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에스테리온의 말엔 약간의 경고가 엿보였다. 이를 알아차린 시종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스테리온이 비밀스럽게 답했다.
“그러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죠.”
“…….”
제 주인님께서는 그리 잔인한 성정은 못 되어서 말입니다.
에스테리온이 아쉽다는 듯 말하며 몸을 돌렸다. 시종장은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 점검에 들어섰다.
그렇게 홀은 새로운 황제를 맞이하기 위한 단장을 마쳤다.
시간이 지나 화려한 홀의 문이 열렸고 해외에서 온 귀빈들과 제국의 귀족들이 하나둘 입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를 은근히 견제하면서도 내부의 분위기를 살폈다. 개 중에서 고개를 고고히 높게 쳐들고 다니는 자들은 당연히도 녹스 라이네리오를 지지했던 귀족들이었다.
과거 귀족파라는 이름을 가졌었지만 이제 녹스 라이네리오가 황위에 올라 자연히 황제파가 된 자들.
그들은 승리한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에게 발을 걸치지 못한 자들은 그들에게 은근슬쩍 다가가 말을 걸었고 해외의 귀빈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긴밀하게 살피기 바빴다. 권력의 추가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디미트리 안델라스 후작께서 폐하의 측근 자리를 꿰찼다죠?”
“폐하께서 복권되셨을 때 곧바로 손을 잡았다고….”
“그의 혜안이었을까요?”
“누가 먼저 손을 내밀었는지는 모르죠.”
“…모든 걸 폐하께서 보고 계셨을까요?”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노예까지 전락했다 황제 자리에 오른 남자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다. 어찌 일이 이리될 줄 알았을까.
그들이 그렇게 웅성거리는 사이, 시간은 어느덧 정각을 가리켰다. 중앙의 문이 열리고 나팔이 울렸다. 귀족들은 붉은 카펫의 양옆으로 나뉘어 일제히 문을 바라보았다.
문지기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알렸다.
“다이달론츠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께서 드십니다!”
아직 그는 황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황제가 되기 위해 이 붉은 길을 밟았다. 녹스의 등장과 함께 그의 검은 제복이 보였다. 등 뒤로 가볍게 흩날리는 검은 망토의 안쪽은 짙은 녹색이었다.
바닥을 밟은 구두는 광이 없었으나 반듯하고 단단해 보였다. 녹스는 그곳에 자리한 수많은 귀족은 전혀 보지 않은 채 오로지 앞만 보고 걸었다. 지금 이 붉은 길은 오로지 그 혼자만 밟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어떤 측근도 없이 홀로 고고히 붉은 길을 걷는 녹스의 존재감은 결코 작다 할 수 없었다. 새까맣게 벼려진 검 같은 시선이 황좌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그에게 왕관을 하사할 전 황제도, 황후도, 황족도 없었다. 이제 이 제국에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황족. 녹스 라이네리오는 홀로 계단을 올라 붉은 쿠션 위에 놓여 있는 왕관을 스스로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다보며 삐딱하게 웃곤 제 머리에 얹었다.
“광대가 된 기분이군.”
녹스의 냉소적인 말에 귀족들이 몸을 굳혔다. 그는 왕관을 머리에 이고 천천히 황좌에 앉았다. 노예로 떨어졌던 자가 앉을 수 있을 거라 상상도 못 했던 그 자리에.
이 장면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붉은 황좌는 마치 전대 황제가 흘려 놓은 피 같았다. 그 붉은 색을 검은 망토로 감추며 녹스 라이네리오가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안델라스 후작이 박수를 쳤다. 그 박수 소리를 시작으로 홀은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의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녹스는 심드렁하게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 시종장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이에 시종장이 손을 올리며 외쳤다.
“좌중 침묵하시오!”
그 말에 박수가 뚝 멈추었다. 녹스는 천천히 그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시종장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즉위식을 계획할 때부터 끼어 있던 그 기묘한 공백이 무엇을 위해서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전 황제를 시해한 죄인을 데리고 오거라.”
사람들이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황제, 녹스가 입장하고 난 뒤 닫혔던 문이 다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보인 것은 눈을 두기 괴로울 정도로 끔찍하게 망가진 할리드 비아의 모습이었다.
“세상에.”
“웁.”
