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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14화 (1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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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공작과 친구가 되는 방법.

아스탄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깔끔하게 조성된 정원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생각은 어김없이 이방인에게 향했다. 일전 이방인에게 말하였듯이 다른 이들이 무례히 굴었다면 직접 참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선 유쾌함만이 느껴졌다. 그 이유를 곰곰이 분석하였으나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도저히 그 정체를 추측할 수 없는 자. 모든 것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러지 아니한다. 마치 수수께끼 게임과도 같았다. 새로운 비밀을 발견할 때마다 흥미를 느꼈고, 갖고 싶어 졌다. 아니 그보다 더 질척한 감각이다. 아스탄은 차갑고 잘생긴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발길이 닿는대로 걷다보니 어느새 장미 정원 뒤편으로 난 연무장까지 가 있었다. 아스탄이 멈춰 섰다.

“……어? 공작님?”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서, 긴 다리를 편하게 접어 앉은 청년 또한 아스탄을 발견했다. 그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차 대륙인을 종종 만나보았으나, 이 자처럼 검은 눈을 가진 사람도 드물었다. 대부분은 진갈색에 가까웠는데, 눈 앞의 청년은 색달랐다.

“제국의 검, 노스트라드 공작이자 황가의 수호자이신 황태자 폐하를 뵙습니다…?”

“그렇게 어설프게 인사를 해오는 것도 오랜만이군. 이후 그대가 공을 세운다면 인사를 생략할 수 있는 권리를 수여하지.”

그리 말한 아스탄은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나이 열다섯에 아비에게 친형이 살해당하고, 내쳐지듯 노스트라드로 보내어졌다. 이후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고, 곁에 두지 않았다. 눈 앞의 무례한 자에게 너그러워지는 자신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제 습격을 당하고도 이곳으로 나올 마음이 들던가. 간이 크군.”

“거야, 난 공작님처럼 대단한 사람도 아니니까.”

“…해괴한 호칭까지. 그대는 어디까지 갈 셈인가.”

아스탄이 피식 웃고 말았다. 웃지 않아도 충분히 잘생긴 남자였다. 그러나 눈이 반으로 접히고, 입술 끝이 올라가며 살짝 미소짓자 마치 꽃이 피는 것처럼 화사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얼어붙은 보석 같다 생각되던 눈동자도 냉랭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솔직히 레나드보다도 더 잘생긴 것 같았다. 아니, 이제껏 본 사람들 중에 가장 완벽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윤이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 짓궂은 겨울바람은 회오리처럼 불어와 윤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흔들어놓고 유유히 사라졌다.

“아….”

흙먼지가 눈에 들어가자 윤은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눈물이 찔끔 흐를 만큼 매운 습격에 눈가를 마구 문지르자 아스탄의 손이 그것을 말린다. 윤보다 머리 하나 정도 큰 키만큼이나 손도 무척 커서, 한 손으로 윤의 얼굴을 모두 덮을 수 있을 정도였다.

“더러운 손으로 눈을 만지다니. 먼지를 더 집어넣을 생각인가.”

차갑게 말하면서도 손길은 어딘가 다정함을 품고 있었다. 커다란 엄지손가락이 눈물이 괸 눈 밑을 살짝 쓸고 지나간다.

“고, 고마워.”

어쩐지 뺨으로 열이 몰리는 기분에 윤이 머쓱하게 대꾸했다.

“이봐, 공작님.”

“무엄하군.”

“대련하지 않을래?”

윤이 검을 살짝 들어보였다. 아직 초저녁이지만, 이런 날은 잠에 쉽게 들지못한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한바탕 신나게 검이라도 휘두르고 나면 꿈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종종 레나드와 함께 했던 마지막 순간을 아주 천천히 돌이켜보는 악몽을 꾼다. 그러나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는 레나드의 얼굴을 쳐다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깨어난다. 그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운동을 하고 나면 잠이 잘 오더라고.”

“……좋다.”

한참동안 탐색하듯 윤을 응시하던 아스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아스탄은 패용하고 있던 허리의 검대에서 검을 풀어냈다. 검을 뽑자 스릉-. 하고 맑은 목소리로 검이 울었다. 이번엔 트리기토스가 아니었다. 그란디아의 일반적인 검, 브로드소드와 궤를 달리하는 형태로 가죽을 감싼 손잡이와 코등, 길고 좁은 검체까지 동양식 도검에 가까운 형태를 취했다.

