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 / 0111 ----------------------------------------------
1장, 다시 만난 세계.
“하아.”
눈을 번쩍 떴을 땐 낯선 아파트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윤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기억의 잔재들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사정없이 아프게 찔러대었다.
“꿈이었나.”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얼굴을 연거푸 쓸어내렸다. 밤새 흘린 눈물에 손바닥이 흠뻑 젖었다. 악몽의 여운은 지독해서 식은땀으로 푹 젖어버린 몸은 쇠사슬을 칭칭 감은 양 무거웠다. 한참을 석상처럼 앉아 있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무릎을 꿇고 앉은 윤은 호면을 앞에 내려놓고 옷을 정돈했다. 호완이 비뚤어지지 않았는지, 갑과 갑상이 느슨하게 묶이진 않았는지 점검했다. 그리고 천천히 머릿수건을 감고 호면을 썼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죽도를 쥐고 똑바로 앞을 보며 중단 겨눔 자세를 취했다.
“하앗!”
죽도가 빠르게 타격대를 치고 지나간다. 한 번, 두 번, 세 번. 윤은 검도를 하며 수런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온몸이 땀에 젖도록 훈련에 매진하던 그에게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날아든다.
“독한 놈. 벌써 일어났냐.”
친구 현일이 팔짱을 낀 채 문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윤이 웃자 “웃지마, 임마. 진짜 선수도 아닌 놈이.”하고 핀잔을 준 현일이 웃는 얼굴을 돌연 거두었다. 숱한 미남 미녀만 보아온 윤의 눈에도 잘생겼다고 표현할 수 있는 친구였다.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기세를 끌어올리자 매섭고 사나웠다.
“어때, 한 판?”
“좋아.”
두 사람의 대련은 약식례로 이루어졌다. 나란히 마주보고 선 현일과 윤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상대방에게 예를 표했다.
마주 선 상태로 서로에게 죽도를 겨누었다. 처음은 죽도의 끝을 마주 대며 상대방의 기량을 가늠한다. 먼저 공격에 나선 건 현일이었다.
“하앗!”
현일이 머리치기를 위해 재빠르게 검을 들어 올린 순간 윤은 손목을 쳐서 공격의 흐름을 빗겨냈다. 그리고 현일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현일은 그것을 막지 못했다. 딱! 죽도와 호면이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가 났다.
다시 검을 거두고 경계. 죽도의 코등을 맞댄 채 몸싸움을 했다. 호면 너머 보이는 현일의 남자다운 눈매가 기세등등했다.
현일보다 머리 하나 쯤 작은 윤이지만 쉽게 밀리지 않았다.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현일의 안쪽인 빈틈으로 달려들었다. 진각을 밟으며 허리를 재빨리 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두 번째 공격은 목젖을 찔러 들어가는 공격이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두 번째 공격에 현일은 무력하게 당하고 말았다.
현일은 고개를 흔들어 윤의 공격을 파악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분명 동갑내기 친구이고, 검도를 배워온 시간도 비슷한데 어느 순간 윤은 현일이 따라잡을 수 없는 먼곳으로 나아가 있었다.
“그만!”
10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현일은 수십 번 머리와 옆구리, 손목을 얻어맞은 후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흔들었다. 그의 선언에 윤이 멈추어 섰다. 천천히 검을 거두어 다시 마주보고 섰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둘은 무릎을 꿇고 앉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윤은 호구를 벗고 머릿수건으로 이마에 괸 땀을 닦아냈다. 곧바로 호면을 마른 수건으로 닦으며 장비 정리에 들어갔다. 이때만큼은 수다스러운 현일도 조용했다.
“아침부터 피곤하지도 않냐, 대련을 하게.”
데퉁스러운 목소리의 정체는 검도장으로 출근한 현일의 형, 김현오 사범이었다. 출근한지는 오랜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구석에 서서 대련을 지켜보던 차였다. 아침 일찍부터 수련에 매진하는 모습이 흐뭇했으나 솔직하게 못하지 못한 성격답게 빈정거리는 말투로 퉁박을 주었다.
“형, 언제 왔어?”
현일이 손을 흔들었다.
“사범님 오셨어요?”
김 사범이 도장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지만, 윤은 모르는체하며 그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쿵쿵거리며 다가온 김현오 사범이 현일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쥐어박았다.
“악! 형 왜 때려?”
“도장에선 사범님이라 부르라 했지. 해윤이처럼 좀 예의바르게 굴란 말이야.”
