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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생보고서-36화 (3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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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약조.

아스탄은 한숨을 내쉬며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잠은 달아난 지 오래다. 다시 수면을 취하고 싶은 욕구는 들지 않았을뿐더러, 악몽으로 지금의 상쾌함을 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하여 아스탄은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대신, 윤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스물두 살, 자신보다 연상이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앳된 얼굴이다. 화가가 세필로 그린 듯 섬세한 생김새를 가졌다. 이목구비도 단정하니 오밀조밀하다. 감은 눈은 초승달처럼 둥글었고 속눈썹이 촘촘하니 그늘을 드리웠다. 코는 날렵하긴 했지만 작았고, 얼굴선도 단단하게 여물기보다는 여리다.

오후의 햇살이 윤의 눈가를 침범하자 윤이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투정부리는 아이 같아서 아스탄은 얼결에 웃고 말았다. 바르게 누워있던 아스탄은 몸을 돌려서 자신의 몸으로 햇빛을 가렸다. 그제야 윤의 찡그린 미간이 풀어진다.

혈색이 싱그러운 얼굴은 사랑스럽다. 누군가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한 적 있던가. 그러나 아스탄의 예기치 않은 고행은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햇빛을 피해 윤이 아스탄에게 달라붙은 것이 그 서막이다. 아스탄이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끌어안았다. 그는 따끈한 체온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슴팍에 뺨을 비비고 코를 박았다. 팔을 뻗어 허리를 강하게 휘어 감았고, 허벅지 사이에 다리를 넣어서 두 사람의 다리가 뒤엉켰다.

남자와 청년이 한 몸으로 얽혔다. 두 사람의 젊은 육체는 훌륭한 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 본다면 절로 얼굴을 붉힐 만큼 야릇한 광경을 만들어냈다. 다만 무의식중에 나온 자세일 뿐, 의도한 바는 없었다. 한사람만 고통스럽고, 한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깊은 잠이 들어 있으니까.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아스탄은 고개를 숙여 윤을 보았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노골적인 유혹의 행위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거리낌 없이 유혹에 응하였을 것이고.

허나 작게 들리는 숨소리가, 흙내 섞인 윤 특유의 바람 냄새가 그의 흥분된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다. 훈련을 한 후 제대로 씻지 않고 잠이 드는 게 아니라, 적어도 장미수에 몸을 담가 그 향을 입히고 사내를 받아들일 준비를 한 후에 손을 뻗어왔을 터였다. 무신경한 청년의 성품에 유혹을 해올 것 같지도 않았다.

“으음.”

윤이 뒤척이며 아스탄의 품에 더욱 깊게 파고든다. 그의 체온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맞닿은 피부로 신경이 곤두섰다. 고르게 숨을 내쉴 때마다 살갗을 간질였다. 윤의 허벅지가 몸의 중심에 닿을 듯 말듯하다.

제 아무리 절제력 뛰어난 청년이라도 그 역시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자연스러운 반응에 그의 중심이 열기를 얻었다. 하복부가 뿌듯하도록 당겨왔다. 윤을 떼어내기 위해 살짝 몸을 밀어내자 더욱 강한 힘으로 달라붙어 온다. 허벅지가 힘을 얻은 중심을 스쳤다. 아스탄은 이를 악물었다.

모든 것이 의도치 않은 유혹이고 달콤한 고문이었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규칙적인 숨결이, 맞닿은 가슴과 가슴, 중심에 닿을 듯 닿지 않는 얽힌 다리까지. 숨이 절로 거칠어지며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아스탄은 그란디아의 황태자, 그가 이 땅에서 갖지 못할 것은 없다. 눈앞의 청년 또한 마찬가지다. 청년은 비밀에 싸여 있었으나, 단지 소드 익스퍼트의 검사였고 검공과 같은 곳에서 온 이였다. 그리고 아스탄에게 속한 사람이었다. 강제로 취할 수 있었다.

허나 영영 잃게 되리라. 이 스스럼없는 태도의 청년을.

윤이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본다고 생각하자 영혼이 얼어붙는 공포를 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는 마치 달아오른 머리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하여 청년이 작게 몸을 뒤척일 때마다 아스탄은 주먹을 쥐고 이를 사려 물며 치미는 욕구를 간신히 참아냈다. 생각 같아서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찢고 파고들고 싶은 난폭한 욕망을 억눌렀다.

탈진하도록 참아낸 아스탄이 지쳐 잠이 들었을 때, 침실을 방문한 제르센이 경악을 하지만 그건 두 사람이 모르는 이야기다.

