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전생보고서-41화 (41/111)

0041 / 0111 ----------------------------------------------

6장, 누명.

아스탄은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갔다. 그간 뭉쳐있던 여독이 풀리는 느낌에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물방울이 탄탄한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린다. 도룬 남작이 야심차게 준비한 시중조차도 거부한 채 혼자만의 여유를 즐겼다.

언뜻 욕실 밖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기는 하였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옳다. 그러나 편안한 휴식은 길게 가지 않았다. 낯선 인기척이 가까워져오기 때문이었다.

발소리를 죽인 이가 점점 다가오자 아스탄은 반사적으로 대비 자세를 취했다. 손이 닿는 거리에 놓아두었던 검을 움켜쥐었다. 욕실의 습기는 쇠로 만든 무기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노스트라드의 라덴성 안에서도 떼놓지 않은 호신도다. 적지라 할 수 있는 도룬에서 검을 챙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암살자의 침입에도 놀라지 않았다. 라덴에서도 지긋지긋하게 겪었던 일이다. 윤이 오고난 후 잦아들긴 하였으나 그 방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귀찮게 되었군.”

다만 밖에 남겨두었던 수신호위가 모두 처리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조금 위험하단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기껏 몸을 청결히 하였는데 다시금 피로 더러워지겠다는 약간의 귀찮음도 동반되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스탄은 당장이라도 발도해서 침입자를 벨 수 있도록 온몸을 긴장시켰다.

“아스, 나 들어간다!”

침입자의 정체는 윤이었다.

“윤?”

“그래, 고용된 윤 님이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검을 뽑으려던 아스탄은 도로 자리에 앉았다. 허탈한 표정을 지은 그는 검을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로 숨겼다.

“오, 욕실 좋잖아?”

윤은 커다란 욕탕를 보며 반색했다. 따끈따끈한 탕에 몸을 담그고 싶은 욕구가 마구 솟구쳤다. 그간 몸을 청결히 하는 일이라곤, 물에 적신 천으로 몸을 닦아내는 정도다. 도룬 영지에 와서도 그다지 달라진 건 없었다. 통과도 같은 자그마한 나무 욕조에 잠깐 몸을 담갔을 뿐이다.

아벨라르 대륙은 중세 유럽보단 청결에 대한 개념이 확실하였으나 목욕을 즐긴다는 건 아주 사치스러운 취미다. 기사단장이라 하여도 이렇다 할 작위가 없는 윤은 아스탄처럼 거대한 욕실에서 목욕을 하는 호사를 누리지 못하였다.

“무슨 일이지?”

“……잠깐 볼일이 있어서.”

“긴한 일이냐?”

“크게 중요한 건 아니야. 잠깐 할 얘기가 있었는데… 까먹었어.”

윤이 싱겁게 웃으며 제 뒷머리를 긁었다. 정확히 말하면 애비가일 공녀를 만났다는 흔적을 지우기 위한 알리바이를 만드는 행동에 가깝다. 본래 계획으론 시답지 않은 얘기를 나누다가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마음이 바뀌었다. 이렇게 잘 만든 욕탕에 들어가지도 않는다는 건 고양이가 생선을 그냥 지나치는 것과 같다.

“밖에서 잠시만 기다려라. 나가겠다.”

“아니, 나도 들어갈래.”

윤이 욕실의 문을 닫으며 말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목욕탕을 같이 갔다 와야 진정한 친구가 되거든.”

씩 웃으며 훌훌 옷을 벗어던졌다. 덕분에 옷에 감추어져 있던 맨몸이 드러났다. 본래도 흰 피부였지만 옷 속에 감추어져 있던 부위는 더욱 희었다. 허나 아벨라르 북부인과 달리 적당히 건강한 빛깔을 지니고 있었다.

아벨라르 인에 비해 호리호리한 체구라 하나 남자는 남자였다. 여인의 동그랗고 풍만한 곡선과 달리 단단한 선을 그리는 육체가 눈에 들어왔다. 제법 단단하게 단련된 가슴의 정점엔 연갈색 유륜이 눈에 띄었다. 시선은 저도 모르게 핥듯이 아래로 내려간다. 복근도 실팍하게 보였고, 검은 체모는 흰 피부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아스탄은 혀끝으로 침이 고이는 감각을 느꼈다.