“사범님은 무슨. 아야!”
한 번 더 현일의 머리를 후려친 김 사범이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아쉽다. 아쉬워.”
“뭐가요?”
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해윤! 너 말이야. 너, 지금이라도 선수 복귀 안할래?”
“됐어요.”
김현일 사범은 윤의 재능과 실력을 무척 아깝게 여겼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전국 체전에서 우승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녀석이다. 작은 체구가 단점이긴 했으나 그 부분을 보완할 민첩성과 완력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천재라고 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윤은 고3 봄 날 돌연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결심을 철회시키기 위해 감독과 사범이 어르고 달래고 혼냈지만, 소용없없다. 윤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그만두겠다는 말만 반복할 뿐,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김 사범은 순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한 정해윤이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당해낼 자가 없다는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운동을 그만둔 지금은 현일의 대련 상대나 종종 해줄 뿐이다. 그러나 검도장에 나와서 수련을 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결코 은퇴한 사람의 솜씨가 아니기에 김 사범은 윤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 막 끝낸 대련도 그렇다. 말석이긴 하지만 국가대표에 이름을 올린 현일을 압도하지 않았던가.
“혹시 공백기 때문에 그래? 너 지금이라도 복귀하면 대회에서 우승은 문제도 아니야. 내가 보기엔 그래.”
“에이, 현오 형은 날 너무 치켜세우는 거 같아요.”
윤이 손을 내젓자, 김 사범이 “어쭈?” 하고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가 널 뭣 하러 치켜세워. 암만 봐도 김현일 저놈보다 네가 훨씬 나으니까 하는 말이야.”
“전 지금이 좋아요.”
윤은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김 사범은 심란한 표정으로 제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역시 그 사고 때문이려나. TV에서도 제법 시끄러웠던 사고는 윤이 방황할 이유로 충분했다. 그러나 김 사범은 포기하지 않았다.
“유명 선수가 되면 너도 좋잖아.”
검도는 생활 체육이긴 하지만 비인기 종목에 가깝다. 올림픽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권위 있는 대회도 많았고 실업팀도 존재했다. 윤 정도 되는 실력이면, 밥 먹고 사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을 게 틀림 없다.
현재는 검도의 종주국인 일본에게 밀리고 있지만 혹시 아는가? 혜성처럼 나타난 선수가 일본을 꺾으며, 피겨처럼 단숨에 인기 스포츠로 도약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더욱이 윤의 앳되고 해사한 외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김 사범의 두꺼운 가슴은 단꿈에 부풀었다.
“전 그냥 체육 선생님이 되어서 평범하게 살 거예요. ―평범하게.”
윤은 그 말을 마친 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샤워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정해윤! 임마! 아오 저 녀석이 진짜!”
“형,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
김 사범이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현일은 위로하듯 제 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양이 앞에 생선을 흔들고 나서 포기하라고 말해라. 과연 그럴 수 있는 지.”
김 사범은 윤의 호구를 쳐다보며 물끄러미 중얼거렸다.
쏴아아-.
샤워기의 레버를 올리자 단숨에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그란디아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호사에 윤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로 흘러내리는 물을 훔쳐낸 그가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얼굴이 보인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국인 청년이지만, 그란디아에서는 이질적으로 보이던 자신의 모습이다.
윤이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온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그란디아에서 마지막 밤. 레나드는 자신에게 독이 든 술을 내밀었고, 윤은 의심 없이 술잔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내장을 불태우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의식이 끊겼을 땐 죽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끝은 죽음이 아니었다.
눈을 떴을 땐 낯선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제법 상투적인 말이었으나 윤에게는 그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었다. 윤이 바라본 풍경은 동시에 익숙하고 아주 그리운 모습이기도 했다. 유백색 천장과 형광등,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엔 상아색 달이 떠있다.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비로소 윤은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란디아에서 보낸 50년 이상의 세월이, 현실에선 겨우 3일이었다. 처음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저 지독한 악몽인 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빠르게 현실에 적응해나갔다. 운동을 그만뒀지만 이제까지 쌓아뒀던 대회 전적으로 명문대 체육교육학과에 진학했고 제법 괜찮은 성적을 내었다. 집도, 재산도 부모님이 남겨주신 것이 있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진 생활고에 시달릴 필요가 없었다. 정 안되면 스스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윤이 가진 초인적인 능력은 다용도로 활용 가능했으니까.