윤은 물욕이 없는 편이었지만, 검을 모으는 건 좋아했다. 덕분에 노스트라드 공작 시절, 주어지는 사비를 모조리 털어 귀하다는 도검을 수집한 탓에 늘 아론에게 잔소리를 듣곤 하였다. 공작의 검 역시 탐났으나, 빠르게 포기했다.

“진검으로 하자는 거야? 위험할 거 같은데.”

“왜 무서운가?”

“…그건 아닌데, 날 죽이려는 속셈은 아니지?”

아스탄이 피식 웃었다.

“난 진검이 없다구.”

“검을 빌려주지.”

아스탄은 손짓을 했다. 그와 동시에 그림자에서 출렁거리며 수신호위가 튀어나왔다. 안즈마네가 만들어낸 반인반마(半人半魔)의 존재로 망가지지 않는 이상 늙지도, 죽지도 않았으며 그림자 속에 숨어서 황족들을 수호했다. 안즈마네 역시 스무구 정도를 만들어내는 데 모든 기력을 소진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걸로 알았는데, 아직까지 이어졌나보다. 반인반마는 자신의 검을 윤에게 내밀었다.

“잘쓰고 돌려줄게.”

마치 사람에게 대하듯 인사를 하자, 당황한건 수신호위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한 그는 윤과 아스탄의 눈치를 보다가 그림자 속으로 재빨리 숨어들었다.

연무장 가운데를 사이에 둔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섰다.

“그대에게 선공을 양보하겠지.”

“후회할 텐데?”

“본공은 내뱉은 말을 다시 담지 않는다. 와라.”

아스탄이 기수식을 취했다. 다리를 어깨너비만큼 벌리고 양손으로 살짝 검을 쥔다. 정면을 바라보는 자세는 무척 익숙했다. 자신이 전파한 검도자세였다. 쓴웃음을 삼킨 윤이 땅을 박찼다. 아스탄과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들어가며 위에서부터 크게 내려친다. 그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후웅!

강력한 힘으로 내리친 일격이 만들어낸 검풍에 아스탄의 머리카락이 흔들릴 정도였다.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검격을 피했다. 윤은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따라붙었다.

아스탄은 당황하지 않고 윤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심장을 노리며 찔러들어오는 검은 단숨에 몸을 꿰뚫을 듯 매서웠다. 윤은 칼을 비스듬하게 세워 쳐내며 검로를 바꾸었다. 동시에 손목에 힘을 주어 빙글 돌려 옆구리를 공격한다. 아스탄이 막아낸다.

아스탄의 검술은 화려하진 않았으나 신속하고 정확했다. 정확하게 사람의 급소만을 노려오는 솜씨는 소름이 끼칠 정도다.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며, 순식간에 수십합이 지나갔다.

“이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후려치듯 검을 내리그은 공작의 검을 윤이 막아냈다. 손목이 지잉-. 하고 울릴 만큼 강력한 힘이다. 사슴처럼 재빠른 윤의 검로를 따라가기 힘드니, 강력한 힘으로 제압할 요량인 듯했다.

“하압!”

윤이 횡으로 검을 휘두르며 짓쳐들어오자 공작이 그것을 막아낸다. 챙! 맑은 소리가 공터에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검날을 서로 맞댄 채 빙글빙글 돌며 힘겨루기를 했다. 공작보다 훨씬 작은 윤이지만, 몸싸움에서 쉽게 밀리지 않았다.

“제법이군. 대단한 실력이야.”

“그쪽이야 말로.”

“현재 그란디아에 머무는 차 대륙인들 중에 너처럼 뛰어난 검사가 있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아스탄의 목소리엔 미약한 즐거움이 서렸고, 냉랭한 얼굴에도 한줄기 웃음의 빛이 떠올랐다. 그의 눈동자엔 윤의 모습만을 담고 있었다.

제법 뛰어난 검사라는 것은 이레인과 에단의 말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이상이었다.

“그들은 날 모를 거야.”

“무슨 뜻이지?”

“비밀. 공작님이잖아. 스스로의 힘으로 맞추어봐.”

짧은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떨어져 나갔다. 짧게 숨을 고른 공작이 다시금 공격을 위해 윤의 머리 쪽으로 검을 찔러 들어온다. 평범한 사람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오면 눈을 감게 되어있다. 그러나 윤은 검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막아내었다. 검을 빙글 돌려서 아스탄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공작이 힐끔 자신의 목에 닿은 쇳덩어리를 곁눈질 했다. 살갗에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서늘한 감촉이 느껴진다.

“그대의 승리로군.”

“과찬의 말씀을.”

