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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다시 만난 세계.
이레인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유모 라야의 울고 있는 얼굴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황궁이 아닌 어둑한 숲의 밤이 유모의 등 뒤로 펼쳐져 있다.
‘내가 왜 이곳에…. 그래, 난 아버지에게 쫓기고 있었어. 분명 척 경이 날….’
이레인의 생각이 두서없이 이어졌다. 애꾸눈의 사내를 떠올린 순간 소년은 튕기듯 몸을 일으키다 어지러워지는 시야에 거꾸러졌다. 그리고 힘없이 유모의 품에 몸을 기댔다.
“라야.”
유모 라야는 훌쩍훌쩍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레인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빼지 않는다.
“라야, 지금 어떻게 된 거야?”
“소강상태야.”
이레인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검은 머리의 청년이었다. 모닥불을 지피던 청년이 고개만 돌려 이레인을 쳐다보았다. 눈을 둥글게 휘며 웃는 모습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이레인은 불안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꼬마야, 이제 정신은 들어?”
“무례합니다! 어찌 황자께 그런 무엄한 말버릇을 쓰신단 말입니까.”
“라야!”
라야가 청년을 질책했고, 이레인이 라야를 말렸다.
“라야, 나 좀 일으켜줘.”
라야의 부축을 받아 이레인이 바로 섰다. 지난밤의 충격에 아직 멀쩡하진 않았으나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목숨의 빚을 졌습니다. 제 이름은 이레인 크라이슬러. 제 이름을 걸고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크라이슬러?”
“예.”
청년이 묘한 표정으로 이레인을 말끄러미 보았다. 샅샅이 뜯어보는 검은 눈동자에 이레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그래서였나. 청년은 작게 중얼거린 후 이레인에게 오른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정해윤.”
“……젼…해융?”
“그냥 윤이라고 불러.”
청년의 입술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폭소를 터뜨리고 싶은 것만 같았다. 이레인의 귓불과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정해윤. 머릿속으로는 생각해보았을 땐 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청년의 이름은 입 밖으로 나오자 형편없이 뭉그러졌다.
“내 손 무안한데, 안 잡아줄 거야?”
“이게 뭡니까?”
“악수. 내가 살던 곳에서 하는 보편적인 인사랄까. 자신의 손에 무기가 쥐어져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친교의 시작을 위한 인사지.”
이레인은 머뭇거리다가 청년의 손을 잡았다. 청년은 이레인의 손을 힘차게 흔들고 떨어져나갔다. 그러고 나선 어깨를 밀어 라야의 품에 주저앉힌다. 친척 아이를 대하듯 격의 없는 행동에 라야의 눈썹이 치켜세워졌다.
“자자, 황자님은 쉬도록 해. 오늘은 충격을 많이 받아서 열이 꽤나 오를 거야.”
“괜찮습니다.”
이레인이 색색거리며 대답했으나 청년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에단과 로릭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밤새겠어. 언제까지 정리할거야?”
“……이제 다 끝나 갑니다.”
에단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상처를 대강 싸맨 에단과 로릭은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 이레인은 그제야 이곳이 격전을 벌였던 공터라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청년, 윤이 아니었다면, 자신도 이곳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구르고 있었으리라. 이레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추워?”
“……괜찮습니다.”
“오한이 오면 추위를 느낄 수도 있지. 어이, 너무 싸매진 마. 열이 오를 땐 적당히 식혀주는 것도 중요해.”
“어이가 아니라 제 이름은 라야입니다!”
마치 어미 새가 새끼 새를 지키듯 이레인을 감싼 라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청년을 향해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생명의 은인께 무례함을 아나 확실히 말씀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이분은 이레인 크라이슬러. 황룡의 피를 이은 고귀한 분이십니다. 부디 존중해주시길 바랍니다.”
청년이 다시금 이레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시중인들은 자신을 무시하면서도 눈을 잘 마주치지 못했는데 청년은 자신과 눈을 반듯하게 맞춰온다. 흑주(黑珠)처럼 검은 눈동자에 제 모습이 담기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유모의 말대로 시녀의 몸에서 났다 하나, 황자인 자신에게 저런 말버릇은 옳지 않다. 그러나 이레인은 청년에 대한 호감이 샘솟자, 좀 의아하단 생각을 했다. 자신과 몇 살 차이나 보이지 않는 외모 때문인 걸까. 아니면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인 걸까.
