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 / 0111 ----------------------------------------------
2장, 공작과 친구가 되는 방법.
2장, 공작과 친구가 되는 방법.
추적추적 비가 오는 밤이었다. 왕성을 간신히 빠져나온 월스턴은 한숨을 푹 내쉬며 지붕이 있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왕이 되기 싫어 가출한 왕자는 자신의 짧은 열아홉의 생을 돌이켜보았다.
위대한 모험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채 가출한 지 첫날, 소매치기에게 돈을 털려서 소낙비를 피할 여관조차 찾지 못할거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왕성을 빠져나올 때 품었던 큰 꿈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월스턴은 우울한 얼굴로 팔을 겹쳐 그 위에 턱을 괸 채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왕성의 어둠이 이렇게 무서운거라 생각지 못했다.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불량배들을 노려보며 검병을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꿈틀.
쓰레기 더미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헉!”
월스턴은 엉덩이 걸음으로 재빠르게 물러났다. 조심스럽게 그 정체를 살폈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처럼 쓰러진 사람이었다. 운이 나빴다면 인신매매범들에게 잡혀가서 고초를 겪었을 테지만, 운이 좋았다고 해야할지. 도시의 쓰레기들이 그 위를 덮어 소년을 보호하고 있었다.
월스턴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잡동사니를 치웠다. 이윽고 드러난 인영은 검은 머리카락의 낯선 옷을 입은 소년으로 월스턴은 그의 어깨를 흔들며 물었다.
“이봐, 괜찮아? 너 혼자야?”
까만 머리칼의 소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물에 젖은 검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갑작스러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월스턴은 제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되찾았다.
“…응. …아무도….”
때묻지 않은 하얀 얼굴 위로 빗방울과 함께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
이레인 일행은 공작성에서도 가장 심처에 방이 주어졌는데, 공작이 머무는 서쪽 날개인데다가 모두에게 1인용 방이 제공되었다. 그들을 귀한 손님으로 대우한단 뜻으로 방을 확인한 라야는 안심한 듯 가슴 위에 두 손을 얹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긴 여정에 지친 사람들은 각자 흩어져서 움직이기로 하였다. 에단과 로릭은 의무실로 가서 치료를 받기로 했고, 라야는 휴식 대신 이레인의 시중을, 이레인은 몸단장 후 휴식을 취한 후 공작과 티타임을 가질 예정이었다.
윤 역시 여독을 핑계로 자신의 방에 돌아와 빈둥빈둥 거렸다. 셰즈 롱그(침대와 의자의 중간 형태로, 머리 받침대가 있어서 누울 수 있는 의자.)에 몸을 늘어트리고 한량없이 시간을 죽였다.
“부르셨습니까.”
종을 울려 시종을 부르자, 공작성의 시중인답게 정갈하게 제복을 차려입은 30대 중반의 남자가 다가왔다.
“목욕물을 준비해줘.”
“그리하겠습니다.”
시중인이 대답을 한 후 잠시 간격을 둔 뒤, 이어 질문했다.
“향초를 사용할까요?”
윤은 눈만 들어 시종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친절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린 시종은 그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다.
현실과 비교하면 배관 시설이 열악하기 그지없는 그란디아에서 목욕이란 사치다. 평민이라면 실내에서 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러나 귀족들은 따뜻한 물로도 부족해 아로마나 각종 약초를 배합해서 목욕을 즐겼다.
여성 귀족들은 상황과 기분에 맞추어서 온갖 비법을 활용했지만, 남성 귀족들은 아니었다. 세세하게 따지는 것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피로회복에 좋은 향초 정도를 이용하는데 그쳤으며, 그것을 사용할지 말지 세세하게 따지지도 아니하였다. 그런 것은 시중인이 주인의 상태와 기분을 보아 요령껏 결정하는 거였다.
저자는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당황한다면 평민, 아는 척하며 줄줄 읊는다면 상인이나 벼락부자. 되레 화를 낸다면 귀족. 나름의 잣대를 재는 작은 골탕이다.
‘공작의 지시인가?’
아닐 것이다. 공작은 자신을 손님으로 대우한다고 했다. 이것은 시종의 선에서 멋대로 이루어지는 시험이 분명했다. 윤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향초를 사용해 줘.”
“……어떤 것으로 준비해드릴까요.”
“그런 것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나?”
예상외의 대답에 시종이 잠시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인과 시종의 차이점이 그것 아닌가. 주인의 마음을 파악하고, 어느 정도 판단의 자유가 있는 것이 시종. 그리고 시종이 부리는 명령만으로 움직이는 하인이다.
