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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13화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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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공작과 친구가 되는 방법.

“손님이 밤에 돌아다니는 건 예의에 어긋난 짓이지.”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탓하나 그의 목소리는 무심했다. 윤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반사적으로 검을 날리려다 멈칫했다.

“공작?”

불청객의 정체는 공작이었다. 검을 허리춤에 찬 공작은 윤보다 머리가 하나 쯤 컸고 부러우리만치 사내다운 체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몸에 두른 차가운 오만함으로 사람들을 절로 고개 숙이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

윤은 재빨리 검을 수습하고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공작의 수신 호위들이 자신에게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윤은 공격 의사가 없단 표시로 양손을 들어 보였다. 자신의 검이 조금만 늦게 회수되었더라면 지금쯤 호위들이 쏜 화살에 벌집 피자가 되었으리라.

“그만.”

공작은 한쪽 손을 들어 자신의 호위들에게 명령했다. 그제야 찌를 듯 매서운 살기가 잦아들었다. 윤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미안 고의가 아니었어.”

“본공이 그대를 손님으로 계속 대우할 수 있도록 처신에 신중을 기울이도록.”

윤은 제 실수를 깨달았다. 오밤중에 손님이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돌아다니는 행동은 매우 무례한 짓이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손님 혼자 마음대로 돌아다니다 주인에게 해코지할 수도 있다고 오해받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오는 그란디아인지라 예법을 잊어버리고 있었고, 제 집이었던 노스트라드라 마음을 놓고 말았다. 공작이 자신을 오해하여도 할 말이 없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할게.”

“네 말투는 행동만큼이나 무례하기 짝이 없군.”

냉랭한 표정을 풀지 않은 공작은 윤의 행동을 질책했다.

윤은 머쓱한 표정으로 검병을 만지작거렸다. 어찌되었든 눈앞의 남자는 공작이자 황태자이고, 자신은 이전의 신분이 어떠하였든 지금은 평민이나 다름없다. 신분의 차이가 지고한 그란디아에서 평민이 귀족에게 반말을 한다는 건 대역죄였다.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쉬이 존댓말이 나오지 않는다.

거북함의 이유는 공작과 자신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다. 레나드는 자신의 대자이다. 레나드의 아들을 손자라고 치고, 제위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졌다고 가정한다면 공작은 6세손 밑의 사람이 된다. 더군다나 윤은 외양만 청년일 뿐 속 내용물은 70년 넘게 살아온 노인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정신이 육체를 따라가는 것인지 스스로도 무척 철이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말이다.

“검을 수련하고 있었나?”

“오랫동안 실전을 겪지 않았더니 몸이 무거워지는 게 느껴져서.”

“…여기선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거다.”

공작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검을 빼어들었다. 오싹한 마기가 흐르는 생김새가 익숙했다. 일전 윤이 쓰던 애병, 트리기토스다. 주인을 알아본 것처럼 트리기토스가 우웅 하고 울음을 흘렸다. 공작은 윤과 제 검을 번갈아가며 보다가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쌔액!

공작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윤이 검을 들어 막았다. 살에 마나를 실어서 쏘아보낸 듯 손목이 지릿하게 울렸다. 자칫 화살에 목을 꿰뚫릴 뻔한 공작은 놀란 기색도 없이 무덤덤한 눈으로 윤을 쳐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아름답게 조성된 정원수가 엉망으로 변하며 흑의인들이 뛰어내렸다. 삽시간에 연무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암살자의 수는 서른 명 쯤 될까. 하나하나 잘 갈린 예기를 자랑하는 암살자들이었다. 공작이 혼자 있을 때를 노린 듯, 아주 오래 준비한 티가 났다.

“…이렇게 말이다.”

암살자들은 뒤를 도외시한 채 공작에게 달려들어 포위했다. 자연스럽게 윤과 공작은 등을 맞대고 암살자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본공의 일에 말려들게되어 미안하게 되었군.”

공작은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흉수가 누구인지 잘 아는 것처럼, 이 습격이 놀랍지 않은 듯 보였다.

“도와줄까?”

“내킨다면.”