이레인은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손으로 턱을 괸 채 청년의 모습을 구경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의 청년은 해사하고 앳된 얼굴이었고, 순식간에 황제의 기사들을 제압한 것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느다란 체격이 신기했다.
“많이 기분 나빠?”
“아뇨, 괜찮습니다. 편하게 해주세요.”
“봤지? 황자님도 괜찮다고 하잖아.”
청년이 의기양양하게 웃는 모습에 라야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모닥불의 온화한 불빛이 청년의 얼굴을 주홍빛으로 물들였다. 짙은 머리칼 때문에 처음엔 유랑민족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으나 잘 살펴보면 그들과 달랐다. 그들은 올리브 빛깔의 피부에 머리도 저렇게 검지 않았다. 청년의 피부는 희었고, 입고 있는 옷도 무척이나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보인다. 결코 평범한 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혹시 차 대륙의 사람입니까?”
“……조금 달라. 하지만 비슷해.”
이 세계엔 두 개의 커다란 대륙이 있다. 아벨라르 대륙과 차 대륙이다. 가장 빠른 배로 두세 달을 가야 도달할 수 있을 만큼 멀리 떨어져있어 대륙 간의 교류는 많지 않은 편이다.
아벨라르 대륙 사람들은 흔히 백인이라 불리는 코카시안 인종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큰 키와 색소가 옅은 피부, 또렷한 이목구비가 그들의 특징적인 생김새지만, 차 대륙 사람들은 몽골로이드 계통의 외모가 흔했다. 그래서 검공이라 불리던 시절 윤은 차 대륙인이라는 추측을 샀고, 윤도 부정하지 않았다.
청년에 대한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출신지가 어디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검은 언제부터 배운 것인지. 이레인 의문이 잔뜩 담긴 눈으로 윤을 쳐다보았다. 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황자님은 궁금한 게 많나봐.”
“조금요.”
“무엇이 궁금해?”
“제일 궁금한 건 당신의 나이입니다.”
“일단은 스물 둘로 해둘까.”
“일단은?”
이레인이 반문했다. 윤은 그저 웃기만 했다.
“윤 아기오 노스트라드.”
주변을 정리하고 돌아온 호위단장 에단이 중얼거리듯 한 사람의 이름을 내뱉었다. 에단은 경계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윤에게 물었다.
“당신은 검공과 관련이 있습니까?”
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검공이란 사람이 혹시 시황제 월스턴의 친우라는 윤 아기오 노스트라드야?”
“예. 그분을 알고 계시는 군요.”
“……대강은.”
“어떻게 아시는 겁… 큿!”
에단이 신음했다. 상처투성이의 그는 서있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어깨에 부상을 입은 로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겠다는 듯 이레인의 뒤편에 서 있었다.
“편히 앉으세요. 에단 경, 로릭 경.”
“당신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은 머뭇거리다가, 이레인의 양 옆에 보호하듯 앉았다. 물론 청년이 자신들의 목숨을 노리고자한다면 꼼짝없이 당해야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해야 마음이 놓였다. 몸을 움직이는 게 쉽지 않은 듯 앉는 동작에도 에단은 미간을 찡그리며 고통을 삭였다.
윤은 고개를 들어맞은 편에 앉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질렸지만, 오밀조밀한 외모가 인형처럼 사랑스러운 꼬마였다. 짙은 금발의 아이는 그가 기억하는 누군가를 무척 닮았다.
‘이레인 크라이슬러라 했던가.’
월스턴과 레나디온의 핏줄을 이은 황가의 후손. 어찌 보면 원수의 후예다. 그러나 밉지 않았다. 오히려 레나디온의 어린 시절을 꼭 닮아서 그런지 마음이 쓰였다. 윤의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복수를 하고 싶은 건지, 그저 해묵은 은원을 해결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기실 월스턴과 알아온 세월이 서른 해가 넘었고, 레나디온은 태어난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함께했다. 사람의 마음을 어찌 단칼에 잘라낼 순 없었다.
윤이 복잡한 심사를 헤집듯 모닥불을 지폈다. 불티가 튀어 오르자 이레인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이젠 내가 질문해도 되지? 지금부터 어이없는 질문을 하더라도 모두 대답해주길 바라. 목숨을 구해줬는데, 미친 사람 보듯이 하지 말고.”
