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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54화 (154/158)

제154화

녹스 라이네리오가 일단 황제 대리로 그 자리에 앉자 회의는 귀족파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아니, 이젠 ‘황제파’라 칭해야 할 것이다. 녹스 라이네리오가 황제위를 물려받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 말고 내세울 다른 황족이 없었다. 희미하게 황족의 피를 물려받은 자가 있다 하더라도 녹스 라이네리오보다 계승 서열 순위가 높을 리 없었다. 본디 황제파와 중립파였던 귀족들은 귀족파를 이끌던 녹스 라이네리오가 다음 황제로서 이름을 올리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녹스가 선심 쓴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일단 전 황제 폐하의 장례식이 먼저겠지.”

“장례식은 최대한 간소하게 치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바깥에 크게 알려 좋을 게 없습니다.”

데미트리 안델라스 후작이 말했다. 누가 봐도 그에게 아첨하는 말이었으나 녹스는 그게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전 황제의 세력을 축소 시키기 좋은 방법이었다.

“폐하의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르겠다니요!”

“분명 전 폐하께서 돌아가신 이유가 세간에 돌 텐데, 오른팔처럼 여기시던 귀족의 손에 살해당했다는 말을 굳이 널리 알릴 필요가 있습니까?”

“하지만…!”

녹스가 손끝을 까딱였다. 그의 곁에 서 있던 시종장이 손을 들었다. 그가 손을 들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입을 다물자 녹스가 천천히 말했다.

“장례식에 대해선, 안타깝게 생각하네. 하지만 안델라스 후작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녹스는 자신의 손에 들어온 권력을 그냥 쥐고만 있을 생각 따윈 없었다.

“다만 전 황제 폐하이신 펠티온 안드라스 다이달론츠를 살해한 할리드 비아에게서 반드시 사주한 자의 이름을 끄집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그 말에 기묘한 분위기가 회의장을 휩쓸었다. 할리드와 펠티온 둘 다 이상하리만치 녹스 라이네리오에게 집착했다. 할리드 비아가 어째서 황제를 배신했는지는 모르나 가장 큰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그 자리엔 녹스 라이네리오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사주한 자를 찾아내겠다니?’

정말 녹스 라이네리오가 할리드 비아의 행동에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그 누구도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니 그대들은.”

녹스가 여유로운 투로 말했다.

“돌아가서 기다려.”

이것은 명령이자 통보였다. 모든 것이 짜여진 판이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라는 인물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는 황제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할리드 비아가 그의 사주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증거가 없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대관식도 치르지 않았으나 이미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기반으로 벌써 황좌에 앉은 듯했다.

“…할리드 비아 공작, 아니 죄인을 사주한 자를 반드시 찾아 주십시오.”

“있다면 찾아지겠지.”

녹스가 심드렁히 대답했다. 본디 펠티온의 세력이었던 귀족이 이를 아득 물었다. 하지만 그것뿐, 곧 뒤를 돌아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녹스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의 눈치를 보던 자들도 하나둘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미 돌아가서 기다리라는 축객령이 떨어진 뒤였다. 자리를 뭉개고 앉아 있어 봤자 떨어지는 것은 없다는 소리였다.

귀족 중 하나가 회의장을 빠져나가며 자신의 시종에게 말했다.

“황궁에 있는 경비원들 중 매수해 놓은 자들에게 지하 감옥에 있는 할리드 비아를 감시해 보고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무슨 자신감인 거지?”

귀족은 그 무엇도 예측할 수 없었다. 만약 녹스 라이네리오가 정말로 할리드 비아를 사적인 감정으로 조종해 움직인 거라면 사주한 자를 저리 적극적으로 찾겠다 나서는 게 이상했다.

만약 그가 사주했다면 최대한 빨리 황제를 시해했다는 죄목으로 목을 잘라야 함이 옳다. 하지만 녹스 라이네리오는 사주한 자를 알아내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할리드 비아를 ‘고문’하겠다는 말이었다.

귀족들이 돌아가고 난 후, 안델라스 후작이 아직 황제의 자리에 앉아 있는 녹스를 향해 말했다.

“…할리드 비아를 어찌하실 작정입니까.”

그러자 녹스는 그에 대한 답 대신 시종장을 불렀다.

“시종장.”

“…예, 전하.”

시종장이 선택한 호칭은 전하였다. 남은 황족이 그뿐이라고는 하나 아직 황위를 정식으로 물려받지는 못한 존재. 녹스는 그가 애쓴다는 생각이 들어 설핏 웃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제 명령을 전달했다.

“황궁 최고의 고문 기술자를 불러라.”

“예?”

“왜, 내 말 하지 않았나.”

녹스는 지겹다는 얼굴을 했다.

“사주한 자를 알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시종장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녹스의 검은 눈동자를 아무리 바라보아도 그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그의 눈은 검은 바다와도 같았다. 그 깊이가 어떤지 무엇이 담겨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한동안 나는 황궁에 지내며 황제 폐하께서 맡던 일을 이어받도록 하지.”