공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암살자들이 검을 찔러들었다. 사방에서 노려오는 검은 매섭고 위력적이었다. 공작은 당황하지 않고, 암살자들을 처리해나갔다. 공작의 검은 전광석화와 같이 빠르게 움직여서 눈을 깜빡일 때마다 흑의인들이 쓰러져나갔다. 윤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검을 휘둘러 암살자의 팔을 베었다. 한 녀석쯤은 살려두어야 범인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났으나 이전부터 알아왔던 것처럼 손발이 잘 맞았다. 혼자서는 제법 어려웠을 습격을 쉬이 넘기게 된 공작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암살자들을 적당히 상대하며 이복 동생을 구해주었다던 이방인을 관찰했다.

크지 않은 체구와 길쭉한 팔다리가 검보다는 펜이 더 잘어울리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적확하게 검을 휘렀고, 어김없이 목숨을 앗아갔다. 암살자의 숨통을 끊을 때도 주저함을 찾을 수 없었다. 흥미가 솟아올랐다.

“전하!”

보초를 서던 기사들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암살자들은 반 정도 제압되어 있었다. 기사들을 확인한 공작은 비스듬히 검을 바닥으로 내렸다. 공작의 붉은 눈과 같은 핏방울이 새하얀 검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자들을 끌고 가라.”

“예.”

기사들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조아렸다. 깨끗하던 연무장은 잘려나간 사람의 몸뚱아리와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후 검집에 집어넣는 윤을 향해 공작이 말을 걸었다.

“그대에게 큰 신세를 졌군. 보상하겠다.”

“……금은보화라면 크게 필요없어.”

윤의 무례한 말에 뒷수습을 하던 기사들이 움찔했다.

“그대신 권리를 줘.”

“권리?”

공작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며 흥미를 표했다.

“누구에게도 반말을 할 수 있는 권리.”

“재미있는 자로군. 그건 나도 포함인가?”

“당연, 나는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서 존댓말을 잘 못해.”

윤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공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답고 울림이 깊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내는 웃음 소리는 무척 듣기 좋았다.

“게다가 전하의 목숨값이 겨우 금은보화와 비견될거라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대가 아닌 다른 이가 본공을 그리 지칭했다면, 직접 참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는군. 그대의 무례한 말이 무척 자연스럽게 느껴져. 그 여유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지? 검술 실력 때문인가?”

“……글쎄. 타고난 성격일지도.”

윤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공작은 특유의 붉은 눈동자로 윤을 뜯어보았다. 그의 눈빛은 기묘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워낙 표정이 없이 차가운 얼굴이라서 감정을 읽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보면 어느정도 짐작가능했다. 공작은 자신을 보며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좋다. 그대에게 본공을 포함하여, 그 무례한 말투로 마음대로 지껄일 수 있는 권리를 수여하지.”

“감읍할 따름입니다.”

윤은 한쪽 발을 뒤로 뺀 채,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고급스러운 궁정 언어를 사용할 줄 알면서 모른 체하는 걸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그저 황자의 목숨을 구한 이라 적당히 대우한 후 내보낼 생각이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그를 곁에 두며 면밀히 지켜보리라.

“윤이라 하였나. 그대를 내 긴히 지켜보도록 하겠다.”

공작은 기사들을 이끈 채 살아남은 암살자들을 끌고 사라졌다.

홀로 연무장에 남은 윤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제 가슴께를 문질렀다. 레나드와 닮은 얼굴로 낯선 이를 보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심장이 조여왔다.

“…그래, 얼른 해결하고 돌아가는 거야.”

그렇게 지껄여보았지만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휑한 기분은 나아질 줄 몰랐다.

**

신화시대, 대지모신의 몸은 거대한 땅이 되었다. 바로 아벨라르 대륙과 차 대륙이다.

아벨라르 대륙의 패자는 시황제 월스턴이 세운 대제국 그란디아다. 얼어붙은 동토에서부터 비옥한 남부 지대까지 그들의 영토는 어마어마하다. 황룡 가리온의 축복을 받아 가장 비옥하고 질 좋은 땅도 그들의 몫이었다. 그만큼 다른 왕국의 견제는 치열해서 호시탐탐 전쟁의 불씨를 일으키기 위해 노려왔다.

