야겠네.”

“예?”

“그가 갑자기 황제 폐하를 배신한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녹스 라이네리오의 말에 시종장은 잠시 할 말을 잊은 듯했다. 그는 알지 못했다. 할리드 비아가 왜 갑작스럽게 황제를 등졌는지. 하지만 만약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차가운 목소리가 그 생각을 툭 잘랐다.

“무슨 생각을 하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 명의 기사가 할리드 비아를 끌고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궁인들은 집무실 안에 펼쳐진 끔찍한 장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종장은 조용히 궁인들을 시켜 펠티온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녹스는 팔짱을 낀 채 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며 생각했다.

‘할리드 비아, 네가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것은 그에 대한 시험이기도 했다. 네가 정말 나에 대해 입 하나 벙긋하지 않고 죽을 수 있을까? 정말 네 모든 것을 내버리고 가라앉을 수 있나?

녹스 라이네리오는 할리드 비아의 감정을 믿지 않았다. 결국 네 입에서도 내 이름이 나오게 되겠지.

‘그래 마치….’

내 입에서 기어코 죄송하다는 말을 끄집어냈던 것처럼.

나 또한 네 입에서 내 이름을 끄집어내리고 말리라. 그리하여 네 감정을 비웃고 짓밟은 뒤 네 앞에 던져 주리라.

네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할리드 비아를 믿지 않았다.

* * *

귀족들에게 비상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에게 전달된 사항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서둘러 황궁으로 향했다.

“폐하께서 돌아가시다뇨?”

“할리드 비아 공작의 습격을 받으셨다고요?”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요!”

회의실에 모여든 귀족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 황제의 자리에 앉을 사람은 부재하였으며 회의장은 마치 시장통 같았다.

오른쪽에 앉은 얼마 남지 않은 황제파와 중립파 귀족들은 혼란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왼쪽에 앉은 귀족파 세력들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머지 귀족들은 그들의 침묵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려 황제가 시해당한 사건이었다. 그 누구도 차분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귀족파 귀족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있었던 것처럼. 그때 중립파 귀족 하나가 테이블을 쾅 두드렸다.

“그래서 이 사태를 어찌한단 말이오!”

“게다가 대체 누가 우리를 소집한 거지? 폐하께서 서거하신 판국에!”

그러자 황제의 자리 옆에 가만히 서 있던 황제의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를 시해한 할리드 비아 공작은 곧장 지하 감옥으로 수송되었습니다.”

“지하 감옥으로?”

“누가 그런 명령을 내린 거지?”

귀족들은 의아함을 표했다. 황제에겐 형제도 자식도 없었다. 그의 피붙이들은 이미 진즉에 전부 죽어 나자빠진 후였다. 그런데 황제가 부재한 지금, 대체 누구의 명령을 받고 움직인다는 말인가.

“남은 황족이…!”

시종장이 어떤 귀족의 말을 잘랐다.

“있습니다.”

남은 황족이 있다니. 그들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형제였던 황태자는 죽은 지 오래였고 황후 또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황족의 방계들 중에서도 남은 자가, 남은 자가….

“설마….”

있었다. 딱 한 명. 황족의 피를 조금이라도 이은 자가. 귀족들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자들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벌컥!

그때 회의장 문이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귀족들의 시선이 문에 가서 꽂혔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검은 제복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황실 기사단의 제복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래된 귀족들은 검은 천에 은색 실을 덧댄 제복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라이네리오 공작…!”

지금 안으로 들이닥치고 있는 기사단은 라이네리오 가문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정해진 일을 행하듯 회의장 안으로 열을 맞춰 들어와 오른쪽과 왼쪽 양옆에 뒷짐을 지고 섰다. 그들의 허리엔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길이의 검이 채워져 있었다.

“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황궁에 검을 들이다니. 하지만 아무도 그의 목소리에 함께 소리 낼 수 없었다. 기사들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그들을 형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뚜벅뚜벅.

기사들의 발소리가 끊긴 후, 중앙 문을 통해 들어오는 또 하나의 발소리가 있었다. 귀족들은 자연히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검은 제복, 흰 장갑. 광이 없는 검은 구두와 허리에 찬 긴 장검. 어둡게 보이는 녹색 머리와 그림자 져 검게 보이는 눈동자.

녹스 라이네리오. 그의 등장이었다.

“라이네리오 공작, 이게 대체….”

“이래서 멍청한 작자들이란.”

“바, 방금 무어라….”

“주변을 둘러보지 그러나.”