“여, 여행에 지치셨을 테니 피로회복에 좋은 것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윤이 불쾌감을 드러내자 시종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목욕물이 준비되는 사이 역사책을 읽으며 시간을 죽였다. 창세기 신화부터 시작되어 그란디아가 왕국이던 시절까지 왔다. 아직 월스턴의 이야기가 나오려면 수십 장을 더 읽어야하는데 지겹기 그지없다. 길게 하품을 하는데 시종이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오, 제법이잖아?”
방에 딸린 욕탕으로 들어간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백색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내부를 꾸며서 욕실이 아니라 응접용 방이라고 생각해도 될만큼 아름다웠다. 게다가 완벽한 배관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시종들이 힘겹게 물을 끌어오지 않아도 되었다.
공작의 시종장, 제르센의 명령을 받은 시종은 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윤이 던진 의외의 일격이 뼈아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그 정체를 알아내고 말 것이다! 시종의 눈이 희번덕 빛났다.
검은 튜닉이 바닥에 떨어지며 상체가 드러났다. 벗은 등은 상처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옷에 가려져 있을 땐 다소 마른 체격이라 생각했으나 근육으로 잘 짜여 있다. 기사들의 잘 그을린 빛깔의 피부색에 비해, 윤의 몸은 귀족 여식들처럼 살결이 희고 매끄러웠다.
귀부인의 벗은몸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서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타인의 앞에서 벗은 몸을 보이는 데 껄끄러움이 없었으며, 시중인을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럽다. 평범한 이는 아닐 것으로 사료된다. 그는 머릿속으로 메모했다.
“시중을 들까요?”
“아니, 그건 됐어. 나가서 쉬도록 해.”
“예.”
윤은 커다란 대리석 욕조에 몸을 담갔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간 이어진 강행군에 그도 꽤 피로했나보다. 잔뜩 긴장한 근육이 풀어지며 온몸이 노곤해지자 잠이 몰려왔다.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인 윤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역시 사람은 돈이 있어야해.”
공작성에 와서야 커다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씻을 수 있다니. 역시 ‘현실’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열악한 환경이지만 윤은 이곳이 몹시 그리웠었다는 걸 깨달았다. 흰 뺨이 발갛게 상기될 때까지 느긋하게 목욕을 즐긴 후에야 욕탕을 빠져나왔다.
저녁 시간이 되자 공작은 만찬을 여는 대신 여독을 풀 수 있도록 각자 방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기 돼지의 넓적다리 살로 만든 스테이크와 꿩고기로 만든 콩소메의 맛에 감탄하며 윤은 공작이 내쫓을 때까지 엉덩이를 비비고 있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밤이 되었다. 무척 피곤하다고 생각했는데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몸에 부드럽게 감기는 침구는 최고급품이었다. 깃털 베개는 머리를 갖다 대기만 해도 깊은 잠에 빠져들 것 같은데 정신은 점점 또렷해졌다. 계속해서 뒤척거리던 윤은 결국 종을 울리자 불침번을 서던 하인이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독한 술을 준비해줘. ……화주(火酒)가 아닌 것으로. 그리고 종이와 펜도.”
고개를 끄덕인 하인은 트레이를 끌고 와 간단한 핑거 푸드와 술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옆으로 종이와 깃털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후 방을 빠져나갔다.
윤은 투명한 유리잔에 술을 따랐다. 꽃과 과일향이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제국 남부의 특산품인 과실주인 것 같았다. 맛있다고 신나게 마셨다간 취기에 개가 되기 쉬운 술로, 시종의 골탕은 계속해서 이어질 모양인 듯했다.
독한 술을 주스처럼 홀짝이며 그란디아로 넘어온 며칠간의 기록을 한글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대륙공용어로 썼다가 누군가 읽는다면 곤경을 면치 못할 것 같아서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해소되지 못한 의문점이 무척 많았다.
우선 떠오르는 건 황가의 ‘광증’, 레나디온 황제 이후 황가에 발병한 광증은 유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증에 시달리지 않을 때는 지독히 멀쩡하다라…. 마녀의 저주인가? 초대 황후이자 대마녀인 안즈마네로 인해 저주에 대한 내성이 있어 미치지 않고 버티는 것일지도 모른다. 윤은 자신의 추측을 써내려간 후 생각에 잠겼다.
두 번째, 공간을 관장하는 흑룡을 만나야했다. 이것은 자신이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흑룡이 이곳의 시간으로 백 년 전에 잠깐 잠에서 깬다고 들었으니, 지금은 다시 깊은 수면에 취해있으리라.
