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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밝혀지는 정체
“여긴 어떻게…….”
“황제에겐 나의 낙인이 찍혀있으니, 내 소유물이나 다름없지. 잠깐 몸을 빌리는 건 일도 아니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팔라티온 역시 동의한 거니까.”
“강신(降神)?”
윤은 어렵지 않게 가리온이 황제의 몸을 빌린 방법을 알아내었다. 가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신. 용이나 신 등 신격을 지닌 존재를 몸에 불러들이는 주술 중 하나였다. 당연 그에 따른 부작용은 어마어마하였다. 그대로 몸을 빼앗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세인들의 착각과 달리 신은 선하지 않았다. 그저 세상의 균형을 위해 냉정하게 저울질하고 움직이는 존재였다. 인간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었다.
특히나 황룡 가리온은 인간의 시선으로 보자면 악에 가깝다. 그런 이에게 몸을 내어준다니. 어떤 결과를 자초할 줄 알고 그런 위험한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그리 위험한 짓을 월스턴이 자초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 떨어지고 난 후 월스턴과 알고 지낸 시간만 이십년이 넘었다. 비밀은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친우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자신에게 숨기고 있었다. 안즈마네나 율리히는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것일까.
애당초 가리온 같은 이가 축복을 순순히 내려준다는 것 자체를 의심했어야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백 년 전엔 몰랐던 사실들이 연달아 폭탄처럼 꽝꽝 터졌다.
“세월을 헛살진 않았구나? 네가 금세 눈치 챈 걸 보면.”
“낙인에 그런 기능이 있다는 건 알지 못 했어.”
윤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룡의 인장은 저런 용도가 아니었다. 그저 남들보다 뛰어난 육체와 오성을 가지게 해주는 축복에 불과했다. 사람을 조종하다니, 말도 안 된다. 황룡을 만나던 당시 월스턴과 함께 윤도 있었다. 그때는 이런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하였다.
가리온은 윤의 궁금증을 해소해주지 않고 제 할 말만을 쏟아내었다.
“걱정 마, 넌 몰라도, 황가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으니까.”
“…월스턴이나 레나드도?”
“당연. 나는 착한 용이라고?”
어깨를 으쓱한 가리온이 귀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30대로 접어든 원숙한 성인 외양의 남자가 귀여운 체 하는 건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가리온은 신난 목소리로 지껄였다.
“네 기운이 느껴졌는데 볼 수가 없어 답답했어. 아스타시온은 인장이 없으니 강신(降神)을 할 수 없거든.”
“……이게 대체.”
“왜 내가 너무 반가워서 말이 잘 나오질 않아? 나도 반가워, 윤. 아율라하도 널 그리워하고 있어.”
거짓말. 윤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외침을 삼켰다. 아율라하, 아니 율리히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한다고?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황제가 인사를 끝까지 받지 않은 탓에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어앉아 있던 아스탄은 익숙한 이름에 귀를 기울였다.
아율라하. 대륙 공용어로 바꾸면 율리히.
사총사 중 요정 마법사의 이름이었다. 윤이 어찌 그를 안단 말인가. 마치 황룡은 윤이 검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했다.
윤은 주먹을 꾹 쥔 채 황제 아니 가리온을 노려보았다.
“……가리온.”
“윤, 그런 표정은 무섭다구?”
아마 황제만 아니었다면 당장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걸 털어놓으라고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을 것이다. 윤의 속내를 안다는 듯 가리온이 얄밉게 웃었다.
“이런 시간이 다 되어가네.”
황제의 눈동자 색깔이 적갈색으로 변했다가 황금색으로 돌아오길 반복하였다. 가리온은 윤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퍽 다정한 태도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용의 계곡에서 만난다면 네게 이야기를 해줄게. 게이트를 열어놓을테니 언제든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가리온이 속삭였다.
맹수의 것처럼 길게 찢어져 있던 동공이 점점 둥글게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황제는 품속의 윤을 보더니 내팽개치듯 밀쳐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황제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비틀거리며 두어 발자국 물러났다. 연약한 인간의 몸에 신격을 받아들였으니 그 후유증이란 어마어마할 것이다. 손톱을 세워 자신의 얼굴을 긁어내리듯 쓸어내린 황제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대가 윤이라고?”
이윽고 윤의 턱을 잡아 올린 황제는 잔악한 눈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폈다. 뱀처럼 교활하고 징그러운 시선에 속이 울렁거렸다.
“네가?”
짜악! 돌연 황제는 윤의 뺨을 매정하게 내려쳤다. 난데없이 따귀를 맞은 윤이 자신의 뺨을 붙잡고 눈만 깜빡거렸다.
“더러운 것이 묻었군.”
