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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남자의 노예가 되었다-157화 (157/158)

제157화

황궁은 새로운 황제의 즉위식을 준비하느라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이제 새로이 황제파가 된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로 인해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커다란 규모의 즉위식을 치르기로 하였다.

해외의 귀족은 물론, 왕족들까지 모두 초대했기에 황궁 전체를 단장하기 바빴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자신의 즉위식을 자신이 준비해야 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많은데 즉위식까지 준비하려니,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공작저의 보좌관들을 전부 빼 와, 일을 시켜도 잘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으니….

“잠시라도 눈을 붙이십시오.”

“오, 그대는 오늘 안 잘 모양이지?”

“…….”

에스테리온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한 명이 쉬면 한 명이 날을 새어야 할 정도로 일이 많았다. 십수 명에 달했던 황제의 보좌관들은 모조리 잘려 제 가문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사람을 더 뽑아야겠어.”

“지금, 지금 당장 필요합니다.”

보좌관 중 하나가 죽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어디서 사람을 구한단 말인가. 당장은 전 황제의 시종장도 눈코 뜰 새 없이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그래도 거의 다 마무리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으면 누구 하나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겠지.”

녹스의 말에 에스테리온이 입을 꾹 다물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내일이군요.”

에스테리온의 말에 녹스가 움직이던 펜을 잠시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감상에 젖을 시간 없어.”

“…잠시라도 안 됩니까.”

“그럴 시간에 서류 한 장 더 보는 게 훨씬 이롭지.”

녹스는 단칼에 그 말을 자르며 서류 하나를 또 넘겼다. 에스테리온은 익숙하다는 듯 그 서류를 자연스레 넘겨받았다. 그러고는 적당히 정리된 서류를 살피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문밖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저들은 누구냐 하면.

“마지막으로 입으실 옷을 점검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황제의 재단사들이었다. 당연히 기본적인 것은 다 했고 옷도 완성되었다. 그러나 즉위식 전, 마지막으로 입어보고 어디 어색한 부분이나 흠이 없는지, 행여 사이즈가 달라지진 않았는지 확인을 하려는 것이었다.

녹스는 한숨을 내쉬며 펜을 내려놓았다.

“거의 다 마무리되었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그래, 그럼 나는 이쯤 도망가 보도록 하지.”

녹스가 전혀 농담이 아닌 듯한 얼굴로 말했다. 에스테리온은 허허 웃으며 그를 문밖으로 쫓아냈다. 이제 황제 자리에 앉을 사람을 저리 천연덕스럽게 내쫓다니 그것참 용기가 가상하다.

“아! 폐하! 이리로 오십시오!”

그들은 이미 녹스를 폐하라 부르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 곧 그렇게 될 것이니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으나 그 호칭을 들을 때마다 감회가 새롭기는 했다.

녹스는 그들과 함께 자리를 옮겨 완성된 의상을 확인했다. 펠티온은 어떤 옷을 입었더라. 그가 황위에 오를 땐 지하 감옥에 처박혀 있었기에 아는 게 없었다.

“전 황제는 무슨 옷을 입었었지.”

그 말에 재단사들이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천천히 답했다.

“흰 제복에 황금 망토를 두르셨습니다.”

“그렇군.”

녹스는 자신의 앞에 준비된 옷을 바라보았다. 그의 옷은 희지 않았다. 오히려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만큼 검은 제복이었다. 이것은 녹스가 명령한 일이었기에 상관없었다. 검은 제복에 금색 자수와 금색 태로 이루어진 제복은 안쪽 옷감은 암녹색으로 처리되어 황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묵직해 보였다. 전 황제가 보이고자 했던 영웅 같은 행색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자신은 영웅이 아니었다. 비열한 뱀에 가까웠지. 뱀의 자식은 뱀이니라. 녹스는 가볍게 웃었다.

그의 미소에 재단사들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자들에겐 그가 그저 운 좋게 황위를 이은 자로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녹스 라이네리오와 황제 그리고 할리드 비아의 관계를 아는 자들은 이것을 결코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으리라.

녹스는 곁에 서 있던 궁인에게 가볍게 턱짓했다.

남들이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을 극도로 회피하던 그는 이제 궁인들의 손에 제 몸을 맡겼다. 언제까지고 유난을 떨 수는 없는 일이다.

궁인들의 시중을 받아, 즉위식 때 입을 옷을 걸쳐 본 녹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과거의 자신은 제가 이런 자리에 선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당장 어리석은 아비가 죽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

“문제없는 것 같군.”

“예.”

“이대로 진행하지.”

“알겠습니다.”

녹스는 목까지 잠가 둔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옷을 다시 갈아입은 후 방을 나섰다. 그의 뒤로 시종장이 따라붙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말없이 복도를 걷다 그에게 물었다.

“죄인은, 아직 살아 있나?”

“그렇습니다.”

“하하.”

녹스는 공허한 얼굴로 웃음소리를 냈다. 눈이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다고. 모든 걸 뒤집어쓰고 사라지기 위해서.

