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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공작과 친구가 되는 방법.
“이쪽으로 오라.”
아스탄은 집무실의 안쪽 문을 열고 윤을 향해 손짓했다. 문을 닫으면 완벽하게 방음되는 밀실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에 적합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원탁을 가운데 두고 대여섯 명의 사람이 둘러앉으면 꽉 찰 것 같이 좁았다. 암중의 일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인사를 생략한 그대의 무례는 용서토록하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군. 앉도록.”
아스탄이 상석에 앉은 뒤 맞은 편을 가리켰다. 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빼서 앉았다. 평민은 귀족과 동석에 앉아서는 안 된다. 무례함에 치도곤을 당해도 모자랄 일이나 윤의 행동엔 거침없었다.
“내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윤은 단번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빙빙 도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었지 않나. 목이 몇 번이고 달아나도 이상치 않을 만큼 그대는 무례하였다.”
“맞아.”
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그란디아의 사람이 아님을 드러냈다. 누군가 눈치채주길 바라면서. 이곳에서 처음으로 알아차려준 사람은 역시나 월스턴의 후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스탄이 종을 울리자 시중인이 트레이를 끌고 왔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그는 조심스럽게 은제 뚜껑을 열은 후 테이블 위에 음식을 세팅하기 시작한다.
화려하게 세공된 접시는 보기만 해도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답다. 가볍게 먹을 수 있는 핑거 푸드는 마치 예술 작품 같았으며, 정갈하게 깎은 과일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마지막으로 테이블위에 올라온 것은 화주(火酒)였다.
“차보단 술이 낫겠지.”
“……그렇지.”
아스탄이 술잔을 내밀었다. 윤이 머뭇거리다가 받아 들었다.
“보카로 왕국산 화주다. 몹시 귀한 것이지.”
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스탄은 여유로운 남자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단단한 갑옷 아래, 깨져 나갈 것 같은 연약한 속살이 드러났다. 무엇이 그를 자극한 거지? 보카로 왕국? 화주? 그의 머리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자신의 의중을 내색치 않으며 아스탄이 윤의 잔에 화주를 따랐다.
투명한 크리스털 잔속에서 찰랑거리는 호박색 액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싸한 알코올 냄새와 함께 꽃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죽임을 당하기 전엔 없어서 마시지 못하던 화주였다. 지금은 입에 대는 것 조차 두려워졌다. 도통 마실 생각을 않자 아스탄이 윤의 손에 들린 잔을 뺏어서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은 뒤 윤을 차갑게 응시했다.
“독을 탔을까봐 겁이라도 먹은거냐.”
“……아니야.”
“내 잔을 주지.”
아스탄이 자신의 잔을 윤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술을 따랐다. 윤은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풍미와 식도를 넘어가며 느껴지는 홧홧한 기운. 최상급 화주다. 한참이 지나도 이상반응은 없었다. 그저 독한 술을 빈속에 마신 탓에 잠시 머리가 아찔해졌을 뿐이다.
“……아무 것도 없네.”
“그럼 내가 독이라도 탔을 줄 알았나?”
윤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공작의 발달한 기감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스탄이 날카롭게 웃으며 말했다.
“겨우 너 따위가 날 거절하다니, 죽여 버리고 말 것이다. 라고 자존심 상해하면서?”
“널 오해했다는 건 아니야. 미안.”
“그렇게 나오면 재미없지 않나.”
아스탄은 흥미가 식은 듯 손에 턱을 괸 채 가까이에서 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밤의 빛깔처럼 검은 눈동자처럼 켜켜이 쌓인 어둔 베일 속에 숨은 청년. 그의 비밀에 잠시나마 다가간 기분이었다. 다시 정답은 미궁 속으로 사라졌지만 말이다.
“내가 이곳의 사람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
“기록을 읽었다. 시황제와 현제의 기록을.”
“나도 볼 수 있을까?”
윤이 반색했다. 시황제와 현제의 기록이라니! 어쩌면 레나드가 자신을 왜 배신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동안 그를 괴롭혀왔던 악몽의 실마리를 찾았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곤란해. 황가의 사람에게만, 그것도 일부에게만 허락된 기록이다.”
“……그렇군.”
윤은 실망하지 않았다. 몰래 숨어들어서라도 훔쳐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 윤의 속내를 눈치 챈 것처럼 아스탄이 말했다.
“완벽한 자료는 나에게도 없다. 오로지 황제만이 드나들 수 있는 방에 있는데, 그 위치는 황제를 제외하곤 아무도 모른다.”
“쳇.”
“그러니까 나의 사람이 되어라. 그대에게 적법한 신분을 주겠다. 그리고 이 몸이 정당한 자리를 되찾는 날 너에게 자료 열람권을 주지.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면 아무리 써도 흘러넘치는 금은보화와 미녀를 안길 것이다.”
윤은 대답대신 술을 마셨다. 완곡한 거절의 표시에도 아스탄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모두 흥미가 동하지 않는 게로군. 무엇이 갖고 싶지?”
“네 제안은 무척 탐이나. 하지만 그걸 준다고 해도 난 네 것이 될 수 없어. 애초 동행을 한 것도 어린 아이가 죽을까봐 도운 거야. 이레인이 자리를 잡은 후엔 난 떠날 거니까.”
“이레인이 죽는다면?”
“너를 죽이겠지.”
“그 경솔한 입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내가 못할 거라 생각해?”
윤이 고개를 들어 아스탄을 마주보았다. 아스탄도 두려움이 없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오고가는 시선 속에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팽팽한 전류가 흘렀다. 그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님을 눈치 챘다. 순간이나마 떠오른 살기는 진짜였다. 자신의 수신호위도 쉽게 당해내지 못하리라.