**

그란디아의 일익을 담당하는, 노스트라드 공작의 집무실은 최신 유행에 뒤떨어져 있다. 차 대륙풍 또는 로카이유 양식으로 꾸미는 것이 최근의 흐름이지만, 눈앞의 장소는 마치 백 년 전의 양식을 그대로 박제한 듯 물푸레나무와 대리석을 사용해 꾸몄다. 위엄 있고 웅장한 모습이었지만 예스러움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손가락질 하지는 못하리라. 초대 노스트라드 공작인 검공의 대에서부터 유지된 집무실을 두고 누가 감히 입방아를 찧겠는가.

세월이 갈수록 고아한 매력을 더하는 물푸레나무로 만든 책상과 의자가 가장 중심에 놓여 있다. 화려한 세공을 하거나 보석을 박아 넣지도 아니하였건만 자연스러운 위엄이 배어나온다.

현 노스트라드 공작, 아스타시온 베덴 크라이슬러는 무척 젊은 남자였으나 이 오래된 집무실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모습은 오래된 고서 속에서 빠져나온 듯 보인다.

제르센은 외알 안경 너머 비치는 자신의 주인을 살펴보았다. 연치 어린 공작이라 하나 그를 무시하는 이들은 없다. 북방의 야만인들을 직접 참하며 황제의 견제를 이겨내고 스스로의 위치를 넓히고 있다. 그의 모습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동시에 종종 위화감을 느꼈다. 그의 연륜은 도저히 스물이란 나이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제르센은 다시 문건에 코를 박으며 업무에 집중했다. 보좌관이라는 직업은 주인에 따라 그 바쁨이 결정되는 법이다. 권력의 최정상에 위치한 노스트라드 공작의 오른팔답게 제르센에게도 어마어마한 업무량이 주어졌다.

제르센의 업무는 일차적으로 문건을 걸러서 중요한 순서대로 나누어 공작에게 보고하는 것. 노스트라드 공작과 황태자를 겸임하고 있는 공작의 위치 덕분에 그의 책상에는 매일 같이 산더미 같은 서류더미가 쌓인다.

“제르센.”

“예, 전하.”

끝이 없는 지긋지긋한 서류들. 제르센은 욕설을 중얼중얼하며 안건 분류에 몰두하던 중이었으나 공작의 부름에 모든 업무를 멈추었다.

“현재 노스트라드의 아카데메이아에 들어가고 있는 예산이 얼마지?”

“일 년에 육십 골덴입니다.”

금 60kg! 어마어마한 예산이다. 공작이 아카데메이아의 예산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 그들에게 감사가 들어갈 예정이라는 뜻이다. 드디어 기름 낀 돼지들에게 철퇴가 날아가는 군. 제르센은 냉소를 입가에 올렸다.

아카데메이아. 대학이라고도 불리는 학문의 상아탑으로 센트리움을 포함하여 4대 공가의 영지에 총 네 개 위치해 있다. 위치에 따라 그들이 주로 담당하는 학문이 나뉜다. 노스트라드는 검, 웨스트올로는 마법, 사우스클라인은 상업, 이스트민스트는 농‧공업이다. 그 외에도 아카데메이아에선 작도법, 언어, 법률 등을 생활 전반에 필요한 기초 학문과 필수 교양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렉스 그랑드에 따라 귀족이 아닌 이들이 5등급 이상의 관료가 되기 위해서는 아카데메이아의 수료가 필수다. 때문에 청운의 꿈을 품은 이들은 밤잠을 줄여가며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애썼다. 때론 가정교사를 고용할 여력이 없는 가난한 귀족 자제들마저 시험에 매달렸다. 덕분에 매해 시험장은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고, 아카데메이아가 설립된 초기 몇 해를 제외하면 정원미달로 고생했던 때가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다.

하지만 아카데메이아를 유지하기 위한 4대 공가의 고생은 말로하지 못할 정도로, 학생들에게서 일정부분 학비를 받는다하나 그것으론 부족했다. 대부분의 예산을 아카데메이아의 장(長)인 공작들이 지원한다고 보아도 좋았다. 눈 먼 보조금이 양껏 주어진 탓에 부정부패가 만연하였으나 그것을 눈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신민들에게는 반드시 배움의 기회가 열려있어야 한다.

바로 시황제 월스턴의 유지 때문이다. 덕분에 4대 공가는 정초 신년회의 의제를 늘 아카데메이아의 축소를 주요 안건으로 올렸으나 늘 기각당하고 말았다. 헌데 아스타시온 황태자가 직접적으로 불만을 품었다. 조만간 철퇴가 떨어지리라.

“기사단의 유지운영보수비의 두 배에 해당하는 군.”

“……정확히 1.5배입니다.”

“그런데 빈민 구제책을 이따위로 하자는 건가? 아카데미에서 헛기침이나 하고 있는 교수들의 머릿속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확인하고 싶군.”

아스탄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빈민구제책이라는 보고서를 거칠게 흔들어보였다.