제게 향하는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은 벗은 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아스탄을 향해 걸어왔다. 타인의 벗은 몸을 보는 것도, 제 벗은 몸을 보여주는 것도 흔히 겪는 일이라 거리낄 일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허나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일어 마른 침을 삼키자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역시 VIP는 다르구만.”

“VIP?”

“너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야. 봉이라고도 하지.”

탕 옆에 놓인 바가지로 물을 떠서 대강 몸에 물을 끼얹은 윤이 아스탄을 향해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나, 만찬 전에 깨끗하게 씻었다.”

윤은 탕에 뛰어들었다. 헤엄을 치듯 탕 여기저기를 수영하며 돌아다니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어린 소년 마냥 어렸다. 한참을 물장구를 치며 놀다가 그것이 질리는지 얼굴의 물기를 훑어낸 윤이 아스탄에게 다가왔다.

“오!”

눈을 동그랗게 뜬 윤이 아스탄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청년의 강인한 육체는 마치 장인이 혼신의 힘을 다해 깎아 만든 조각 같다. 잘 단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비율을 가지고 있어서, 적당히 두터운 가슴과 너른 어깨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아스, 너 제법이잖아.”

“아스탄이다.”

아스탄은 질리지도 않는지 제멋대로 붙여진 별명을 정정했다. 욕망 하나 없는 담백한 시선이 몸을 훑자 반사적으로 제 허리를 확인했다. 다행히 얇은 천으로 허리 아래를 감아둔 터라 윤곽만 어림짐작 될 뿐이다.

“이야, 몸 좋은 건 알고 있었는데. 실물은 더 대단하네.”

이제는 허락도 받지 않고 가슴팍을 더듬었다. 본인은 전혀 사심 없는 손길이었으나 받아들이는 쪽은 그렇지 않았다. 억눌렀던 열기가 솟아오른다.

아스탄은 제 배를 더듬는 윤의 손목을 휘어잡아서 끌어당겼다. 긴장을 풀고 있던 윤이 균형을 잃으며 끌려왔다. 성인 남자 둘이 거칠게 움직이자 욕조의 물이 크게 출렁거리며 흘러넘쳤다.

“아스?”

“…네가 살던 곳에서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벨라르에선 남자와 남자가 교접하는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야.”

그리 말한 아스탄은 윤의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가장 먼저 탐한 이유는 길게 뻗은 목에 줄곧 시선이 닿은 탓이다. 아프지 않게 깨물자 윤이 움찔한다. 달래듯 혀로 핥으며 세게 빨아올렸다. 달다. 열이 오른 머리로 아스탄이 생각했다. 매끈한 살결에 입술을 미끄러트리고 싶었고, 가슴의 정점을 맛보고 싶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눈앞의 부드러운 육체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탐하고 싶었다.

아스탄은 윤의 목덜미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 그의 위로 올라탔다. 명백한 성적인 의도를 담아 작고 탄력 있는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아! 간지러워!”

윤이 낄낄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버둥거렸다. 색기라곤 전혀 없는 웃음에 맥이 풀렸다

“힉힉, 간지럽다고. 으하하하하!”

가슴까지 들썩거리며 윤은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스탄은 엉덩이를 잡았던 손을 떼었다. 잠시나마 내보였던 욕망을 갈무리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함부로 사내의 침실이나 욕실에 침입하지 말란 거다. 너 또한 사내라면 그 욕망을 잘 알겠지.”

아스탄은 물기에 젖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또렷한 눈빛으로 윤을 응시했다. 배출되지 못한 성욕이 마구 들끓고 있었다. 잠시 눈앞의 청년을 엉망으로 탐하고 싶은 흉포한 욕망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을 억지로 잡아 구겨 넣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윤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스탄을 올려다보고 있다. 놀랄만큼 천진한 시선이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의 하반신을 향했다.

“어…….”

격렬한 움직임에 허리에 감아두었던 천이 풀렸고, 아스탄의 몸 역시 완전히 나신이 되었다.

“음, 아스.”

윤의 입술이 헤벌어졌다.

“야…. 이거 정말 장난 아닌데. 어디 가서 말도 못하고.”