황제가 손을 들자 시종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비단 천을 내밀었다. 그것으로 손을 닦아 내었다. 비단천도 오물이라는 듯 바닥으로 집어던진다.
“모두 편한 자세를 취하도록.”
느긋한 걸음으로 단상 위로 올라와 자신의 자리에 앉았은 황제는 귀족들을 한 번 휘어잡듯 돌아보았다.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고 있던 귀족들이 바르게 섰다.
“그대가 차 대륙의 이방인, 윤인가.”
“그렇습니다.”
“……과연 이 곳의 생김새는 아니군.”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저 자가 그 소드 익스퍼트의 검사인가요?”
황제의 팔을 붙잡은 샤리크 백작부인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눈이 불길하게 빛났다.
“과연. 대단해요. 이레인 황자는 참 운이 좋았군요. 무도한 자들의 습격에서 운이 좋게 살아남다니.”
“그렇지, 마리아. 사람의 삶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맞아요. 폐하. 그런데 저 가느다란 팔로 검을 휘두른다니, 다른 걸 휘두르는 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말이예요.”
백작부인이 날카롭게 비웃었다. 황제파의 귀족들도 따라서 그를 비웃었다.
윤은 무심한 얼굴이었다. 외양으로 무시당하는 건 딱히 화가 날 일도 아니었다. 되레 아스탄을 비롯해, 윤에게 목숨을 구명받은 이들이 이를 악물며 매서운 표정이 되었다.
“황룡 가리온과 어떻게 아는 사이지?”
“우연히 이 곳으로 오게 되었을 때 한 번 뵈었을 뿐입니다.”
“그렇군.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가 정녕 사실인가?”
“미흡하나 그렇사옵니다.”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경의 나이가 올해 어떻게 되지?”
“올해 속하는 스물하나가 됩니다.”
“어리군. 과연 검공이 있던 곳에서 온 이들은 모두 검을 잘 쓰는 것인가.”
황제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검공께서 귀천하기 전 그런 말을 남기셨지. 그란디아가 혼란스러워지고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 반드시 그 모습을 드러내시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대가 나타났어. 놀랍군, 놀라워. 그것도 내 자랑스러운 아드님의 앞에 말이야. ……그래, 아스타시온, 잘 왔다. 네 혁혁한 전공은 이미 센트리움에 널리 퍼진 바, 이 아비가 참으로 기쁘기 한량없구나.”
“모두 폐하의 은공일 뿐, 소자 한 것이 없나이다.”
황제는 아스탄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스탄과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혔다. 윤과 비교될 수 없는 살벌한 기운이 두 부자의 사이에서 오갔다.
“피곤할 터이니 물러가서 푹 쉬도록 하여라. 널 위한 연회를 준비하마.”
흥미를 잃었다는 듯 무심한 목소리로 대화를 끝낸 황제는 물러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5년 만에 만난 부자의 상봉은 삭막한 손짓으로 끝이 났다. 다행히 누구도 피를 보지 않았기에 세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장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어찌 받아들여야할지 고민하는 동시에, 황룡이 신경 쓰는 이방인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스탄에게 주어진 방은 바람의 방. 황제의 적장자에게 주어지는 처소였다. 바람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푸른색과 흰색을 모티브로 꾸며졌다. 아주 오랫동안 주인 없이 비어있었지만, 그 공백을 찾을 수 없다. 완벽하게 단장된 채 그들을 맞이했다.
방으로 들어선 아스탄은 망토를 풀어 제르센에게 넘겼다. 불편하게 목을 죄고 있던 겉옷의 단추를 풀어 내렸다. 언제나 자신을 옥죄듯 단정한 옷차림을 하는 그가 옷매무새를 흩트리는 건 드문 일이었다.
“모두 물러가라.”
“예.”
“부를 때까지 모두 방에서 쉬도록. 수고 많았다. 윤 그대는 남도록 해. 할 말이 있다.”
제르센이 고개를 숙인 뒤 뒷걸음질 쳐서 방을 나섰다. 롭과 스완을 비롯한 이들도 재빠르게 물러났다. 스완은 윤이 신경 쓰이는 것처럼 머뭇거렸지만, 롭의 손에 이끌려 나가야했다.
윤은 솔라를 돌아보았다.
“솔라, 내게 배정된 처소에서 기다리도록 해.”
“아닙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솔라의 거부에 윤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예.”
솔라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목례한 후 방을 빠져나갔다.
방에 남은 건 윤과 아스탄, 둘 뿐이었다. 마치 매를 맞기 직전의 아이처럼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의자에 앉은 아스탄이 맞은편을 가리켰다.
“우선 앉도록 하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그래.”
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 정체가 도대체 무어냐. 어째서 황룡과 요정족 장로, 율리히를 알고 있는 거지?”