노스트라드 공작이자, 그란디아의 황태자 아스타시온이 습격을 받은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은 무척 많았다. 심지어 부친에게도 위협을 받지 않았던가. 아스탄은 시니컬하게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지하 감옥의 공기는 무겁고 음습했다. 썩은 물이 바닥에 진창으로 고여 있었으나 공작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시종들이 황급히 천을 깔아 옷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보했다. 살과 피가 부패하며 고인 진액은 지독한 시취를 풍겨왔다. 공작의 심복인 시종장 제르센과 마법사 미하엘은 코를 움켜쥐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공작의 뒤를 따랐다.

지하감옥의 끝, 고문실로 들어섰다. 지나친 고문으로 인해 인간의 형체가 남아있지 않은 고깃덩어리를 응시하며 공작이 말문을 열었다.

“이자인가.”

“예이, 전하. 어찌나 지독한지 아무리 고문을 하여도 입을 열지 않는 놈입니다요.”

고문관이 굽실거렸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 아스탄은 감흥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 손을 내밀자, 제르센이 조심스럽게 장갑을 끼웠다. 그리고 거칠게 암살자의 고개를 꺾고, 머리카락에 가려진 목덜미 사이를 확인했다. 새하얀 장갑은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었다.

“악보 문신이 있군. 세이렌의 유혹일 거다.”

“……마르가스 왕국입니까?”

미하엘이 표정을 굳힌 채 물었다. 그의 얼굴엔 혐오의 기색이 역력했다.

남쪽 사나 군도를 근거지로 잡은 탓에 강력한 해상 군대를 지닌 마르가스 왕국은 해적이 그 시초로 무법천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고아를 납치해 전략적으로 암살자로 키우기까지 했는데, 그들이 바로 세이렌의 유혹이다. 길러낸 암살자를 타국의 귀족들에게 팔아 어마어마한 돈을 벌기까지 했다.

최근 그란디아와 마르가스는 무역 마찰이 잦았다. 배후로 마르가스 왕국이라 생각하기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글쎄…. 꼭 그들을 샀을 수도 있으니, 어설픈 의심은 금물이다.”

아스탄이 장갑을 벗어서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지며 대꾸했다.

“더이상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으니 적당하게 처리해.”

“예.”

아스탄은 성큼성큼 걸어 지하 감옥을 빠져나왔다. 신선한 공기에 절로 숨통이 트인 제르센이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며 피와도 같은 색깔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문득 아스탄은 검은 머리칼을 지닌 이방인을 떠올렸다. 강한 호기심이 꿈틀거렸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태도가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울리는 남자. 앳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검술 실력. 그리고 처음 보았으나, 아주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것처럼 익숙하게 여겨졌다.

아스탄은 제르센에게 하문했다.

“그자에 대한 건 알아보았나?”

“예.”

“결과는 어찌 되었지?”

“송구하오나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그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나이다. 노스트라드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이레인 황자가 습격을 당할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차대륙에서 건너온 이들과 대조해보겠사옵니다.”

“그리하라. 오늘은 그 자가 무얼 했지?”

“방에서 책을 읽으며 무언가를 작성하다가 잠시 이레인 황자를 만난 것을 빼곤 수상한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계속해서 감시하도록 해. 적이 아니라면 유용하게 쓰일 사람이다.”

“예.”

아스탄의 명령에 제르센이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낯엔 의구심이 가득했다. 물론 빼어난 검사이긴 했다. 그러나 아벨라르 대륙인도 아닌 차 대륙인을 곁에 두기엔 너무도 위험했다.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지금은 곁에 사람을 두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한다고 간언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주군 역시 생각해둔 바가 있을 터였다.

무관심한 성정의 공작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경우도 드물었고 덕분에 공작의 수하들 역시 정체불명의 차 대륙인에 대해 조사하는 제르센을 닦달하고 있었다. 제르센은 먼지 하나까지 샅샅이 털어내겠노라 결심했다.

“두 사람은 이만 물러가서 쉬도록. 혼자 있기를 원해.”

“전하. 부디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위험하나이다.”

“내가 그리 미덥지 못한가.”

아스탄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제르센이 입술을 깨물었다.

“홀로 있고 싶으니 명을 따르도록 하라.”

“……예, 전하.”

제르센이 목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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