“얼마든지 대답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왜 꼬마 황자님은 황제에게 쫓기고 있는 거야?”
에둘러 말하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윤의 질문에 이레인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입술 안쪽의 살을 꾹 깨물었다. 살이 터지며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맴돈다. 아무리 사랑받지 못한 아버지였어도 그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나 마음 아팠다.
“역모나 그런 건 아니지?”
“절대 아녜요!”
이레인이 소리치듯 대꾸하자 윤이 하하 웃었다.
“그럼 됐어. 상황이 복잡해지는 것만 아니면 되니까. 두 번째 질문. 지금은 몇 년도야? 황제는 누구지?”
“혹 이 세상이 아닌 곳에서 오셨습니까? 어찌 그런 당연한 것을 물어보십니까?”
유모 라야는 기막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끼어들었다. 라야의 톡 쏘는 말에 윤이 놀란 표정으로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 혹시 마녀의 피를 이은거야?”
“……지금은 제국력 133년, 당금의 황상은 팔라티온. 제국의 다섯 번째 황제십니다.”
“100년인가.”
무릎에 팔꿈치를 세우고 손으로 턱을 괸 채 윤이 생각에 잠겼다. 윤이 죽었을 때가 제국력 33년 겨울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지났다. 생각보다 시간의 흐름이 엉망이었다. 그란디아에서 보낸 50년이 한국에서 3일이었고, 한국에서 보낸 3년이 이곳에서의 100년이다.
“레나디온 황제는 언제, 언제 죽은 거지?”
“현제(賢帝) 레나디온께서 승하하신지 8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가.”
윤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윤의 눈동자는 고통의 빛을 숨기지 못했다. 레나디온의 생년이 제국력 10년이다. 지금이 제국력 133년. 계산해보면 고작 마흔 세 살 쯤에 죽었단 뜻이다.
‘레나드. …결국 죽었구나.’
점점 후회되었다. 현실로 돌아왔을 때 바로 이곳으로 와야 했다. 그래서 멱살을 잡던, 마구 두들겨 패던, 어떤 수를 써서라도 레나드의 입으로 진실을 들어야했다. 권력을 추구해서 자신을 죽였다는 대답밖엔 듣지 못하더라도 그의 입으로 직접 대답을 들었다면 이처럼 고통스럽진 않았을 것 같다. 머뭇거리던 사이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자신의 대자는 영원히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다.
‘나를 죽이며 권력을 추구했으면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지. 겨우 그 나이에 죽은 거냐, 렌.’
이른 나이에 죽었으니 통쾌하다고 생각해야하는데 가슴에 찬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선뜩하다. 지금 느끼고 있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었다. 쓸쓸한 표정을 갈무리한 윤은 머릿속으로 생각해두었던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
“그리고 마지막. 여기는 어디야? 북쪽인 건 확실한데.”
“노스트라드와 도룬의 경계입니다.”
지리에 밝지 않은 이레인 대신 에단이 답했다. 노스트라드라. 익숙한 이름에 윤이 쓰게 웃었다. 한때 윤이 지배자로 있었던, 그의 땅이었다. 지금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자신의 존재는 잊혀졌겠지만 말이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노스트라드입니다.”
이레인이 대답했다.
“노스트라드에는 왜?”
“저의 형님… 아스타시온 전하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입니다.”
“황제에게 쫓기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네.”
이레인은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치받는 걸 간신히 삼켜내었다. 황제가 짓던 권태로운 눈동자엔 자식들에 대한 애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노스트라드에 가게 되더라도 일이 잘 풀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스타시온이 황제보다는 나을 거란 한줄기 희망을 안고 정처 없이 떠나는 거나 마찬가지다.
“노스트라드까지 얼마나 남았지?”
“마차로 하루입니다. 하지만 노스트라드의 중심인 라덴까지는 마차로 하루가 더 걸리고요.”
에단이 말에 윤은 흔쾌히 도움의 의사를 밝혔다.
“좋아. 도와주지.”
이레인이 눈을 크게 떴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이 이레인에게 다가와 거칠게 머리를 흩트렸다. 그의 뜻을 알아들은 아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라야 또한 노골적으로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에단과 로릭은 더 이상 전력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력자인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으로 추정되는 실력자인 윤이 도와준다면 노스트라드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으리라.