“제안은 정말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넌 무얼 믿고 그렇게 무례하지?”
“……내 실력?”
“그래, 자신 있을 만한 실력이긴 하지. 그럼 널 곁에 두려면 무엇을 주어야하는 건가?”
점점 눈앞의 청년이 탐났다. 자신의 눈을 바로 쳐다볼 수 있는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엉겁결에 시선을 마주치더라도 금세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저 자는 단 한 번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아스탄의 물음에 한참을 생각하던 윤이 박수를 짝 쳤다.
“공작님이 싫은 건 아냐. 하지만 부하는 싫어. …그래! 친구는 어때?”
“친구? 그대가 감히?”
아스탄이 코웃음 쳤다.
“싫어?”
윤이 탁자에 팔꿈치를 걸친 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스탄과 얼굴이 스칠 듯 가까워졌다. 젖은 탓에 더욱 새까맣게 보이는 머리카락에선 깨끗한 냄새가 났다. 비가 오고난 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 때와 같은 향기였다. 윤이 눈을 둥글게 휘며 웃자, 아스탄의 턱이 미미하게 굳었다. 까만 눈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도 공작님이 마음에 드니까. 친구가 되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레나드와 무척 닮았으나 닮지 않은 사내였다. 미워해야하는 레나드의 핏줄이나 밉지 않다. 오만하게 굴고 밉살맞은 입을 가졌으나 싫지 않다. 귀엽게까지 느껴졌다. 손자 뻘 나이라서 그런 것일까. 눈앞의 남자보다 훨씬 어린 외양을 가진 청년이 생각했다.
“……비록 성격은 좀 나빠 보이지만.”
“그건 칭찬인가, 욕인가.”
“칭찬이야.”
아스탄이 다소 떨떠름함을 숨기지 않은 채 되물었다. 윤이 키들키들 웃었다.
“친구가 무에 소용 있지?”
“외롭지 않게 될 테니까. 기쁨은 더해주고, 고통을 나눠가질 수 있는 사람.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생기는 거야.”
“…….”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있는 힘을 다해 도울 거고. 즉 네 것이 아니더라도 널 돕겠단 뜻이지.”
아스탄은 잠시나마 마음이 흔들림을 느꼈다. 과연 친구를 가지게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 월스턴의 회고록을 읽으면, 윤을 만나게 된 후엔 그의 이야기 밖에 존재치 않았다. 심지어 같은 날, 같은시에 눈을 감아 천생연분이라 불렸던 황후, 안즈마네 보다 윤의 언급이 많았다. 윤이 함께 울어주었다. 윤이 웃었다. 윤이 있어서 다행이다. 윤이 없었더라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윤, 윤, 윤.
위대한 황제조차 자신의 갑옷을 내려놓고 속내를 드러내게 만드는 존재.
‘친구라.’
아스탄은 낯선 단어를 입안에서 굴렸다. 우습게도 황태자가 내려주는 신분도, 금은보화도 모두 거절한 사내가 요구한 것이 겨우 친구라는 이름이라니. 눈앞의 사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자신만만해하면서도 어딘가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다.
“…친구라. 좋다.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노스트라드 공작, 아스타시온 베덴 크라이슬러는 신의로서 너를 대하고,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 정해윤은 아스탄을 친구로 여기며, 내 숨이 이어지는 날까지 신의로서 대함을 약속합니다.”
잔을 부딪친 후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이곳에 온지는 얼마나 되었지?”
“……열여덟에 처음 왔어. 눈을 뜨니까 여기였어. 삼년 정도 되었네.”
“지금 스물한 살인가?”
“맞아.”
윤은 교묘하게 과거와 현재를 섞었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열여덟 살의 나이였으니 거짓말도 아니었다. 160년 전에 이곳에 왔노라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검술은 언제부터 수련한 것이지?”
“일곱 살.”
“대단하군. 십오 년의 수련에 최상급 소드 익스퍼트라. 왜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거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나저나 아스탄 너는 몇 살이야?”
“……올해로 스물이 된다.”
윤이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보다 다섯 살은 더 많아 보이는 공작이 자신보다 연하라니. 그래서 존댓말을 하기 싫었던 거라며, 이제까지 행했던 자신의 막나가는 행동을 합리화했다.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었다.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풀어짐을 느꼈다. 아스탄은 이마를 짚었다. 단 한 번도 이런 졸음을 느낀 적 없건만 몸이 저항치 못하였다. 탁자에 엎드린 그는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자작을 하던 윤은 아스탄이 잠들어 버린 것을 발견했다. 탁자 위에 팔을 얹은 채 그 위에 머리를 대고 깊은 잠에 빠진 상태였다. 어깨를 살며시 두드려보아도 깰 줄 몰랐다. 엎드린 남자의 등은 무척 넓었으나 쓸쓸한 느낌이다.
윤은 홀로 술을 마시며 시간을 죽였다. 돌연 아스탄의 어깨가 단단하게 굳었다. 얼굴 역시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나는 …당신이… …습니다.”
아스탄의 감은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고였다가 반짝이며 사라진다.
“……ㄴ님.”
윤은 그것을 가만 쳐다보다가, 머뭇거리던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잔뜩 굳어 있던 아스탄의 입가에 슬며시 풀어진다. 부서질 듯 가느다란 미소가 흔들리듯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비밀은 있다. 거칠 것 없는 제국의 황태자에게도 남모를 아픔이 있었나보다. 윤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어린 아이를 달래듯 아스탄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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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도입부가 끝이 났습니다 (박수함성~~)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와 모험의 시작입니다.
나전보를 읽어주시고 추천을 남겨주시고 덧글을 남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바보벌레님 감사드립니다 8ㅁ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