그렇게 그란디아에서 돌아온 지 3년. 윤은 누가 보아도 부러우리만치 성공적인 삶을 사는 동시에 허무함에 죽어가고 있었다. 현실로 돌아오면 모든 게 해결되고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마음은 허했으며 늘 외로움을 느꼈다. 고독에 지쳐 간간히 사귄 여자 친구들은 “너는 너무 매정하다.” 며 울고 떠나갔다.
이곳에서도 윤은 혼자였다.
“……차라리 그란디아에서의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윤은 검을 쥐듯 칫솔을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우웅-.
평범한 칫솔이 물방울을 퉁겨내기 시작했다. 검푸른 검기(劍氣)가 칫솔을 타고 솟아오른다. 빠직, 빠직. 강대한 에너지를 이기지 못한 칫솔은 끝에서부터 조금씩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칫솔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에 힘을 거두었다.
“이런 게 가능한 사람이 현실에 존재할 리 없잖아.”
윤은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운동을 그만둔 데는 그란디아에서 가지고 있던 능력이 그대로 유지된 탓이 컸다. 지나치게 뛰어난 능력은 위험을 언젠가 눈에 띄게 되어 있었다.
비록 행복하진 않더라도 평온한 일상이었다. 그것을 잃기는 싫었다.
“…이곳으로 돌아온 게 정말 행복한 걸까.”
윤이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가볍게 쥐었다. 손톱 크기의 작은 물빛 보석이 매달린 목걸이는 자신을 위로하듯 부드럽게 에너지를 흘려보냈다.
“오픈 게이트, 그란디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와 동시에 욕실 벽에서 작은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균열은 점점 커지며 문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란디아로 넘어가는 게이트가 생겨났다.
목걸이에 달린 물빛 보석은 문스톤이라는 희귀 광물이다. 용들의 싸움 당시 달이 산산조각이 났고, 청룡이 이를 슬퍼하여 달을 새로 만들어 냈다고 한다. 산산조각 난 달은 세상 여기저기에 퍼져있는데 이를 문스톤이라 칭했다. 문스톤과 달은 서로 공명을 하며 끌어당기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알아낸 안즈마네는 약간의 주술을 가미해 문스톤을 마도구로 재탄생시켰다. 공간이동의 목걸이는 제국에서도 세 개 밖에 없는 귀물이다.
문스톤 목걸이를 이용하면 달빛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으며, 좌표를 입력해 달빛이 닿지 않아도 좌표를 입력한 곳이라면 언제든지 이동이 가능했다. 충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마력방해장이 있는 곳에는 갈 수 없다는 단점이 존재하긴 했으나 윤과 같은 마법 무지렁이에겐 다시없는 보물이다. 안즈마네가 예속마법을 걸어줬기 때문인지 목걸이도 함께 현실에 존재할 수 있었다. 문스톤이 공명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윤은 이질적인 형태의 문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이 문을 넘어가면 그란디아가 있을까.
푸른 달의 세계.
정해윤이 아닌, 윤이라 불린 인간을 만들어낸 모든 것이 남아있는 곳.
“…아직은 아니야.”
입술을 깨문 윤은 떨어지지 않는 손가락을 떼어내며 냉정하게 돌아섰다.
문이 사라졌다.
**
남자는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 천천히 눈을 뜬 그가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고풍스러운 벽난로는 타닥거리며 불똥을 튀긴다. 벽난로에서부터 전해져오는 훈훈한 온기에 몸이 늘어질 법 하지만 반듯하게 앉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이틀 만에 들었던 얕은 잠에 들었던 것도 잠시, 기이한 감각이 남자의 전신을 자극했다. 그것은 환희이기도 했고, 고통스러울 정도의 슬픔이기도 했다. 어마어마한 격류의 파동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영혼이 울부짖었다.
“제르센.”
노스트라드 공작, 아스타시온 베덴 크라이슬러는 자신의 수하를 불렀다.
“예, 각하.”
석상처럼 부복하고 있던 제르센이 머리를 조아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정확히 4분 45초입니다.”
“그런가.”
자리에서 일어난 아스탄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거친 겨울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갔다. 휘이이잉-. 여인의 비명소리와도 같이 공기가 찢기는 소리가 들린다. 푸른 달이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 감각은 무엇이었을까.
아스탄의 붉은 눈이 창밖을 물끄러미 비추었다.
============================ 작품 후기 ============================
5화만에 공이 나왔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