홀로 목소리를 높이던 귀족 하나가 그의 말에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포함한 몇 명을 빼고선 전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불편하다는 듯이. 아니, 마치 그에게 거슬리기 싫다는 듯이.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셨소.”

“그건, 우리도 전달받은 바요.”

“황제 폐하를 시해한 할리드 비아 공작, 아니 이젠 그저 죄인이겠지.”

녹스가 삐딱하게 웃었다.

“죄인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 중에 있다네.”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고요?”

귀족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찬 것 같은 얼굴이었으나 감히 그의 앞에서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그 모습을 보며 웃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냉랭하게 답했을 뿐이었다.

“그래, 누군가의 사주를 받지 않고서야 갑작스럽게 그리 변절할 리가 없지.”

녹스는 양쪽으로 나뉘어 앉은 귀족 가운데 서서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귀족 하나가 나섰다.

“그것을 라이네리오 공작께서 무슨 자격으로….”

쉿, 누군가 그에게 언질을 주듯 소리 냈다. 귀족은 어물어물 입을 다물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이런 말이 나올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공표하듯 입을 열었다. 공식적으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내 어머니, 올가 라이네리오를 잊으셨습니까.”

침묵이 이어졌다.

“본디 올가 안드라스 다이달론츠였던 제 어머니 말입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에겐 명분이 있었고 또한 혈통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나라엔 새로운 황제가 필요합니다.”

안델라스 후작이 손을 들었다.

“지금 폐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럼, 황제의 자리를 비워 두실 참입니까? 외국의 왕국들이 머리가 없는 제국을 가만히 두겠습니까?”

귀족파의 귀족들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귀족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엔 묘한 승리감이 어려 있었다. 오른편에 앉은 귀족들은 뒤늦게 눈치챘다. 저 자신만만한 얼굴들, 우위를 점한 짐승들 같은 저 눈초리들.

아, 이 상황을 우리만 모르고 있었다.

데미트리 안델라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당당히 어깨를 펴고 말했다.

“현재 이 제국에 남은 황족이 한 명밖에 없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이겠습니까.”

그가 형형히 눈을 빛내며 상대편을 바라보았다. 이에 녹스 라이네리오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에겐 그를 지지할 세력들이 충분히 있었다. 황제의 힘을 빌려 만든 세력이나 황제가 죽고 없는 지금, 그들은 온전히 녹스 라이네리오라는 끈을 타려 하리라.

차앙-!

녹스가 손짓했다. 양옆으로 정렬한 기사들이 한꺼번에 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손짓에 검을 바닥을 향해 내렸다. 검이 주는 날카로운 소리에 귀족들이 움츠러들었다. 누구도 항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명분과 혈통 그리고 세력까지 모조리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납득했다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검이 무서운 법이었으니.

“그리하여, 나 녹스 라이네리오가….”

그는 천천히 걸어 회의장의 가장 높은 자리로 향했다. 그가 그 자리로 걸어 올라가는 것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아주 당연하게도 황제가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 좌중을 내려다보았다.

“황제위를 물려받는 것에 이의가 있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

침묵.

또 침묵뿐이었다.

녹스가 빙그레 웃었다. 입술은 둥글게 올라가 있었지만, 눈만큼은 검은빛으로 날카로웠다. 앞서 의문을 표하던 귀족들마저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그때 안델라스 후작이 그 고요함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나 디미트리 안델라스는 다음 대 황제로 녹스 라이네리오를 지지하는 바이오.”

그러자 좌측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일어서서 각자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나 아이만 돌체는….”

“나 로쉐나 아이로스는….”

“나 메이든 도터는….”

그들은 하나가 되어 맹세했다.

“녹스 라이네리오를 다음 대 황제로 지지하는 바입니다.”

그들의 충성의 맹세가 끝나자 우측에 앉아 있던 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에겐 없는 것이 있었다. 중심이 되어 줄 자.

지금 황제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앉아 있는 녹스 라이네리오처럼 그들을 하나로 모을 만한 인물이 없었다. 우측에 앉아 있는 귀족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자 디미트리 안델라스 후작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두 손을 들었다.

짝짝짝-.

녹스 라이네리오의 편에 서 있던 귀족파들이 이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녹스는 이것이 모두 싸구려 연극 같아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 황제를 시해한 자에 대한 처벌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부족함 없이 처리하도록 하지.”

그것은 녹스 라이네리오가 죽고 없어진 펠티온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모욕이었다.

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제 오른팔에 숨을 끊기고 그를 사주한 자에게 황위를 물려줘야 하는 치욕을 업은 채 너는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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