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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습격
마차안은 제르센의 말대로 성인 남자 둘이 멀찍이 떨어져서 자도 될 만큼 넓었다. 등을 켜두었기 때문에 낮만큼 환하진 않았으나 무언가를 보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아스탄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또다시 서류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어딜 갔다가 이제 오는 거지?”
“……다들 내가 여기서 자는 게 당연한 거였냐고.”
아스탄은 피식 웃으며 서류를 정리한 뒤 함에 넣어두었다. 엉금엉금 침상 위로 기어 올라온 윤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음, 아스탄.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도룬 백작의 사인 말인데. 그를 죽게 만든 마녀의 술법이 무엇이지? 그걸 왜 이스트민스트 공녀가 알고 있는 거야?”
두서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아스탄은 차근차근 답해주었다.
“우선 도룬 남작이 사망한 원인은 꼭두각시의 술이다.”
“그게 뭐야.”
듣기만 해도 기분 나쁜 이름에 윤이 미간을 찡그렸다.
“고독(蠱毒)을 아는가?”
“대충.”
고독(蠱毒). 마녀들의 주술 중 최악의 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저주술이다. 만드는 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주술을 건 항아리에 지네, 독두꺼비, 독사 등 맹독을 가진 생물들을 집어넣지만, 먹이는 주지 않는다. 굶주림에 서로를 잡아먹게 만드는데 마지막 남은 한 마리가 한을 품은 독물이 된다. 그러면 초월자도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 독의 완성이다.
윤은 자신이 죽게 만든 독도 고독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독이라니. 말도 안된다. 이미 위험하고 저주 받을 주술들을 폐기한지 백오십년 쯤 되지 않았던가.
마녀가 배척받는 데는 저주의 영향이 컸다. 그리하여 대마녀가 된 안즈마네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금지된 주술들을 모두 폐기하였다. 덕분에 마녀들이 사람과 섞여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배척받는 길을 선택하다니 윤이 미간을 찌푸렸다.
“고독을 먹이면 일정시간 정도 상대방을 조종할 수 있다고 해. 꼭두각시의 시야도 공유할 수 있고. 허나 이미 고독을 먹은 시점에서 죽었기 때문에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행동을 보인다. 도룬 남작이 멍청한 작자인 건 맞지만, 더 멍청했던 이유인 거지.”
“……그럼 한 가지만 더. 왜 이스트민스트 공녀가 보증한 거야?”
“몰랐나? 그녀는 대마녀의 피를 이은 여성이지. 어린 마녀다.”
“어쩐지.”
애비가일의 앞에만 서면 무서웠던 이유가 있었다고 윤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너의 궁금증을 해결하여 주었으니, 나도 하나를 묻겠다.”
“마음대로.”
“솔라 아이그너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것 아닌가?”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의 자세한 내막을 모른다. 아스탄이 보고를 받긴 하였으나, 그건 솔라와 다른 시종들이 올린 일방적인 내용이다. 그 중 솔라의 잘못은 없었으나, 윤이 내칠 정도라면 큰 문제가 있었던 게 틀림 없다. 헌데 그리도 쉽게 받아주다니, 배포가 너른 건지 그저 속이 없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글쎄. 솔라가 잘못을 했지만 말이야. 엄청 큰 잘못은 아니었어. 그걸로 미워하거나 싫어하며 감정소모를 하고 싶진 않아. 게다가 잘못했다고 하잖아? 뉘우칠 기회는 주어야겠지.”
“그런가.”
“물론 내 행동이 이해가지 않을 수 있어. 사람마다 이견이 있는 거니까.”
윤은 침상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쓸쓸한 표정으로 마차의 천장을 쳐다보았다.
“내가 엄청나게 오랜 시간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지나고 나면 모든 게 허무하다는 걸 배웠을 뿐이야.”
아스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계속해서 그의 신경을 계속해서 잡아당기는 위화감이 지금도 느껴졌다. 연인이 있냐고, 마음에 둔 사람이 있냐고 했을 때 당연히 없다는 듯 대꾸하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이윽고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윤은 누구에게도 깊이 마음을 주지 않았고 마음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다정한 건, 모두가 의미 없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아마 저쪽 세상에서도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몸은 이곳에 있으나 마음은 어디에도 없다. 빈껍데기였다. 자신도 그에겐 의미 없는 사람 중 하나인 것일까. 형체 모를 불안감이 제 몸집을 키웠다. 초조해졌다.
“왜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야? 어이, 아스?”
생각에 골몰한 아스탄의 표정이 심각했던지 윤이 무릎걸음으로 기어와 아스탄의 얼굴 앞으로 손을 휘휘 흔들었다.
“……너는.”
아스탄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목을 잡아챘다. 두 사람의 얼굴이 맞닿을 듯 가까워졌다.
“아스?”
“아무 것도 아니다.”
“실없긴. 오랜만에 운동 좀 했더니 피곤하다. 먼저 잘게. 잘 자.”
뒤돌아 누운 윤은 몸을 둥글게 말았다. 가볍게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가만히 그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잠이든 체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도대체 어떤 삶을 겪었기에 마치 닳고 닳은 돌처럼 무신경해질 수 있는 건지. 답답함을 느낀 아스탄은 마차 밖으로 나왔다. 불침번을 서고 있던 롭 이벨로크가 앉은 상태로 길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하다가 입을 틀어막는다.