이미 레나드는 이세상에 존재치 않는 사람이지만 언젠가는 인연의 끝을 보아야했다. 게다가 황룡을 만나려면 황족과 얽히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레인에게 빚을 지워서 나쁠 건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나름의 계산속을 굴렸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건 이레인 밖에 없었다.
“일단 오늘은 내가 불침번을 설 테니 모두 쉬도록 해.”
“저, 윤 님….”
에단이 머뭇거리며 윤을 불렀다.
“그냥 윤이라고 불러. ‘님.’이라니, 소름 돋잖아.”
윤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팔뚝을 쓸어내렸다. 귀족이 아닌 건가. 이레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대하는 게 익숙해 보여 최소 차 대륙의 귀족이겠거니 했는데, 저런 모습을 보면 평민인 것만 같다. 도통 내력을 알 수 없는 청년의 모습에 모두는 그를 어찌 대해야할지 갈팡질팡 했다.
“이곳에 계속 머물러도 되는 겁니까?”
“괜찮아. 내일 아침에 이동을 시작할거니까 오늘은 푹 쉬어. 불침번은 내가 설 테니.”
“다시 습격이 있지 않을까요?”
“그쪽 머리 위에 달린 게 장식품이나 깡통이라면 그렇겠지.”
윤이 성의 없는 어조로 답하며 불쏘시개를 지휘봉처럼 휘휘 흔들어보였다.
“이쪽의 어린 황자님이나 유모, 다친 기사 둘을 데리고 밤에 이동하는 건 미친 짓이야. 마차는 누가 몰아? 난 참고로 마차 운전 면허증은 없어. 이걸 노리고 습격할 수 있겠지만, 내가 있잖아.”
“윤 님이요?”
“그냥 윤이라고 부르라니까. 그들의 입장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사가 바로 나야. 날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오늘 밤은 간만 볼걸?”
“…그렇군요.”
에단은 납득했다. 로릭은 여전히 이해가지 않는단 표정이었다.
“왜 습격하지 않는단 거죠?”
“설명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닌데. 그들을 살려서 보낸 건 일부러 그런 거야. 내 실력을 말할 사람이 있어야 경계만 할 테니까. 다 죽여 버렸으면 후발대가 왔을 걸? ……에취!”
제국의 북쪽은 무척 추운 곳이다. 이레인만 해도 라야가 준비한 털옷을 입었고, 에단과 로릭 역시 두꺼운 옷에 가죽으로 만든 팔 보호대와 각반을 찼다. 여름옷처럼 보이는 얄팍한 옷자락을 입은 사람은 윤이 유일했다. 초월자라 하더라도 버텨내기 힘든 추위에 연달아 재채기를 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은 어디지?”
“노스트라드 안에 있는 작은 사냥꾼들의 마을입니다.”
“거기서 나 옷 좀만 사줘.”
윤의 당당한 요구에 라야가 기막히단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목숨의 은인에게 이렇게 굴기야? 난 추운 게 딱 질색이라고.”
“좋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비싸고 좋은 옷으로….”
이레인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윤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차로 돌아가 자신의 숄을 가져온 라야는 떠넘기듯 윤에게 숄을 내밀었다.
“남는 거니 몸에 감으시던가요.”
“고마워.”
숄을 몸에 칭칭 두른 윤이 얼굴만 내놓았다. 하얗고 자그마한 얼굴은 단신의 몸으로 열에 달하는 기사들을 상대한 거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려 보였다.
“신발은 맞는 게 없으니, 다음 마을에서 꼭 구입하도록 하지요.”
“그럼 안 사줄 거였어?”
“나참, 기가 막혀서.”
뻔뻔한 모습에 라야는 연신 나참, 이라는 말만 내뱉었고, 이레인은 푸스스 웃기만 했다. 긴장이 풀린 로릭도 얼빠진 얼굴로 히죽히죽 웃었다. 오로지 에단만이 경악한 얼굴로 윤을 위아래로 살필 뿐이다. 윤이라는 이름의 정체 모를 청년은 맨발로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고 하얀 발은 상처를 찾을 수 없으며, 흙먼지도 묻어있지 않다. 얼마나 지고한 경지의 검사란 말인가. 에단은 소름이 돋은 자신의 팔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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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모험을 떠나볼까?
다음편은 내일 밤 열두시쯤에 뵙겠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