“아,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녹스 라이네리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오며 말했다.

“자네를 뺀 모든 시종은 최대한 빨리 내보내도록.”

“…네.”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를 그 누구보다도 깊게 모시던 자들을 곁에 두어 좋을 일이 없었다. 다만 그중에서도 제일이라 할 수 있는 시종장을 내버려 두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당장 이 체계를 유지해야 하는 최소한의 장치는 필요하니까. 시종장은 생각했다. 최소한의 정리를 마치고 나면 자신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녹스 라이네리오가 중앙을 걸어 문밖으로 나서자 데미트리 안델라스 후작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누가 뭐라 해도 그는 녹스의 측근이었다. 이제 황제나 다름없는 녹스의 세력이 된 자들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 황궁에서 지금 녹스 라이네리오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황제의 자식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시종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미 지나간 후회일 뿐이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피로 얼룩진 집무실 대신 같은 층의 다른 방에 들어서며 궁인들에게 명령했다.

“보고 있던 서류는 전부 옆 방으로 옮겨라. 일이 이렇게 되었으나 황궁이 제 기능을 못 해서는 안 되지.”

그의 핑계는 그럴 듯했다. 그리고 그에겐 앞서 말했듯 자격이 있었다. 궁인들은 황제가 없는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황족의 피를 이어받은 녹스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었다.

궁인들의 눈짓이 수없이 오갔다. 하지만 그들은 녹스의 시선이 제게로 스칠 때마다 순종적으로 시선을 깔았다. 별다른 힘이 없는 그들은 그저 권력이 흘러가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물갈이를 하는 게 좋겠군.’

녹스는 황제, 펠티온에게 익숙해졌을 궁인들을 떠올리며 속으로 찬찬히 우선순위를 정했다.

그렇게 녹스 라이네리오가 황제가 기거하던 곳으로 들어갔을 때, 지하에선 할리드 비아에게서 사주한 사람을 알아내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드륵, 드르륵.

지하 감옥은 축축하고 어두웠다. 습한 냄새가 났으며 의자에 꽉 묶인 손발이 저렸다. 할리드는 드륵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쇠창살 밖으로 갈색으로 얼룩진 트레이 하나가 천천히 굴러오고 있었다. 그것을 밀고 오는 자는 어두운 곳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흰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노인인 건지 아니면 그저 머리가 흰 것인지 모를 자는 얼굴을 반쯤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가 철창 앞에 도착하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들이 쇠창살의 문을 열었다.

드르륵, 감옥 안으로 트레이와 함께 정체 모를 남자가 들어왔다. 할리드 비아는 어둠 속에서도 푸르게 빛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보며 정체 모를 남자가 웃음소리를 냈다.

“황제 폐하. 아니, 이젠 전 황제 폐하라 함이 옳겠군요.”

그의 목소리는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청년 같다가도 끝이 긁히듯 내려가 노인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는 즐거움을 감추지 못한 채 트레이 위에 놓여 있는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작은 집게였다. 끝이 아주 날카로운.

“라이네리오 공작 전하께서. 아니, 아니지.”

그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새로운 황제 폐하께서 명령하시기를 그대의 입에서 전 황제 폐하를 시해하란 명령을 내린 자의 이름을 꼭 받아 내라 하시더군요.”

할리드는 이를 악물었다. 녹스의 생각을 완전히 읽을 수는 없으나 할리드는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뒤집어쓰고 이 세계에서 사라지리라.

어쩌면 그가 행복해질 수도 있을 미래를 선물하고 말겠다고.

자신의 지옥에 더 이상 그를 끌어들일 수 없다고.

“그러니 제게 너무 큰 유감은 가지지 마십시오.”

고문 기술자가 히죽거렸다.

“저는 그저 명령을 따르는 것뿐이니까요.”

그는 들고 있던 쇠 집게를 묶여 있는 할리드의 손 가까이로 가져갔다.

시작은 손톱부터.

끄득. 손톱 아래로 억지로 파고든 쇠 집게가 입을 벌렸다. 할리드는 이를 악물었다. 목과 턱 아래로 핏줄이 섰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퍼뜩 몸을 움찔거렸으나 단단히 묶인 몸은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끄득, 끄드득.

집게는 더욱더 손톱 아래로 파고들었고 이내. 콰득 소리를 내며 손톱이 부서졌다. 온몸이 벌벌벌 떨렸다. 고문 기술자는 얼굴을 반이나 가리고 있음에도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이 숨겨지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당신에게는 아직 단단한 손가락이 그리고 뒤틀 수 있는 관절이, 벗길 수 있는 피부가. 날 즐겁게 해줄 그 모든 것이 남아있거든요.

할리드 비아는 손끝을 자르는 고통 속에서도 녹스 생각을 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얼굴. 마지막에 한참을 바라보았던 그 무미건조한 얼굴을 떠올리며 끝까지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이것은 할리드 비아가.

언젠가 그를 사랑했던, 그리고 사랑하고 있는 자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비록,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채 그의 속에서 바스러진다 하더라도.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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