“아직 깨어계셨습니까? 피곤하실 텐데요.”
“괜찮다.”
어차피 불면증은 오랜 친구였다. 롭의 말대로 몸이 무겁긴 하였으나 활동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었다. 정 못 견딜 것 같다면 잠시 쪽잠을 자면 된다. 아스탄은 롭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 드시지요.”
롭이 술잔을 아스탄에게 불쑥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술은 쌀쌀한 날씨에 무척 유혹적으로 다가왔다. 롭은 독이 들지 않음을 증명하듯 먼저 크게 한 모금 마셨다. 아스탄 역시 데운 술을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따뜻한 술에 추위가 가셨다.
“저는 또 마차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기에 오늘 밤은 그냥 주무시나했지요.”
“……롭 이벨로크.”
롭이 음흉한 표정을 짓자 아스탄이 차갑게 노려보았다.
“농담입니다. 어차, 제르센에게는 비밀입니다. 잔소리가 어찌나 따가운지요.”
롭은 굵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한쪽 귀를 틀어막으며 골 아픈 표정을 지었다.
“반드시 제르센에게 전하지.”
“주군! 생각만해도 머리가 아프단 말입니다. 그나저나 하이어드 경 말입니다. 주군.”
“……그가 왜?”
“정말 소드 익스퍼트가 맞는 걸까요. 하이어드 경의 검술을 몇 번 견식 하였지만 말입니다. 저와 같은 경지에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질 않습니다. 오늘만 해도…….”
낮의 전투를 회상하는 롭의 어깨가 부르르 떨었다.
“마치 사신 같았습죠. 어쩌면 그가 검공의 환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이름도 같지 않습니까. 무어, 제 우스운 생각이지만요.”
“……그런가.”
“예. 저는 주군이 단 여섯의 숫자로 제도로 향하신다고 들었을 때, 당신께도 광증이 찾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전투를 보고난 후 제 오판임을 깨달았습니다. 하이어드 경 하나만 있어도 충분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술잔을 남김없이 비운 롭이 제 머리를 향해 털었다. 바닥에 깔려있던 몇 방울이 튀는 것 외엔 깨끗하게 마셨다.
“우리는 반드시 이기겠지요?”
“그리 만들거다.”
아스탄은 술잔을 든 채 생각에 잠겼다.
“하이어드 경이 우리편이어서 다행입니다.”
“본공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갈 길이 멉니다. 얼른 잠자리에 드십쇼.”
아스탄은 밤이 이슥해진 후에야 마차로 돌아와 침상에 들었다.
누군가의 고민을 모르는 윤은 행복한 얼굴로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시트를 애벌레처럼 둘둘 휘어 감고 잠이 들 땐 언제고 지금은 팔다리를 좍 펼쳐 활개를 치고 있었다. 잠버릇이 참으로 고약했다. 침실로 개조했다하지만 마차는 완벽한 방이 되진 아니하였다. 밤의 냉기가 찾아들자 윤은 추운지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온기를 찾아서 꾸물꾸물 움직였다. 종착지는 아스탄의 옆이다.
“…윤.”
아스탄이 제 허리에 달라붙은 윤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팔과 다리로 칭칭 옭아매고서 만족한 웃음을 띤다. 두근두근,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 고동이 팔을 통해 전해져왔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아스탄은 제 팔을 내어준 채 눈을 감았다.
긴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꿈을 꾸었다.
온 세상이 절망이었다.
꿈속의 자신은 점점 스러져가는 형체를 끌어안고 오열하였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그를 뒤따랐다. 사랑스러운 온기를 잃어버린 입술에 도장을 찍듯 꾹 눌렀다. 차갑다. 그가 뇌까렸다. 입술에서 턱으로, 목에서 가슴께로 점점 입술을 옮겨갔다. 그리고 심장 위에 제 귀를 가져다 대었다. 생명의 근원은 멎어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차가운 물에 온몸이 잠긴 것처럼 써늘하게 식어 내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눈을 떠보세요. ……가지마세요. 떠나지 마세요. 내가, 내가 잘못하였습니다―.”
울부짖었으나 후회는 때가 늦었다. 온기 없는 형체는 천천히 검은색으로 바스라지고 있었다.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손이, 강하게 끌어안고 지켜주던 팔이 사라져간다. 청년은 견딜 수 없어졌다. 단번에 품에서 칼을 꺼내 제 심장을 찌르려 하였다.
끔찍한 악몽에 고통스러워하던 것도 찰나, 갑자기 누군가 그 꿈에 난입하였다. 윤이었다. 그가 자신의 등짝을 아프게 때렸다.
“후회할 일이라면 하지 마! 바보야!”
윤이 매섭게 소리쳤으나 무섭지 않았다.
아스탄은 웃음을 흘리며 꿈 속의 윤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품안의 온기가 “음.” 하고 마주 안아온다. 가슴 속에서부터 충만함이 차올랐다. 저도 모르고 있던 깊은 갈증이 해소되는 듯하였다. 황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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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7월 13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