빛이 강하면 어둠이 기승을 부리는 법. 최근 그란디아의 골칫덩이는 바로 도시 빈민이었다. 도시로 가면 부자가 될 거라 생각해 무작정 자신의 땅을 떠나온 이들은 당연하게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 부랑자가 되었고, 센트리움과 라덴을 비롯한 많은 도시의 치안에 악영향을 끼쳐왔다. 그것을 해결할 방도를 생각해보라 교수들에게 지시했더니 내놓는 보고서의 꼴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란 말로도 부족하다.

“빈민들 모두에게 조건 없이 일정 부분 보조금을 지원하자고? 그 세수는 어디에서 거둔단 말이냐. 그자의 머릿속은 꽃밭이란 말인가? 저것은 장작으로 쓰도록 하라.”

아스탄은 보고서를 거칠게 구긴 후 앞으로 내던졌다. 짜증이 치밀어 뒷내용은 궁금해지지도 않을 정도다. 아카데메이아에 대한 감사를 진행함과 동시에 예산 삭감을 정기회의 안건에 올려야겠다고 짧게 메모한 뒤, 다시금 문서 처리에 몰두했다.

“전하, 검은 늑대 기사단장이 도착했나이다.”

“들어오도록 하라.”

아스탄의 지시에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오후의 햇살을 등진 윤이 어색한 얼굴로 들어왔다. 몸에 잘 맞는 기사단복은 감색으로, 상완 부근에 붉은 띠를 둘러 검은 늑대의 수를 놓았다. 윤을 위해 특별히 만든 기사단장의 옷이다.

“나쁘지 않군.”

“……그래? 오랜만에 예복을 입어서 그런가. 좀 불편하네.”

단복은 엄밀히 말하면 예장에 가깝다. 목 끝까지 단추를 죄고, 허리 부근도 타이트하게 죈다. 신축성이 좋긴 하지만, 한국의 합성 섬유처럼 탄력성이 좋은 건 아니어서 검을 휘두르다간 옷을 죄다 찢어먹을 판이다. 이런 복장을 하고 싸우라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되었다.

“이전에도 입을 기회가 있었다는 건가?”

아스탄이 예리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윤이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변명을 짜내었다.

“……거야 내 세상에서도 정장은 있으니까. 그나저나 이건 뭐야?”

윤은 발치에 걸리는 종이 덩어리를 주워들었다.

“빈민구제책?”

“쓰레기다.”

아카데메이아의 식충이들을 떠올린 아스탄이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대꾸했다. 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우뚱했다.

“구제책이라면 좋은 건 아니야? 어떤 내용이기에 그래?”

윤은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곤 어이없단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제 손으로 폈던 종이를 다시 구겼다. 공이 되도록 똘똘 뭉친 후엔 직접 벽난로에 던져 넣는 성의를 보였다. 그 호쾌한 모습은 윤을 좋아하지 않는 제르센마저 속이 시원해질 정도였다.

“네 말대로 쓰레기로군. 괜히 눈만 버렸어! 무작정 돈을 준다면, 누가 일을 한단 말이야? 그리고 그 돈은 어디서 나오고.”

제법 정확한 분석에 아스탄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떻지?”

“……난 검사라니까. 머리 쓰는 덴 재능이 없다고.”

“떠오르는 대로 말해보라는 거다. 나도 바보가 아니야. 정제되지 않은 대책을 그대로 쓸 것 같은가?”

“거야, 뭐.”

윤이 뺨을 긁적였다. 복지제도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그란디아보단 한국이 낫다. 사실 빈민에 대해 일정 금액을 지원하는 건 기초수급자 제도와 흡사했다. 하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어린아이도 보호하지 않는다. 장애인이나 노인을 지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엉망인 정책을 욕하는 것과 별개로 얼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도울 방법이 있다면 힘이 되고 싶었다.

“그거 보다는… 단순한 노동을 시키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게 어때? 예를 들면 거리의 청소라거나… 솔직히 길이 많이 더럽잖아? 남들이 싫은 일을 부랑민들이 대신 하는 거지.”

“제법 괜찮은 생각이군.”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이들이 도시로 올라오며 오물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시골에서 살던 습성을 버리지 못해 가축을 키우며, 그들이 싸지르는 분뇨가 어마어마한 탓이다.

그나마 노스트라드는 추운 지역이라 이런 문제가 덜하였으나, 더운 사우스클라인이나 센트리움의 경우 큰 골칫덩이가 되었다. 특히 해자가 있는 영주성은 몰래 갖다버린 오물이 부패하여 코가 마비될 정도로 악취를 풍겼고, 전염병의 근원이 되었다.

“……그래 분뇨를 모아서 비료로 만들어도 나쁘지 않겠군.”

아스탄이 환하게 웃었다. 마음이 술렁거릴 정도의 미소에 윤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제르센 또한 생각지도 못한 이에게서 혜안이 나왔다며 감탄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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