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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약조.
이레인을 만나고 난 뒤, 윤은 행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물론 짐을 싸는 건 솔라의 일이고, 윤이 하는 건 셰즈 롱그를 뒹구는 게 전부였다.
솔라 만이 바삐 움직이며 아스탄이 선물한 예장을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포장하고, 그에 맞춘 액세서리를 보석함에 넣었다. 마치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바리바리 짐을 싸는 모습이 의아했지만, 저 하고싶은 대로 내버려두었다. 윤에게 필요한 건 휘두를 수 있는 검과 간편한 옷뿐이다.
“역시 권력이 최고긴 해.”
솔라는 사람 좋은 얼굴로 하하 웃으며 “역시 그렇죠?”하며 윤의 말을 거들었다.
“솔라.”
“예, 하이어드 경.”
“이것은 나의 궁금증이니, 기분 나쁘게 듣지 않길 바라. 그대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공작의 보좌관으로 들어가도 될 텐데 왜 나를 맡은 거야?”
“하이어드 경께선 생각보다 예리한 분이시군요.”
예리한 질문에 솔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실제로도 지혜롭지 않았다. 그러나 뱃속이 검은 능구렁이 아저씨들 사이에 구른 세월이 오십년이다. 최소한 상대방이 진심을 가지고 자신을 대하는지, 아니면 속내를 숨기고 있는지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솔라에겐 의뭉스런 무언가가 있었다.
“……생각보다, 라는 단어가 썩 기분 좋지 않은데?”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솔라가 곧장 머리를 숙였다.
“저의 잘못은 달게 받아 들일 터이니, 저를 내치지만 말아주십시오.”
“보통은 그 자리도 물러난다고 하지.”
“하하하, 역시 예리한 분이시라니까요.”
“그러니까 이유를 알려줘.”
솔라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조심스럽게 답했다.
“대단한 건 아닙니다. 전하의 옆자리는 형님이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저는 유능하지만, 그래도 형보다 못합니다. 그 자리를 제치진 못하겠지요. 전 드래곤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는 게 낫다는 사람입니다.”
“야망이 크네.”
“게다가 경은 뱀 따위가 아닙니다. 차기 권력의 중심! 경은 이제 1인 기사단이라 하나, 황명을 거부할 수 있는 검은 늑대 기사단장의 위치에 오르셨습니다. 노스트라드 공작의 부재 시 공작의 대행까지 될 수 있는 분이시라고요. 이제 저도 공작 대행의 시종이 된 거지요. 하하하.”
솔라가 제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 뻔뻔하게 웃어보였다. 시종으로서는 실격인 남자다. 제르센이 왜 중용하지 않았는지, 아이그너 가문의 둘째라는 직함을 갖고도 황가의 사람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흑심을 품었다고 말하고 솔직하게 말하는 솔라가 싫지 않았다. 아스탄이 저자를 붙여주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전에 있던 시종보다 확실히 초대장의 처리나, 잡다한 일처리를 하는 데 있어서 제법 유능하기도 했다.
좀 더 두고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윤은 바닥에 깔린 주스를 입에 털어넣었다.
공작의 일행이 제도 센트리움으로 향하는 당일. 황제의 수신호위 척 베스파뇰은 당황한 표정을 재빨리 수습했다.
제 아비가 목숨을 노리는 것을 잘 알 텐데도 황태자의 일행은 수가 적었다. 황제가 허락한 단 열 명의 인원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섯 명이 북쪽을 떠날 예정이다. 황태자 아스탄과 검은 늑대 기사단장 윤, 보좌관인 아이그너 가문의 제르센과 솔라, 회색 늑대 소속 롭 이벨로크와 단원 하나다. 그 단원마저도 무척 어리고 앳되어 보였다.
이레인을 수행하던 중 부상으로 인해 제도로 돌아가게 된 에단과 로릭을 더하더라도 열 명이 되지 않았다. 개중 싸울 수 있는 인원은 넷에 불과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거지.’
척은 외안을 번뜩이며 공작의 마차를 노려보았다. 마차 안엔 황태자와 차 대륙인 검사가 타고 있다.
‘빌어먹을 계집. 도움이 되질 않는군.’
이스트민스트 공녀가 동행을 청하여 함께 움직이게 되면서 모든 일이 꼬였다. 습격을 하려고 계획을 짜도 혹여 공녀가 다칠 가능성을 생각해 함부로 움직이지도 못하였다. 그야말로 거치적거리는 방해물이다.
‘생각을 알 수 없는 건 황제 역시 마찬가지지.’
척 베스파뇰이 황제에게 명을 받은 건 ‘반드시 차 대륙인 검사를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제도로 끌고 오라.’였다. 될 수 있다면 하찮은 신분으로 떨어트리도록 하라고 덧붙였다. 어찌되었든 공작의 일행으로 제도로 향하니 황제의 명령은 반쯤 완수한 셈이다. 그간의 변동 사항을 상세히 기술하여 전서구에 묶어 보냈으니 조만간 답이 돌아오리라.
