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과연 저걸 할리드 비아라고 부를 수 있을까. 피투성이 고깃덩이 같은 모습을 한 그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 푸른 눈동자가 그가 할리드 비아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무엇을 그리 지키려 하지?”
“…….”
대답이 있을 턱이 없었다.
“네가 지키려는 건 그저 네 자신일 뿐이야.”
녹스가 차갑게 일갈했다.
“네가 지킬 것은 아무것도 없어.”
할리드 비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그런 그의 모습이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네 스스로에 취해 날 사랑한다 여겼을 뿐이잖아.
날 진짜 사랑했다면 그래선 안 됐지. 아니, 그렇게는 못 하지. 결국 과거에 취해, 이젠 없는 녹스라는 ‘도련님’이라는 환상에 취해 휩쓸린 것뿐인 거잖아. 그리하여 녹스 라이네리오는 직접 물었다.
“왜 내 이름을 말하지 않지?”
답이 없었다.
“내 이름을 꺼냈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고 편안히 죽었을 텐데.”
이번에도 역시나 답이 없었다.
녹스는 속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가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설마, 사랑? 녹스는 그따위 것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손을 들어 철창을 강하게 내리쳤다.
콰앙!
“대답해!”
그러자 그를 바라만 보고 있던 푸른 눈이 다 찢어진 입술을 벌려 바람 새는 소리를 내었다. 핏물로 흰자위가 붉게 물든 그 눈은 녹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고 존재하지 않는 어디 먼 곳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할리드 비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고통, 감당할 수 없는 고문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녹스 라이네리오가 진짜인지 아니면 자신의 환상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할리드 비아는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다신 녹스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일까? 할리드는 이게 가짜라 할지언정 제 눈앞에 다시 나타난 녹스의 모습에 제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나지막이 내뱉었다. 녹스 라이네리오가 결코 인정할 수 없을 그 말을.
“……합니다.”
“…….”
“사랑, 합니다.”
제가 비록 당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그를 비웃고 싶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비웃음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악물었다. 눈은 커다랗게 뜨였고 꽉 쥔 주먹은 가늘게 떨렸다.
“네가 사랑하던 도련님은 애저녁에 죽었어.”
녹스가 냉랭하게 일갈했다.
“네가 죽였고.”
할리드의 몽롱한 시선이.
“전 황제가 죽였고.”
그저 이대로 침묵을 지키다 죽어 버릴 거라 맹세한 그 뜻이.
“내 어머니가 죽였고.”
전부 지긋지긋했다.
“그리고 내가 죽였는데 대체 누굴 사랑하고 있는 거지?”
이미 망가진 나를 아예 못 쓰도록 망가뜨린 게 너야. 결국 네가 사랑하던 도련님을 죽인 건 넌데. 이제 와 사랑한다고? 그 말을 입 밖에 낸다고?
끝까지 이기적이구나. 이제 곧 끊어질 목숨이라고 무슨 말이든 막 내뱉는 건가? 녹스 라이네리오는 한 발자국 물러서 머리를 쥐어 잡았다. 이미 죽은 자에게 바치는 사랑이란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때 쉰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도련님.”
“…….”
“녹스.”
할리드는 잘 발음되지 않는 혀를 겨우 움직여 말했다
“당신이, 숨을 쉬는 한, 저는 당신을 욕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고해성사에 가까웠다.
“당신이 날 버렸어도, 내가 당신을 망가뜨렸어도, 변하지 않는 게 이 지긋지긋한 욕망이었습니다.”
녹스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금방이라도 숨이 꺼져 버릴 것 같은 할리드 비아를 바라보았다.
“지금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할지라도 언젠가 또, 주제넘은 욕심을 품을지도 모릅니다.”
할리드 비아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자신이 내뱉는 말이 무슨 뜻인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나 할리드 비아는, 자신이 그리고 녹스가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는 알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니 제 목을 치시고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자리에 오르십시오.”
당신을 상처입혔던 자들의 목을 모조리 자르고, 이젠 그 누구도 당신을 상처입힐 수 없는 세상에서 사십시오. 할리드 비아는 마치 꿈속에서 헤매는 듯 중얼거렸다. 녹스는 하얗게 질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게 사랑이라고?
이제 와 사랑이라고?
녹스 라이네리오는 뒤로 두어 발자국을 물러섰다. 그리고 빠르게 한 발을 반대쪽으로 내디뎠다. 이 지하 감옥에서 어서 벗어나야 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이 눅눅하고 피비린내 나는 지하의 공기가 폐부를 눌렀다. 정확히는 할리드 비아라는 존재가 제 목을 강하게 졸랐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그렇게 도망치듯 지하를 벗어났다. 할리드 비아는 녹스가 떠나 버린 자리를 하염없이 보고 또 보다 감옥 안쪽까지 비추지 못하는 횃불을 바라보았다.
