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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누명.
“아휴, 이제야 좀 살 것 같군요.”
솔라가 윤의 옷을 정리하며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윤에게 본성을 들킨 이후 이제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생긴 건 잘 다려진 셔츠깃처럼 빳빳한 인상인데 내용물은 수다쟁이었다. 윤은 그의 입을 틀어막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으나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도룬 남작도 참 멍청하지 말입니다. 그런 작자가 어찌 황제의 수하라 할 수 있는지……. 역시 돈 때문에 그를 거둔 것이 아닐까요.”
그저 한 귀로 흘리며 얌전히 검을 닦았다.
-우우웅.
마른 천에 연마제를 묻혀 검신을 닦아내자 트리기토스가 기분 좋은 듯 울어댄다. 사용하지 않아도 검을 손질하는 건 윤의 일과 중 빠지지 않는 숙제였다. 예전에는 검신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는데. 윤은 새삼스러운 과거를 떠올렸다. 손이 느려지자 트리기토스가 울며 제대로 닦으라며 재촉한다.
아스탄의 말을 생각했다. 자신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장 있을 황제와의 결전뿐만 아니라 더 큰 미래를 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스탄이 만들어갈 미래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이 생겼다. 윤은 주먹을 꽉 쥔 채 이마에 가져다댔다.
‘문스톤이 모두 충전되면 떠날 수 있을까.’
답은 이전처럼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드 경! 하이어드 경!”
“음? 솔라 왜?”
“제 말을 듣고 계셨습니까?”
“물론이지.”
윤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솔라의 의심스러운 표정에도 해맑은 표정을 유지했다.
“이스트민스트 공녀께서 대화를 청하십니다.”
“……공녀가 왜?”
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지금은 늦은 밤이었고 이스트민스트 공녀와는 이렇다 할 친분이 없었다. 물론 그쪽에서 보이는 일방적인 호의가 있긴 했으나 좀 부담스러운 종류의 것이다.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서 여쭙고 싶은 것이 있다더군요.”
솔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서 하이어드 경께 대답을 들으려면 얼마나 기다려야하는 거지요?”
공녀의 샤프롱이라던 엄격한 얼굴의 디스그렌 백작 부인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자자, 숙녀를 기다리게 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솔라는 음흉한 얼굴로 윤을 재촉했다. 반사적으로 단검을 챙겨서 허리춤에 넣은 윤은 떠밀리듯 방 밖으로 나왔다.
“좋은 밤 보내십시오.”
문이 쾅 닫혔다.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애비가일의 샤프롱인 디스그렌 백작부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여인은 희게 새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틀어 올렸다. 회색 머리카락과 꽉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어우러져 마치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이 엄격한 인상을 주었다.
“이쪽입니다.”
“어서 오세요, 하이어드 경.”
문이 열리고 애비가일이 환하게 웃으며 윤을 반겼다. 그녀는 지극히 사적인 차림새였다. 아름다운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슈미즈 차림에 레이스가 화려한 로브를 걸쳤다. 풍성한 머리카락은 한쪽으로 땋아 내린 상태였다.
윤은 그제야 솔라가 지은 음흉한 미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유혹이었다. 애비가일의 모습은 잠자리에 들기 전, 마음에 드는 영식들을 침실로 이끌 때의 차림새다.
정절은 혼인을 한 후 후계자를 낳기 전까지만 요구되는 것으로 아벨라르 대륙의 여인들은 미혼일 때부터 자유롭게 연애를 했다.
아침 기상 의식인 투왈렛(toilette) 타임에 은밀한 유혹을 하거나, 밤중에 마음에 드는 영식을 불러들이기도 하였다. 이때 영애들이 머리를 풀어달라고 요청하면 그건 당신과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는 무언의 요구다.
그러나 남의 성에서 대놓고 하는 유혹이라니. 이건 사교계에 퍼진다면 어마어마한 구설수에 오를만한 일이다. 디스그렌 백작부인이 지었던 언짢은 표정도 단숨에 이해되었다.
윤은 애비가일의 행동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와 별개로 이 자리를 어떻게 모면해야할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비록 눈치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지만, 아론의 철두철미한 교육으로 인해 발을 빼야할 때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 그때라는 것도 잘 알았다.
“공녀. 저는 당신이 이럴만한 가치를 지닌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트민스트가 탐나지 않나요?”
“……황제 폐하의 사람이 되라는 겁니까?”
윤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애비가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아스탄 오라버니의 편을 들고 싶다면 그리해도 좋아요.”
“이스트민스트 공녀.”
“애비가일이라 불러주세요.”
여인이 촉촉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본다. 그 어떤 남자도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마치 주술을 걸 듯 하얀 손을 뻗어왔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마냥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오싹한 소름에 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에게 관심을 표한다. 그 어떤 남자가 싫다고 표현하랴. 하지만…. 예리한 감각이 경보음을 울려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공녀. 이 일은 불문에 붙이겠습니다. 공녀의 평판에도 지장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몸을 돌린 윤은 곧장 방을 벗어났다. 뒤에서부터 “하이어드 경!”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모른 체 했다.
이스트민스트 공녀를 단호하게 거부한 행동은 너무도 무례했다. 허나 그 방에서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무슨 소문이 퍼질지 몰랐다. 책임질만한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그녀와 얽히는 것이 무척 껄끄럽게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거지?’
미간을 좁히며 골몰해보았지만 답은 쉬이 나오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암살자들의 습격이 이어질지도. 윤은 제 등을 향해 쏘아 보던 디스그렌 백작부인의 매서운 눈빛을 생각하며 목을 쓰다듬었다.
‘일단 알리바이를 만들자.’
그늘을 틈타 환한 복도로 나온 윤은 제 방에서 나와서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은 것처럼 평연한 표정으로 하인을 붙잡았다.
“노스트라드 공작 전하의 방은 어디지?”
아스탄의 방은 귀한 객답게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과하게 꾸민 침실에 어지럽게 눈을 사로잡는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온 윤은 그 주인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아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제르센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둘이서 함께 자리를 비운 걸까. 그렇다고 치기엔 수신 호위들의 기척이 느껴진다.
“이봐.”
윤은 수신호위가 숨어있는 곳을 향해 정확히 고개를 돌렸다. 감정이 없는 수신 호위들은 심장이 철렁하는 느낌을 맛보았다.
황족을 위한 수신 호위는 두 부류로 나뉜다. 척 베스파뇰과도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기사와 안즈마네의 주술로 만들어낸 반인반마(伴人伴魔)의 인형이 있다. 반인반마의 수신 호위는 명확한 형체가 없기 때문에 암중에 숨어 황족을 수호할 수 있다. 허나 안즈마네 이후로 수신 호위를 만드는 법은 소실되었고, 점점 망가져서 폐기하는 수가 많았기 때문에 지금은 황제와 황태자에게 붙어있는 수가 채 열구가 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은 수신 호위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허나 윤은 초월자. 같은 초월자가 아니라면 숨어있는 이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아스탄은 어디 있지?”
수신 호위가 대답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죽을래?”
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을 들었다.
수신 호위는 형체가 없는 등으로 식은땀이 죽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저자라면 정말 자신들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작은 물소리가 들렸다. 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소리의 정체는 욕실에서부터 나고 있었다.
“…짜식들, 너희가 숨긴다고 모를 줄 알았냐. 저기 있었구만?”
윤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작품 후기 ============================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
힘든 월요일을 우리 함께 이겨내요 >_
~오늘의 후기~
제르센은 네이트 판에 글을 올렸다.
올케될 사람이 남자면 어떡하나요? 너무 혼란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