누군가는 그 잔인한 모습에 고개를 돌렸고 누군가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제대로 걷지도 못해 양쪽에서 자신의 팔을 틀어쥔 기사들에게 질질 끌려오다시피 했다.
그의 피가 붉은 카펫을 갈색으로 물들였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그를 시린 눈동자로 내려다보았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기사들이 그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털썩, 그 고깃덩이 같은 몸이 무릎을 꿇더니 이내 바닥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황좌에 다리를 꼬고 앉은 녹스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손등에 턱을 괴었다. 그리고 그 가만히 그에게 물었다. 마치 마지막으로 묻는다는 듯이.
“죄인 할리드 비아에게 묻겠다.”
녹스의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다만 검은 눈은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대에게 전 황제를 시해하라 명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 감정은 기대였다. 할리드 비아가 자신을 배신하고 제 이름을 내뱉기를 바라는 기대. 사랑이라 불리던 감정은 그저 네가 취한 환상일 뿐이었다고 비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눈동자로.
붉은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다 꺾인 손바닥이 바닥을 짚더니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빛을 잃은 푸른 눈이 녹스 라이네리오를 바라보았다. 이젠 그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자리에 앉은 그를 본 할리드 비아는, 그것이 너무도 기꺼웠다.
할리드는 그가 자신에게서 어떤 답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 숨 쉬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할리드는 그것이 녹스 라이네리오가 겪었던 일이라는 걸 되새기며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녹스가 제게 줄 마지막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하여 할리드 비아는 마지막 목소리를 내었다.
“…절 사주한 자는.”
그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홀의 모든 귀족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황제가 된 녹스 라이네리오의 이름이 나올지 아니면 다른 자의 이름이 나올지. 저렇게까지 고문당했다면 그 어떤 이름이라도 주워섬길 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국.
“아무도, 아무도 없습니다.”
침묵.
그 커다란 홀에서 사람의 숨소리 한 점 들리지 않았다. 마치 죽은 자의 관 속 같았다. 그 누구도 큰 한숨 한 번 내쉬질 못했다. 입을 다문 채 녹스 라이네리오, 황제 자리에 앉은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이내.
“아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한 손으론 얼굴을 가리고 허리를 숙여 가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한없이 웃었다.
그래, 지키고 싶은 게 있다는 거구나. 그게 이미 죽어 버린 녹스 라이네리오라는 도련님이든 아니면 이제 황제 자리에 앉은 나라는 남자든.
네가 얼마나 비열하고 어리석었는지를 떠나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킬 수는 있는 놈이기는 했구나. 녹스 라이네리오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홀의 분위기는 점점 기괴해 졌다. 끅끅대는 웃음소리가 이어져 홀의 천장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모두가 얼어붙어 있을 때, 그의 웃음소리가 돌연 멈췄다.
그리고 녹스의 입이 열렸다.
“황족을 살해한 할리드 비아는 교수형에 처해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하여 황제 녹스 라이네리오는 아무런 오점 없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이 있었다.
“다만 나 녹스 안드라스 다이달론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전대 황제에게 받았던 마지막 면제권을 사용하여 황제 시해 죄를 무로 돌리며.”
순간 주변에서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그의 죄를 사하도록 한다.”
“말도 안 됩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안델라스 후작이었다. 후작의 외침에 검게 물든 눈동자가 그에게로 향했다. 안델라스 후작은 여기서 할리드 비아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녹스 라이네리오의 비밀을 쥐고 있는 자가 살아 있어선 안 된다. 그로서는 녹스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런 자를. 자신을 유린했던 자가 아니던가. 인생의 오점이라 할 수 있는 존재를 어째서 살리려 드는가. 녹스는 안델라스 후작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다만 그의 작위는 그 자식 대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며 그의 모든 영지와 권한은 황궁에 귀속될 것이다.”
지금의 공작 지위를 유지하되, 그저 허수아비 공작으로서 남으라는 소리였다. 할리드 비아는 고개를 든 채 녹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속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묘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를 계속 볼 수 있다고?
그의 미래에 자신이 함께할 수 있다고?
그것이 비록 이상적인 방법은 아니라 하더라도 같은 하늘 아래에 살아 숨 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달리 보였다.
할리드의 푸른 눈이 빛났다. 녹스는 기괴하게 살아나는 그 빛을 보며 조소했다.