“도개교를 여시오!”
나팔꾼이 크게 뿔피리를 불었다. 공작성의 거대한 정문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공작 전하의 행차이니 모두 예를 표하시오!”
마법으로 목소리를 쩌렁쩌렁하게 키운 호명꾼이 외쳤다. 라덴을 바삐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다가 황급히 길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화려한 공작가의 문양이 보이자 모두 고개를 조아려 예를 표했다. 평소의 소탈한 아저씨 같은 모습을 모두 지워버린 롭 이벨로크가 칼처럼 예리한 눈을 했다. 다각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관도를 달렸다.
여정의 시작이었다.
마차 안, 윤은 길게 하품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노스트라드를 떠난 지 만 하루. 마차는 도룬 영지의 입구로 접어들고 있었다. 흔들림 방지 주술을 걸었다지만, 잘 닦이지 않은 관도 탓에 큰 돌을 밟으면 이리저리 튀어 오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스탄은 속이 부대끼지도 않는지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 적힌 양피지를 검토했다. 잠시 쉬는 시간을 제외하면 언제나 업무에 열중이다. 윤은 새삼스럽게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영주였는지를 자각했다.
그 모습에 자극 받아서 책을 꺼내기도 했지만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집어넣어 버렸다. 아벨라르로 돌아온 초기에는 이곳에 대해 하루빨리 파악해야 된다는 생각에 주독야독(晝讀夜讀)했지만 지금은 의욕이란게 없는 상태다.
“이봐, 아스.”
“아스탄이다.”
“이제 포기할 때도 된 거 아냐?”
아스탄의 정정에 윤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양피지에서 시선을 뗀 아스탄이 윤을 바로 쳐다본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에 윤이 히죽 웃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도대체 무슨 업무를 하는 거야. 일하다가 사람 죽겠네.”
“노스트라드의 예산을 감찰하는 중이다. 도로를 놓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해. 짜낼 수 있는 곳에서 최대한 세수를 확보해야지.”
“도로?”
아스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노스트라드와 센트리움 사이에 관도가 뚫려 있잖아?”
“라덴을 중심으로 가도를 건설할 예정이다. 관도라…… 이것이 제대로 된 도로라고 생각하나?”
아스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차의 바퀴가 커다란 돌에 걸렸는지 마차가 크게 튀어 오른다.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기 직전 윤이 간신히 손잡이를 잡아 그것을 막았다. 혀도 깨물 뻔했다. 도로 건설은 반드시 필요했다. 윤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덴은 부유한 도시지. 하지만 그 재화가 퍼지기 위한 길이 부족해. 다른 영지 또한 마찬가지다. 센트리움, 노스트라드, 이스트민스트, 웨스트올로, 사우스클라인. 모두 다른 왕국과 비교도 할 수 없이 번화한 곳들이지. 하지만 길이 제대로 뚫리지 않아 교류가 없어. 재화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영지들 간의 빈부격차가 무척 심해.”
“……그건 그렇지.”
“정체된 것은 썩기 마련이다. 팔라티온의 치세 역시 마찬가지야. 그가 광증에 걸렸지만 괜찮다고? 밖을 봐, 노스트라드를 벗어나자마자 사람들의 꼴이 어떻지?”
도룬의 농민들은 다 헤진 옷을 입고 있었고, 표정 또한 지쳐 있었다. 활기는 마치 오랜 가뭄에 시달린 논밭과도 같이 그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노스트라드와 전혀 다른 모습에 윤은 놀랐다. 이제껏 안정된 통치의 노스트라드만 봐왔던 터라 제국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 알지 못했던 탓이다.
아스탄은 굳은 표정으로 창밖을 보다가 거칠게 커튼을 쳤다.
“검공이 말했다던가? ‘모든 길은 센트리움으로 향해야 한다.’고.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 길을 건설하고, 빈민을 구제하고, 나는 이 나라를 바꿀거다.”
“좋은 생각이야, 아스. 잘 해낼 거야.”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아스탄이 강한 의지가 깃든 눈동자로 윤을 응시해왔다. 윤은 조금 목멘 목소리로 대꾸했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검사로서 너는 천재적이야. 게다가 네가 내어놓는 생각은 무척 유용하기까지 해. 네 힘이 필요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월스턴이 원대한 꿈을 꾸었을 때, 그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이렇게 가슴이 뛰었다. 쓸모없어졌다고 버림받았을 때가 오래 지나지 않은 이야긴데 다시금 헛된 꿈을 꾸게 한다. 빌어먹을. 윤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표정이 갈무리되지 않았다.
“친구로서 같은 길을 가는 걸론 부족하단 생각이 들어. 내게 너를 다오.”
아스탄이 오만하게 말했다.
“아니, 네게 선택권은 없다.”
“…….”
“네게 선택을 하게 하면 꼭 거절을 하더군.”
아스탄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윤의 손을 악수하듯 강하게 움켜쥐었다.
노회한 용사의 심장이 뛰기 시작하였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