윤은 해맑은 얼굴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아스탄은 가두듯 짚은 팔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아찔해질 만큼 치고 오르던 욕망이 한풀 꺾였다.

“뭐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래도 이 형님이 어디 가서 호락호락 당할 사람은 아니라서.”

“하아-. 그런 뜻이 아니다.”

“아하하. 너 방금 되게 여동생 주변에 늑대가 접근할까봐 경계하는 오빠 같았다? 이레인이 여자였으면 어쩔 뻔 했어.”

윤은 아스탄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황당한 반응에 힘이 빠진 아스탄은 쉽게 밀려났다.

탕 밖으로 나온 윤이 몸의 물기를 대강 닦아냈다. 투명한 물방울이 매끄러운 나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수건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후엔 벗어둔 옷을 입기 시작했다. 길고 날씬한 다리가, 밋밋한 가슴이 옷 속으로 가려졌다.

“너무 오래 몸 담그고 있진 말고. 잘 자, 아스.”

살랑하고 손을 흔든 윤이 바람처럼 욕실을 나가버렸다. 그러나 윤이 남기고 간 흔적은 산들 바람이 아니라 태풍에 비견되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기랄.”

아스탄은 허탈한 표정으로 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플 정도로 발기한 성기는 조금도 그 위세를 가라앉힐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윤을 쫓아가거나, 아니면 지나가는 이들을 붙잡아 제 욕구를 풀 수 있었다. 정결한 몸인 남작 영애조차 탐할 수 있으리라. 허나 그럴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가 왜.”

아스탄은 거칠게 입술을 깨물었다.

방으로 돌아온 윤은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누였다. 솔라는 제 방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기가 베개를 적셨으나 개의치 않았다.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워 몸을 둥글게 말았다.

비록 제대로 된 경험은 없다 하나 윤 역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욕구를 가진 남자였다. 아스탄이 무슨 의도를 품고 자신에게 접촉했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렇게 강렬한 열기를 품고 다가온 사람은 칠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명도 없었다. 손목을 잡아채던 강한 힘, 낙인을 찍듯 뜨거운 입술은 아직까지 선명한 감각으로 윤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아-….”

제 속도를 잃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을 들어 아스탄의 입술이 닿았던 목덜미를 지그시 눌렀다.

“…내가 미쳤나.”

동성 간에 생식은 불가능하였으나 아벨라르 대륙에서 동성애는 터부시되지 않았다. 비록 혼인은 남녀의 것이라 하나, 공공연하게 동성의 애인을 사귀었고 그것을 감추지 않았다. 주신이라 할 수 있는 벨라드 역시 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인간이 아닌 이종족 중에서는 동성 간에서도 생식이 가능하단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세상에서 50년을 살아왔기 때문인지 윤은 비교적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를 좋아하거나 욕구를 느낀 적은 없었다.

“아스도 순간 헤까닥 했던 거야. 그 예쁜 여자들을 놔두고.”

윤이 중얼중얼 했다.

“……진심이었다면 그때 놔주지 않았겠지.”

아무렇지 않은 체 하느라 얼마나 노력했던가. 나이 값 못하는 제 행동이 이렇게 잘 먹힌 적은 처음이다.

그린 듯 미려한 이목구비는 언제나 무심하거나 냉정하였는데, 성욕으로 이지러진 모습은 무척 색달랐다. 강한 힘으로 자신을 짓누르던 건장한 육체와 바짝 일어서서 제 흥분을 드러내던 남성의 상징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르자 윤은 제 머리카락을 감싸 쥐었다.

“…빌어먹을.”

이스트민스트 공녀의 유혹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같은 거 달린 사내놈의 유혹에 반응하다니. 제대로 망했다. 윤은 완전히 발기한 제 성기를 우울한 표정으로 내려 보다가 다시 몸을 둥글게 말았다.

============================ 작품 후기 ============================

에고님께서 멋진 팬아트를 주셨답니다! 무려 윤이를 그려주셨어요!! 그리고 감사하게도 표지로 쓰는 것도 허락해주셨답니다 >_

정말 제 상상 속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듯한 그림에 감격 또 감격입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소설을 읽어주고 감상을 달아주신 모든 분들과 쪼그마이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