녹스 라이네리오. 그의 즉위식은 그 어떤 황제의 즉위식보다 소란스럽게 끝을 맞이했다.
즉위식 후 파티가 있었으나 황제는 죄인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 * *
녹스는 파티를 뒤로하고 자신의 뜻대로 뜯어고친 황제의 침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테라스 문을 활짝 열었다. 그는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사랑이라.”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스스로가 내뱉은 단어가 지나치게 낯설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할리드 비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해 냈다.
“허.”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비웃었다. 그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황제가 된 녹스는 그의 사랑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그걸 사랑이라 부를 수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가 그를 살린 것은.
“폐하.”
“들어와.”
궁인의 목소리가 들리고 곧 끼이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들어선 것은.
“황궁 치유사가 능력이 좋긴 좋아.”
하긴, 심장이 꿰뚫렸던 나 역시도 살려 냈으니 실력이 좋기는 좋겠지. 그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이제 두 발로 설 수 있게 된 할리드 비아는 고개를 들어 녹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테라스 앞에 서 있었다. 황궁의 가장 높은 곳. 떨어지면 그대로 숨이 끊길 수 있는 곳.
할리드 비아는 가슴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테라스 앞으로 다급하게 다가가 기듯 무릎을 꿇었다. 녹스는 천천히 테라스 난간을 등지고 돌아서 할리드를 바라보았다.
다 벗겨졌던 피부도, 갈라졌던 살갗도 전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왜 널 살렸는지 아나?”
“모릅니다.”
“머리가 멍청한 건 죽었다 살아나도 고쳐지지 않나 보군.”
“예.”
할리드 비아는 그저 그만을 멀거니 바라보며 그의 말에 답했다. 녹스 라이네리오는 난간에 천천히 기대었다. 할리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할리드 비아는 지금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를 한 번 잃을 뻔했던 기억이, 이제 와 모든 게 끝난 지금 그를 불안케 하고 있었다.
“네 감정은 사랑이 아냐.”
할리드는 다급히 응했다.
“그렇습니다.”
“그딴 걸 사랑이라 부를 순 없어.”
“예.”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할리드 비아는 순종적이었다. 멍하게 빛나는 푸른 눈으로 그를 좇았다. 할리드가 좇는 녹스의 눈은 여전히 검었다. 이렇게 아무도 손 뻗을 수 없는 자리에 앉고서도 결국. 할리드는 그것이 주제 넘는다는 걸 알면서도 진심으로 슬퍼했다.
할리드는 무릎을 꿇은 채 그에게 속삭였다. 아니 빌었다.
“당신이 죽으라 할 때 죽겠습니다. 무엇을 명하시든 이행하겠습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 당신께 제 믿음을 증명할 것입니다.”
그의 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그러니 더럽고 지저분한 일은 모두 제게 내리십시오.”
할리드의 얼굴엔 오로지 후회뿐이었다.
“저는 그리하다….”
전부 꺾였다 도로 붙어 뼈들이 삐거덕거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할리드는 감히 녹스의 손끝을 붙잡았다.
“모든 걸 끌어안고 죽겠습니다.”
녹스는 그런 할리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테라스 난간에서 등을 떼어내고 앞으로 걸었다. 그리하여 할리드의 앞에 선 그는 손을 뻗어 할리드의 머리카락과 뺨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할리드 비아.”
그리하여 그는 할리드 비아라는 자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내 예쁜….”
녹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개.”
할리드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더니 곧 그는 백치처럼 환하게 웃었다.
“예.”
할리드는 그 호칭마저도 기꺼워하며 그의 손끝에 입 맞추었다.
할리드는 녹스의 뜻을 기꺼이 따랐다. 개의 애정은 그저 개의 애정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말했다.
“사랑합니다.”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을 품에 안았다.
녹스는 테라스 난간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드높게 푸르렀고 저 선만 넘으면 여전히 모든 걸 끝낼 수 있다는 충동이 아직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녹스 라이네리오는 다신 무너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의 불행은 비로소 끝이 났다. 이제부터 그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스스로 제국을 손에 쥔 자.
바닥까지 떨어졌다 누구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고귀한 황좌를 차지한 자.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공포가 될 자.
불행하고 어리석었던 녹스 라이네리오를 묻고 그 위에 선.
황제, 녹스 안드라스 다이달론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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