앞으로 수십 년은 여유 있는 일이라 중요도는 높으나 우선순위에서 뒤로 두었다. 그러나 흑룡을 만나기 위해서는 황룡을 만나는 일이 선행되어야한다. 황룡을 만나는 건 공작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해결될 듯 했다. 운이 좋았다.
세 번째, 이레인. 윤은 이레인을 돕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최소한 이레인을 성인이 되어서 제 앞가림은 할 수 있을 때까지 도울 생각이었다. 윤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았으니까. 다만 어떻게 돕느냐가 문제다.
레나드의 때처럼, 그저 황제로서 그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자라기만을 기다리기엔 이레인이 처한 상황이 복잡 다단했다. 필연적으로 황가와 얽히게 되리라. 이것이 잘된 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종이를 구석으로 밀어 넣은 윤은 방을 빠져나와 정원을 걸었다. 산뜻한 겨울바람이 윤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흩어놓고 지나간다. 종이에 적은 내용을 바탕으로 윤은 앞으로 할 일을 정했다.
공작과 친교를 맺어서 황룡의 숲으로 갈 때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용의 계곡은 혼자서 가기엔 위험부담이 컸다. 온갖 이종족과 몬스터들이 살고 있는 용의 계곡에 혼자서 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마력 방해장이 산맥 전체에 걸쳐져 있어 문스톤으로도 갈 수 없어 육로로 이동해야했다.
윤의 동행은 공작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다. 용의 계곡은 어지간한 실력자에게도 위험한 곳. 그러나 황제가 되고 싶다면 반드시 방문해야하는 장소였다. 공작의 손등에는 인장이 없었으니까.
황룡의 인장. 황제가 되고 싶다면 반드시 받아야 되는 황룡의 축성이다.
황룡은 한 때 꿈을 꾸어서 한 나라의 왕이 된 적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란디아다. 아주 먼 후손인 월스턴을 만난 황룡은 재미있어하며 그란디아 황가에 축복을 약속했다. 바로 긴 생명, 쉽게 죽지 않는 육체, 뛰어난 오성이다.
축복은 월스턴의 피가 이어지는 이상 지속될 것이라 약속까지 해주었다. 다만 직접 찾아오는 이들에 한해서라는 조건을 달았다. 윤 역시 레나드를 제 손으로 데려가 황룡의 축복을 받게 했다. 그때가 레나드가 아홉 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그러나 공작은 지금까지 축복을 받지 못했다. 현 황제 팔라티온이 제 아들을 지독하게도 미워하고 견제한다더니 그것이 사실이었나 보다. 윤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했지만 말이다.
“아이고, 삭신이야. 검이라도 좀 휘두를까.”
몸이 찌뿌듯함을 느낌 윤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간단하게 검술 수련이라도 하기 위해 연무장을 찾기로 했다. 그러나 공작성은 자신의 기억과 무척 달라져있어 연무장이 있던 곳에 정원이, 정원이 있던 곳에 웬 인공호수가 만들어져있어 한참을 헤맸다.
“이봐,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연무장이 어디 있지?”
결국 지나가던 하인을 붙잡은 윤은 연무장의 위치를 물었다. 하인이 안내한 곳은 장미 정원을 지나 공작성의 서쪽 날개 구석진 곳에 위치한 연무장으로 잘 관리가 된 듯 바닥엔 돌 부스러기 하나 없이 잘 골라져 있다.
윤은 허리춤의 검대에서 검을 빼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걸 안돌려줬네.”
윤이 난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곳에 온 첫날 애꾸눈의 기사에게서 뺏은 검이다. 검날을 가볍게 손끝으로 퉁기자 “치잉-.” 하고 맑은 울음을 토해냈다. 다시 검집에 검을 꽂아 넣은 윤이 꼼꼼하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몸에 더운피가 돌면서 차가운 공기에 움츠러들었던 근육이 적당하게 풀어질 때쯤에야 윤은 검을 손에 쥐었다. 천천히 중단 겨눔 자세를 취했다. 양손으로 검을 쥐고 곧은 시선으로 앞을 응시한다. 정적인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소모된다. 십분 가량을 그리 서 있던 윤은 이마에 괸 땀을 훔쳐냈다.
“손님이 밤에 돌아다니는 건 예의에 어긋난 짓이지.”
============================ 작품 후기 ============================
프로필을 어떻게 써야할 지 몰라서 일단 간략하게 이름만 써보았습니다 ^_^
서장의 토사구팽은 10살에 부모님이 사망, 그 후 레나드가 친정을 하게 될 때까지 윤이 황제를 위해서 나름대로 고군분투했음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소용가치가 없어지자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한 윤의 입장에서 쓴거였는데.... 토사구팽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더 적당한 소제목을 생각해보도록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