“그대에게 살심이 있었다면 이 대련은 나의 죽음으로 끝이 났겠지.”

“그전에 난 화살꽂이가 되었을 거고.”

윤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하자, 공작이 피식 웃었다.

“눈치가 빠르군.”

“당신 같은 사람이 혼자 다닐 리가 없잖아?”

윤은 검을 방글 돌려 검대에 집어넣었다. 숨이 조금 거칠어지긴 했으나 멀쩡한 모양새에 아스탄은 자존심이 상하는 동시에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다. 눈 앞의 청년은 말그대로 수수께끼였다. 하루 이틀 수련해선 이런 실력을 갖출 수 없었다, 몇 살부터 검을 수련했는지 그 스승은 누구인지 궁금했다. 곧 그전에 먼저 패배의 설욕부터 갚아줄 차례다.

“한 번 더.”

“좋아.”

아스탄의 눈은 승부욕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윤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이후 수십 분간 검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무장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마나를 쓰지 않고 순수하게 기술만을 사용하는 대련이었다.

“이번엔 나의 승리로군.”

윤의 옆구리를 검의 옆면으로 살짝 친 아스탄이 씩 웃었다. 아스탄의 숨은 흐트러져있었고, 짧은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상태였으나 아름다웠다. 생동감 있는 모습은 조각상이 생명을 얻어 사람이 된 것 같이 시선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었다.

“진짜 공작님도 지독한 사람이야.”

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려 다섯 번을 싸웠다. 물론 그 중 네 번은 윤이 승리를 가져갔다. 마지막 대결은 윤의 체력이 떨어지며 몸이 둔해지는 것을 놓치지 않은 아스탄의 승리였다.

“이젠 더는 못해.”

“끝인가.”

아스탄의 목소리엔 다소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윤이 허한다면 몇 번이고 다시 덤빌 것처럼 무시무시한 체력에 윤이 혀를 내둘렀다. 자신의 체력도 나쁜 편이 아닌데, 공작은 무슨 에너자이저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1승 4패를 하신 소감은?”

“마지막은 본공의 승리지. 마지막에 이기는 자가 승자인 것이다.”

아스탄은 울컥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쩐지 불퉁한 얼굴은 처음으로 제 나이대 청년처럼 보였다. 윤이 킥킥 웃었다.

‘공작이 올해 몇 살이라 했더라….’

여튼 외양만 보면 자신의 또래이니 20대 초반의 나이일 것이다. 이제껏 황족 특유의 오만한 기운에 가려져있던 본모습은 좀 귀엽기까지 했다.

윤은 검을 허리춤의 검대에 묶은 후 몸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연무장 바닥으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공작의 잘생긴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간다.

“더럽게 무얼하는 거냐.”

“힘들면 사람이 누울 수도 있는 거야.”

“그대가 채신없이 굴만큼 지쳐보이진 않는데. 숨겨놓은 한 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스탄의 예리한 지적에 윤은 뜨끔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윤이 기억하는 20대 초반의 자신에 맞춰 몸을 움직였는데, 그걸 간파하고 있었나보다.

“왜? 얼마나 편하다고. 공작님도 많이 지쳤잖아. 이리 와서 앉아.”

윤이 제 옆의 흙바닥을 탁탁 쳤다. 잠시 망설이던 아스탄이 바닥에 앉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격의 없는 태도에 수신 호위들의 턱이 크게 벌어진다. 보통 사람이라면 느슨하게 늘어질텐데, 누군가 보고 있는 것처럼 꼿꼿하게 앉아있는 자세에 윤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대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그건 부탁?”

“거절한다면 명령이 되겠지.”

윤이 몸을 뒤집어서 바닥에 배를 대고 누웠다. 그리고 팔을 접어서 턱에 손을 괴었다. 그 상태로 눈만 들어 아스탄을 쳐다보았다. 아스탄은 이제 자신의 무례함을 일일이 지적하는 데에 지친 모양인지 눈썹만 한번 꿈틀할 뿐이다.

“무엇이 궁금한데?”

“너의 그 검술,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냐.”

============================ 작품 후기 ============================

<나의 전생 보고서를 친구가 봐주던 중>

친구 : 그럼 윤이에게 아스탄은 손자의 손자의 손자라는 거네.

저 : 응....

친구 : 윤이도 어쩔 수 없는 한국 남자 엿군하....ㅎ... ( ͡° ͜ʖ ͡°) 역시 영계가 좋은 건가?

저 : .........

오늘도 나전보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snako양님과 아추님께 감사드려요 8ㅁ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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