녹스는 사랑을 몰랐다. 그러나 펠티온이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았고 할리드가 하는 것이 애정이 아님을 알았다. 그렇다면 할리드 비아라는 남자는 대체 무슨 감정을 붙잡고 그 모진 고문을 버티고 있는 걸까.

녹스 라이네리오는 그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껏 입을 다물고 모든 걸 안고 가라앉으려 하는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녹스는 그의 감정을 짓밟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배신하길 바랐다. 그리하여 그 감정을 짓밟고 부수어 눈앞에 던져 준 후 그 무엇보다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하고 싶었다.

녹스는 만약 자신이 황위에 오를 때까지 그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할리드 비아를….

* * *

그렇게 또 시간은 흘렀다. 녹스 라이네리오의 황위 즉위식을 위해 두 달이라는 시간을 소비했다. 녹스는 영 탐탁지 않아 했지만 안델라스 후작을 필두로 한 황제파들은 녹스의 이름을 널리 알려야 한다며 채근이었다.

하긴 이전에 더러운 소문에 휩쓸렸던 몸이었으니 이참에 제대로 보여 주는 게 맞기는 했다. 물론 그 일이 전부 녹스와 그 보좌관들에게 몰린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차피 일 중독에 가까웠던 녹스는 기어코 그 빠듯한 일정을 모두 소화해 냈다.

“이번에 새로 황위에 오르신 분이 ‘그’라고요?”

“그러니까요. 누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요.”

“운이 좋았던 걸까요?”

“…차라리 그가 행운의 주인공이라면 마음이 놓이겠지요.”

황궁에 속속들이 도착하는 귀빈들은 저들끼리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래, 차라리 그가 가만히 있다가 행운의 끈을 잡은 거라면 마음 놓고 그를 축하하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게 그의 의도였다면 자신들은 이제부터 죽어라 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신세였다. 그가 바닥으로 추락했을 때 자신들이 어떻게 했던가. 그를 비웃고 모욕했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도 당연시 여겼다.

부디 그가 과거는 과거로 보아 주길 바라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물론,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진상품은 어디로 보낼까요!”

“시종장님, 베르테 왕국에서 보낸 진상품들이 들어옵니다!”

“시종장님!”

그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를 알기에 최대한 불화를 만들지 않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귀하고 값비싼 진상품들을 가지고 올라왔다. 그 개수가 어마어마하여 황궁의 창고가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그것은 황제 폐하의 궁, 창고에 넣거라. 그것은 별궁의 창고로!”

시종장은 궁인들을 이끌고 진상품들을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시종장님.”

“아.”

시종장이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보았다. 에스테리온 론더. 그였다. 이제 황제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보좌관. 본디 몰락 귀족 출신이었다고 했는데.

“이곳은 궁인들에게 맡기시고 저와 함께 연회장으로 가, 마무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폐하께서는 무얼 하고 계십니까.”

그 말에 에스테리온이 묘한 눈으로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전하가 아니라 폐하라고 부르시는군요.”

“…이제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군요.”

시종장과 에스테리온은 함께 곧 귀빈들이 들어설 연회 홀로 향했다. 연회 홀은 모든 준비가 끝마쳐져 있었다. 궁인들은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흐트러진 커튼을 정리하고 준비된 테이블의 꽃들을 옮기고 있었다. 이를 가리키는 자의 손끝이 새하얬다.

시종장은 문득 저런 궁인이 궁에 있었나 고민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자 옆에서 에스테리온이 설명했다.

“폐하께서 라이네리오 저택에서 데리고 온 하녀입니다. 뭐, 그냥 하녀는 아닌데. 그녀에게 홀에 관련된 일을 일임하셨습니다.”

“그렇습니까?”

하녀라면 분명 평민 출신일 텐데. 하지만 그가 보기에도 연회 홀은 완벽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황궁의 어떤 홀보다도 화려하고 생기가 넘쳤다.

폐하께서 입으실 검은 옷엔 조금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홀 자체로 보기엔 완벽했다. 아니, 오히려 폐하께서 검은 옷을 입으니 화사하게 꾸미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아, 론더 보좌관님!”

“그래요. 안젤라. 할 만한가요?”

“하하, 전 생각보다 재주가 많답니다.”

안젤라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는 메이드복 대신 궁인, 그것도 황제 직속 의복을 입고 있었다. 본디 황제의 시녀는 무조건적으로 귀족이어야 하나 녹스는 꽤 파격적인 조건으로 안젤라를 자신의 전용 시녀로 받아들였다.

“뭐, 열심히 해 봐야죠. 아, 그 화분 그쪽에 두지 마세요!”

안젤라가 바쁘게 뛰어갔다. 시종장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 에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에스테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점검하듯 살펴보다 슬쩍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시종장님께서 마지막 점검을 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에스테리온이 품 안에서 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두 시간 뒤 면 연회가 시작될 겁니다.”

이제 마지막만 남았다는 듯 에스테리온의 목소리는 살짝 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걸로 모든 이야기는 끝날 것이다. 정확히는 녹스 라이네리오의 불행이라는 길고 길었던 이야기가.

“모든 것은 완벽하게 돌아가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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