아, 다행이다.
그가 제 꼴을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조그만 동정이라도 갖지 않게 되어서.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았다.
지하 감옥 위로 뛰쳐나온 녹스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헛구역질을 했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스테리온이 다급하게 녹스의 몸을 받쳤다.
“공작, 아, 아니 전하!”
“하아, 윽….”
에스테리온은 그의 몸을 안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가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곳으로 서둘러 옮기기 시작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차가워지는 손끝을 느끼며 올라오는 구역질을 삼키기 위해 애썼다. 그것은 할리드 비아의 같잖은 고백에 대한 구역질이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그의 말에.
그 빌어먹을 말에.
조금이나마 그것이 사랑일 수도 있겠다고 인정해 버린 자신에 대한 구역질이었다.
에스테리온은 그를 가까운 손님방으로 옮겼다. 황제가 사용하던 침실은 그가 안정을 취하기에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하아….”
“이제 좀 괜찮으십니까?”
“…그래.”
에스테리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 묻고 싶었지만 반대로 묻고 싶지 않기도 했다. 할리드 비아라는 존재를 증오해 마지않는 그가 이런 얼굴을 하는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녹스가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또한 모르기를 바랐다.
녹스의 표정은 마치…….
그래, 마치.
“…에스테리온.”
끔찍한 사랑 고백을 받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속이 이상해.”
“어떻게 말입니까.”
“전부 비워 버리고 싶어. 그게 내장이라도 상관없으니 뜯어내 속이 텅 비어 버렸으면 좋겠어.”
“…….”
에스테리온은 천천히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녹스의 손을 놓지 않고 꼭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여기서 그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까. 에스테리온은 자신의 욕심을 알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자라나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아 버린 싹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것이 남들에겐 하찮아 보일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자신이 어떻게 해야….
“당신이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당신이 무엇을 하더라도 그게 혹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 할지라도.”
에스테리온은 미간을 찡그린 채 웃었다. 할리드 비아가 살아 있어선 안 된다.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그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옳다. 하지만 만약에 당신이 그자를 조금이라도 살려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면….
“언제나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내가 그 어떤 어리석은 선택을 하더라도?”
“예.”
녹스 라이네리오는 헐떡이며 웃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여기저기 전부 머저리에 천치뿐이야.”
“그럴지도 모르지요.”
에스테리온은 조용히 그의 한 손을 잡은 채 입을 다물었다. 고요히 시간이 흘러갔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천천히 감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눈물은 메말라 버린 듯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배라도 갈라 내장이라도 비워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고 가슴 한구석을 꽉 메운 감정을 온전히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을 천천히 궁리했다.
“나는….”
녹스가 천천히 입을 열자 에스테리온은 그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습니다.”
에스테리온의 목소리에 녹스는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래,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이 결정할 일이다.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이 후회하고, 자신이 감당할 일이다.
스스로 만든 자리에 대한 무게는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녹스는 겨우 자신을 진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스테리온이 그런 그를 부축하려 했지만 녹스는 천천히 그 손을 밀어냈다.
스스로 서야 했다.
망가지고 부서진 자신을 제가 스스로 이어 붙여야만 했다. 녹스는 다짐했다. 앞으로 아무도 자신을 망가뜨리지 못하리라. 쓰러뜨리지 못하리라.
기필코 다시는 무너지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런 자의 곁에는.
그를 지키는 번견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 * *
펠티온 안드라스 다이달론츠의 장례식은 말 그대로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외국에서 온 귀빈도 없이 제국의 귀족들만이 모인 자리는 텅 비어 보였다. 궁 밖의 백성들이 황제의 죽음에 검은 깃발을 꽂았으나 고작 그것뿐.
저 검은 깃발들은 새로이 황좌에 앉을 남자에 의해 순식간에 금색 깃발로 바뀌리라.
녹스 라이네리오는 단단히 못 박힌 관을 내려다보았다. 겨우 머리를 이어 붙인 시신은 곧 땅에 묻혀 썩어 갈 것이다. 녹스는 펠티온의 죽음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네가 원하던 원망도 증오도 쥐여 주지 않으리라. 녹스는 조용히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의 곁에 있는 자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그리고 그 한마디를 남긴 채 녹스 라이네리오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직 장례식이 한창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녹스는 검은 천이 깔린 길을 걸으며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부셨다. 하지만 그 빛을 받고도 그의 눈은 한없이 어두웠다.
장례식은 초라하게 끝났고 이제 남은 절차들은 시간문제였다.
모든 것이 녹스의 발아래로. 가장 낮은 노예로 추락했다 다시금 상공으로 뛰어오른 자의 손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